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도 눈에 띄게 성장한 한국 럭셔리카 시장…한국 기업과의 협업도 주목

[비즈니스 포커스]
한국행 비행기 타는 롤스로이스·벤틀리·람보르기니의 CEO들
럭셔리 자동차 연도별 한국 판매량. 자료=한국수입자동차협회, 각 사. 단위 : 대 (그래픽=송영 기자)
럭셔리 자동차 연도별 한국 판매량. 자료=한국수입자동차협회, 각 사. 단위 : 대 (그래픽=송영 기자)
영국 롤스로이스, 이탈리아 람보르기니, 영국 벤틀리 등은 초호화 럭셔리 브랜드로 분류되는 차량이다. 기본 모델이 3억~5억원에서 시작한다. 주문 제작이 많아 옵션만으로 수억원이 더 붙는다. 차가 긁히면 수리비도 최소 수천만원대다.

전 세계 시장이 불황의 늪에 빠졌지만 초호화 럭셔리 자동차는 잘 팔렸다. 최소 가격이 5억원인 롤스로이스는 지난해 전 세계 50개국에서 총 6021대를 판매했다. 1년간 6000대 이상의 차량이 팔린 것은 118년 브랜드 역사상 처음이다.

롤스로이스의 성장률엔 한국 시장도 한몫했다. 최근 2년간 가장 가파른 성장률(36.8%)을 기록했다. 토스텐 뮐러 오트보쉬 롤스로이스 최고경영자는(CEO)는 3월 하순 한국을 방문한다. ‘큰손’으로 떠오른 한국의 럭셔리카 시장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직접 일정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벤틀리의 애드리안 홀마크 벤틀리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이미 3월 초 한국을 찾았다. 에르메스·샤넬 등 주요 명품 브랜드 매장을 방문하며 벤틀리를 살 만한 잠재 소비자를 파악하는 등 직접 움직였다. 벤틀리 회장이 방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홀마크 회장은 “한국은 어떤 국가보다 럭셔리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곳”이라고 평가했다.
◆억소리 럭셔리카 ‘불티’
지난해 고물가에 따른 공급가 인상과 고금리의 영향으로 한국의 완성차 시장은 역성장했지만 수억원을 호가하는 럭셔리 수입차 시장은 예외였다. 롤스로이스·벤틀리·람보르기니·메르세데스-마이바흐 등 럭셔리카 모델들의 한국 판매량은 오히려 늘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1억원이 넘는 고가 수입차는 지난해 7만1899대 팔렸다. 전년(6만5148대)보다 10% 정도 성장했다. 자동차 산업의 변방에 있던 한국이 전 세계 고급 자동차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는 분위기다.

특히 지난해 나란히 사상 최대 실적을 냈던 롤스로이스와 벤틀리의 아시아·태평양 시장에서 한국의 성적표는 좋았다.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시장에서 롤스로이스 판매량이 셋째로 높은 곳으로 알려졌다. 오트보쉬 CEO는 지난해 실적을 발표하면서 “가까운 미래에 한국이 아시아·태평양에서 롤스로이스가 가장 많이 팔리는 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가장 많이 팔린 차량은 ‘컬리넌’이었다.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컬리넌은 전 세계 판매량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다. 둘째로 많이 팔린 차종은 대형 세단인 ‘고스트’로 30%에 달했다. 초대형 세단인 ‘팬텀’이 10% 수준으로 뒤를 이었다.

롤스로이스 한국 판매량은 2017년 86대에서 2022년 234대로 5년간 3배 가까이 뛰었다. 현재 모든 모델은 올해 말까지 주문이 밀려 있다. 오늘 주문해도 올해 안에 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롤스로이스 관계자는 “소비자 맞춤 주문 품목이 많고(비스포크 프로그램) 그에 따라 수제작하는 부분도 많아 주문·생산·인도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벤틀리 역시 3억원대에서 시작하는 가격에도 지난 6년간 한국에서 존재감을 크게 키웠다. 2016년 170대 판매에 그쳤던 벤틀리는 2022년 775대를 판매했다. 일본(644대)을 제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판매량 1위를 차지했다. 벤틀리의 지난해 전 세계 판매량은 1만5174대다.

