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업·석유화학 등 낡은 이름에 미래 비전 못 담아
포스코·HD현대·한화 신규 사명 교체 바람

[비즈니스 포커스]
‘세계 가전 전시회(CES) 2023’의 HD현대 부스에서 관람객들이 오션 모빌리티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세계 가전 전시회(CES) 2023’의 HD현대 부스에서 관람객들이 오션 모빌리티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주주 총회 시즌을 맞아 재계에 사명(社名) 변경 바람이 불고 있다. 그간 익숙했던 기업들의 이름은 ‘무엇을 하는 기업인지 업의 영역을 분명하게 규정하는 사명’이었다.

어느 그룹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사명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사명에서 큰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기존 사명에서 업종을 전면에 내세운 기업들이 사업 확장에 한계를 느끼면서 확장성 있고 미래 지향적인 사명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민은정 인터브랜드 한국법인 최고콘텐츠책임자(CCO·전무)는 “모든 비즈니스가 급격하게 변화하며 산업 간의 경계가 무너진 지금 업종의 구분은 무의미하고 10년 후에 기업이 어떻게 변화하고 확장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며 “한정된 업의 영역을 넘어 과감한 피버팅만이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때문에 기업들이 사명 변경에 나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사업·ESG 경영 강화에 주력 사업 지우기

기업들이 사명 변경을 하는 것은 낡은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신사업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겠다는 취지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2022년 사명을 변경한 상장사는 총 104개로, 상호 변경 사유로는 ‘회사 이미지 제고(29.9%)’가 가장 많았다. 이어 ‘경영 목적 및 전략 제고(27.7%)’, ‘회사 분할·합병(20.4%)’, ‘사업 다각화(20.4%)’ 순이었다.

수십년간 사용한 이름을 버리는 이유는 세계적인 탈탄소화 기조, 기업 간 합종연횡, 이종 산업과의 융합이 가속화하는 시대에 특정 이미지로 고착화된 기존 사명으로는 사업 확장에 제한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과 탄소 중립 비전이 강조되면서 철강·조선·석유화학 등 중후장대업계에선 주력 사업의 이미지 지우기에 한창이다. 해양 모빌리티 기업으로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는 HD현대(구 현대중공업지주)는 지난 50년간 그룹 전체를 상징하던 ‘중공업’을 버리고 2022년 3월 ‘HD현대’로 사명을 바꿨다.

2023년 3월 정기 주주 총회에서 조선 중간 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은 ‘HD한국조선해양’, 현대중공업은 ‘HD현대중공업’으로 각각 바꾸기로 했다. HD현대는 인간이 가진 역동적인 에너지(Human Dynamics)’로 인류의 꿈(Human Dreams)을 실현한다는 의미다.

한화테크윈은 ‘한화비전’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영상 보안 솔루션에서 나아가 차세대 비전 솔루션 분야를 선도해 글로벌 시장 혁신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한화가 2015년 삼성테크윈을 인수한 이후 한화테크윈이란 이름을 사용해 왔지만 사명 변경을 통해 삼성의 흔적을 지우고 종합 보안 전문 기업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포스코는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철강 기업의 이미지를 벗고 신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계열사 사명을 변경 중이다. 포스코케미칼은 친환경 미래 소재 기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며 ‘포스코퓨처엠’으로 사명을 바꿨다. 미래(퓨처)라는 단어와 소재(materials), 변화(move)의 머리글자인 ‘M’을 조합했다.

포스코ICT는 산업 전반의 ‘디지털 대전환(DX)’을 이끄는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뜻을 담아 ‘포스코DX’로, 포스코건설은 환경(eco)과 도전(challenge)의 의미를 담은 ‘포스코이앤씨(E&C)’로 바꿨다.
포스코퓨처엠 신입사원들이 3월 20일 사명변경 선포식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포스코퓨처엠 제공
포스코퓨처엠 신입사원들이 3월 20일 사명변경 선포식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포스코퓨처엠 제공
사업 확장에 한계…수십년 쓴 이름도 바꿔

롯데제과는 2022년 롯데푸드와 합병한 뒤 56년간 사용해 온 사명을 변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신규 사명으로는 ‘롯데웰푸드’가 유력하다. 롯데제과는 1967년 신격호 명예회장이 설립한 한국 롯데그룹의 모태 기업이라는 상징성이 커 사명 변경을 두고 내부 고민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기존 사명이 롯데푸드의 가정 간편식(HMR), 육가공 식품, 대체 단백질 등 미래 먹거리 사업을 포괄하지 못해 종합 식품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새로운 사명이 필요하다는 데 내부적으로 공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일유업은 사명에서 ‘유업’을 빼는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저출산 분위기 속에서 분유 등 우유 관련 매출이 줄어들고 최근엔 고령층 대상 단백질 보충제나 외식 사업이 주력 사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2021년 hy로 사명을 바꾼 한국야쿠르트도 어린이보다 성인용 제품이 더 많이 팔려 특정 제품명이 담긴 사명이 회사를 대표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50년 이상 써 온 사명을 바꿨다. 이름에 갇히지 않고 유통 전문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다.

