필름 현상을 기다리는 그 순간까지도 낭만의 정서로 가득차다

을지로3가역 11번 출입구와 맞닿은 건물. 그 건물을 올려다보면 3층 창문으로 새빨간 네온사인과 초록 바탕의 꽃무늬 커튼이 보인다. 후지필름·코니카라고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사진과 관련된 곳인 것은 분명한데 네온사인에는 ‘망우삼림(忘憂森林)’이라는 뜻 모를 네 글자의 한자만 적혀 있다. 이 한자는 대만 난터우 산림시에 있는한 원시 삼림인 망우삼림을 의미한다. 늪지에 솟은 삼나무의 그림자가 수면에 비쳐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유명해 대만 8대 절경으로 꼽히는 망우삼림은 그 풍경만큼이나 의미도 시적이다. 잊을 ‘망’에 근심 ‘우’, 수풀 ‘삼’과 수풀 ‘림’을 써 ‘근심을 잊게 해 주는 숲’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홍콩영화 속 분위기를 자아내는 망우삼림 내부 전경 (사진=망우삼림)
홍콩영화 속 분위기를 자아내는 망우삼림 내부 전경 (사진=망우삼림)
건물 3층 창문으로 보이는 네온사인과 사진 현상소임을 짐작케 하는 후지필름·코니카 부착물 (사진=망우삼림)
건물 3층 창문으로 보이는 네온사인과 사진 현상소임을 짐작케 하는 후지필름·코니카 부착물 (사진=망우삼림)
하나둘 모은 취향, 공감이 되다망우삼림에 담긴 의미와는 상반되게 이곳은 사진 현상소다. 보통 두고두고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남기곤 하는데 근심을 잊게 해 주는 사진 현상소라니 이름 붙인 이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망우삼림 윤병주 대표는 이곳을 ‘나쁜 기억을 잊게 해 주는 망각의 숲’이라고 표현한다. “대부분 사진 현상소는 기억이나 기록과 관련된 이름을 붙이곤 하는데 저는 반대로 역설적인 의미를 담으면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어떻게 보면 기억을 잊는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망우삼림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어스름한 빛과 이국적인 인테리어가 이곳이 여느 사진 현상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파란 날개가 돋보이는 오래된 선풍기, 후지필름이라고 쓰인 전광판, 박스에 담긴 LP, 화려한 꽃무늬 테이블 보와 커튼, 레트로한 시계까지 홍콩 영화 속 주인공이 자주 들르는 현상소가 있다면 바로 이곳일 것만 같다. ‘중경삼림(重慶森林)’, ‘천장지구(天若有情)’,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홍콩 영화 제목처럼 네 개의 한자로 된 이름을 짓고 싶었다는 윤병주 대표는 어린 시절 즐겨 보던 홍콩 영화가 이곳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큰 몫을 했다고 말했다. “홍콩의 지역적 분위기와 영화의 무드가 정말 인상 깊었어요. 그런 분위기가 어린 시절 제 심상에 강하게 와 닿은 것인지 만약 제 공간을 꾸미게 된다면 홍콩 영화 분위기를 담고 싶다는 것이 오랜 소원이었죠.”

이곳을 천천히 살펴보면 윤 대표 인생 전반에 걸친 취향과 환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콩 영화를 연상케 하는 소품을 시작으로 사진을 전공한 그의 주위에 늘 존재하던 예술가 친구들의 그림, 그가 아르헨티나에서 이민 생활을 했던 시절을 돌아보게 하는 그림 등 그의 인생 한 컷 한 컷을 연상할 수 있는 물건들이 켜켜이 쌓이고 어우러져 이 몽환적인 공간을 만들어 냈다. 이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소품들 역시 윤 대표가 직접 공수했다. 필름 진열장은 일본 여행 중 빈티지 숍에서 발견한 것이다. 원래의 쓰임은 담배 진열대였는데 마침 가지고 있던 필름을 끼워 보니 사이즈가 맞춘 듯 꼭 맞아 직접 운반해 왔다. 벽에 걸린 시계 역시 우연히 찾은 일본의 빈티지 숍에서 4만원을 주고 구매해 온 것이다. 고장이 나 있었지만 고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에 구매해 망우삼림 한쪽 벽면에 걸어 놓았는데 알고 보니 영화 ‘중경삼림’에 나온 시계라는 것을 손님을 통해 알게 됐다.

필름 현상을 맡기고 잠시 앉아 있는 몇 분 동안에도 20~30대 손님 꽤 여럿이 오고 간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직원들 역시 바쁜 기색이 역력하다. 이곳을 찾는 손님은 보통 20~30대가 주를 이룬다. 최근 필름 가격이 많이 오른 때문인지 방문자의 연령대가 25~35세 정도로 다소 오르기도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공간이 어린 청년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자리 잡은 모습을 보니 윤 대표가 꿈꿔 온 망우삼림의 모습은 이미 실현된 것 같다.

“예술가가 세상에 작품을 내놓을 때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받을까’라는 생각보다 ‘어떻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 있을까’를 더 중점적으로 생각하잖아요. 저 역시 그런 마음으로 이 공간을 꾸몄어요. 어떤 식으로든 이곳을 방문한 분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됐으면 해요. 또한 망우삼림 고유의 인상을 각인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1층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망우삼림의 입간판 (사진=강은영 기자)
1층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망우삼림의 입간판 (사진=강은영 기자)
이곳에서 필름진열장으로 탈바꿈한 빈티지 담배 진열대 (사진=강은영 기자)
이곳에서 필름진열장으로 탈바꿈한 빈티지 담배 진열대 (사진=강은영 기자)
필름 카메라 감성에 편리함 한 스푼망우삼림의 장점은 ‘편리함’과 ‘특별함’이다. 우선 스마트폰과 애플리케이션만 있으면 사진 파일을 스마트폰으로 빠르게 받을 수 있어 편리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필름을 현상한 디지털 파일은 CD로 전달받았다. CD를 다시 받으러 가야 했기 때문에 현상소를 두 번 방문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후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e메일로 파일을 전달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망우삼림은 스마트폰과 카카오톡, 압축을 풀어주는 애플리케이션만 있으면 스마트폰을 통해 바로 필름 카메라 현상본을 확인할 수 있다. 아날로그 감성의 결과물을 마치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듯 편리한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편리함과 함께 특유의 무드로 꾸며진 망우삼림이라는 공간은 필름 현상을 맡기러 가는 날을 ‘특별함’으로 채워 준다.

보통의 사진 현상소는 대형마트 입구에 조그맣게 달려 있거나 입구에 화목한 가족사진이 붙어 있는 대중적인 분위기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필름을 맡기러 현상소에 가는 일은 크게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결과물을 언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기다림이 필름 카메라가 주는 낭만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망우삼림이라는 공간을 알게 된 이후 필름을 맡기러 가는 날까지도 특별함으로 채워졌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 가운데 기다림의 미학은 아날로그의 매력으로 꼽힌다. 이곳은 비단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기다리는 순간뿐만 아니라 소중한 기억을 맡기는 순간까지도 낭만의 정서로 물들여 준다.

강은영 한경무크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