한라그룹은 젊은 브랜드로 탈바꿈하기 위해 2022년 8월 ‘HL’로 사명을 교체했다. HL은 ‘하이어 라이프(Higher Life)’의 영문 앞글자를 딴 것으로 ‘더 높은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LS니꼬동제련은 2022년 10월 LS MnM으로 사명을 바꿨다. LS MnM에는 기존의 금속(Metals) 사업과 미래 성장 산업인 소재(Materials) 사업을 융합해 성장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인수·합병(M&A)으로 주인이 바뀐 기업들도 신규 사명을 통해 정체성 통일에 나섰다. 한화그룹이 인수한 대우조선해양은 신규 사명으로 ‘한화오션’을 검토하고 있다. 업계는 그룹 내 조선·해양 사업 시너지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강조한 ‘글로벌 메이저 사업’에 대한 의미가 담긴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HD현대그룹이 인수한 현대두산인프라코어는 계열사 간 통일성을 높이기 위해 ‘두산’을 떼고 ‘HD’를 더한 ‘HD현대인프라코어’로 바뀐다. KG그룹에 인수된 쌍용자동차는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 거듭난다는 의지를 담아 3월 정기 주총을 통해 ‘KG모빌리티’로 새출발한다.

[인터뷰] 민은정 인터브랜드 한국법인 최고콘텐츠책임자(CCO·전무)

“기업 존재 이유의 관점에서 업(業)을 재정의하라”
민은정 인터브랜드 한국법인 최고콘텐츠책임자(CCO·전무). 사진=인터브랜드 제공
민은정 인터브랜드 한국법인 최고콘텐츠책임자(CCO·전무). 사진=인터브랜드 제공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서 업종을 구분하는 사명이 무의미하다면 사명을 변경할 때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까. 민은정 인터브랜드 한국법인 CCO는 “사명은 기업의 가장 중요하고 지속 가능한 자산”이라며 “‘무엇을 하는가’가 아닌 ‘우리 기업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의 관점에서 업(業)을 재정의하는 사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 전무는 “먼저 기업의 정체성을 찾고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사명을 개발해야 하고 사명 변경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명 변경 시 고려할 점은 뭔가.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기업의 정체성 찾기다. 오늘의 모습이 아닌 내일의 모습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닌 우리가 일하는 이유에서 존재 이유를 찾는 것이 곧 기업의 정체성이다. 사명은 기업을 대표하는 언어로, 대내외에 그 기업이 지향하는 비전과 가치를 전달해야 한다. 기업이 추구하는 방향성과 정체성을 사람들이 유추할 수 있도록 해 기업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이 돼야 한다. 사명에서 전달하는 기업의 메시지가 모두에게 쉽게 공감될 수 있어야 한다.”


-사명 변경 이후 무엇을 해야 하나.

“사명 변경은 변화되는 비즈니스 맥락과 사회적 소명을 바르게 이해하고 기업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명 변경 이후다. 대내외적 변화 없이 사명을 바꾸는 것은 단지 겉옷을 갈아입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부적으로 사명 변경에 대한 합의를 이루고 사명에 담긴 가치가 비즈니스와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활동에서 진정성 있게 실행돼야 한다.”


-성공 사례가 있나.

“건설 기계 업체 두산인프라코어는 2021년 HD현대그룹에 인수되면서 현대두산인프라코어가 됐고 HD현대인프라코어로 사명이 변경될 예정이다. 기업의 경영권이 바뀌어도 ‘인프라코어’라는 이름은 남게 됐다. 이 기업의 핵심 사업은 건설 기계와 엔진 부문이다. 그래서 ‘건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했고 ‘건설이란 세상의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답을 내렸다. 다음 질문은 ‘세상의 인프라를 만드는 데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였다. 이에 대한 답은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 우리가 있다’였다.

결론적으로 기업의 존재 이유는 ‘세상의 인프라를 만드는 일, 그 중심에 우리가 있다’로 정리됐다. ‘인프라의 핵심(The core of Infrastructure)’, 즉 ‘인프라코어’가 탄생한 배경이다. 인프라코어는 한국의 1위 건설 기계 업체를 넘어 글로벌 톱티어 기업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업종이 아닌 철학을 표현함으로써 그 기업만의 브랜딩을 가능하게 한 사례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