벤틀리는 지난해 6월 서울 동대문구에 전시·판매·정비 기능을 모은 ‘벤틀리타워’를 개장했다. 올해 3월 서울 강남 전시장에 고객 체험형 공간 ‘벤틀리 큐브’를 열었다. 이곳은 벤틀리 고객들이 음악을 듣거나 음료를 즐기면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본고장인 영국에도 없는 벤틀리타워와 고급 전시관을 열면서까지 한국 시장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18대 한정 생산한 ‘벤틀리 뮬리너 바투르’를 아시아·태평양 지역 중 최초로 한국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바투르는 최근 한국에서 1대가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모델은 25억원부터 시작해 옵션을 포함하면 판매가가 50억원을 넘기도 한다.
메르세데스-마이바흐 연도별 한국 판매량. 자료=한국수입자동차협회. 단위 : 대 (그래픽=송영 기자)
메르세데스-마이바흐 연도별 한국 판매량. 자료=한국수입자동차협회. 단위 : 대 (그래픽=송영 기자)
메르세데스-벤츠의 럭셔리 브랜드 메르세데스-마이바흐의 성장도 가파르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마이바흐가 가장 많이 팔린 국가는 중국이었고 한국은 2위를 기록했다. 마이바흐의 한국 판매량은 총 1961대다. 이는 2020년 412대와 비교해 375.97% 증가한 기록이다.

가장 많이 판매한 모델은 대형 세단 ‘메르세데스-마이바흐 S 580 4MATIC’이다. 한 해 동안 1527대를 팔았다. 이 모델의 판매 가격은 2억9360만원부터다.

람보르기니도 한국 진출 후 처음으로 판매량 400대를 넘어섰다. 2019년 173대에서 2020년 303대, 2021년 353대, 지난해 403대로 늘었다. 가장 많이 판매된 차량은 SUV 우르스다. 이 모델의 가격은 2억9000만원부터 시작한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스테판 윙켈만 오토모빌리 람보르기니 회장은 “한국은 유행을 선도하는 시장이고 아시아의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하며 한국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편에선 전동화 국면에서 꼭 필요한 배터리 수급을 위해 세계 굴지의 자동차 회사 수장들이 한국을 찾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배터리 강국인 한국 기업과 다양한 협력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최근 짐 로완 볼보 글로벌 CEO는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한국을 찾아 한국 시장에서의 전동화 계획을 밝혔다. 그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7년 만이다. 로완 CEO는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를 탑재한 순수 전기 플래그십 SUV EX90를 올해 연말에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로완 CEO가 SK그룹 최고경영진과 서울에서 전격 회동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두 회사 간 ‘전기차 동맹’ 다지기에 힘이 실리고 있다.

지난해는 삼성SDI에서 배터리를 공급받는 BMW의 올리버 칩세 회장이 한국을 방한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만나 전기차 배터리 협력을 공고히 하기로 했다.
람보르기니 연도별 한국 판매량. 자료=한국수입자동차협회. 단위 : 대 (그래픽=송영 기자)
람보르기니 연도별 한국 판매량. 자료=한국수입자동차협회. 단위 : 대 (그래픽=송영 기자)
◆신흥 부자 많아지고 소비 패턴 변하고
럭셔리카 수요가 늘어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먼저 구매 여력이 있는 3040세대 소비자가 늘어났다는 점이 주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KB금융그룹 경영연구소가 발간한 ‘2022년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이제 막 부자 대열에 들어선 3040 신흥 부자의 수는 7만8000명에 달한다. 전체 부자의 18.4%를 차지했다. 재산의 수준은 기존 고연령 부자들과 비교하면 낮지만 그만큼 부자 진영에 새로 진입한 사람이 많아졌다.

럭셔리카 브랜드 관계자는 “스타트업을 창업해 돈을 벌거나 유튜브·코인 등으로 대박을 친 젊은 부자들이 럭셔리카 시장의 새로운 고객으로 유입되고 있다”고 말했다.

유명인을 따라하고 한정된 상품을 구매해 과시하고 싶은 젊은 세대가 늘어났다는 점도 영향을 줬다는 의견이다. 한국 시장에서 럭셔리카는 ‘인기 아이돌 가수의 스포츠카’, ‘인기 여배우의 대형 세단’으로 소비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최철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소비의 목적이 변했다. 필요해 사용하고 편익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과시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소비자가 늘었다”면서 “사치품을 소비하는 모습을 과거처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업계는 럭셔리카의 성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부유층을 타깃으로 하는 ‘상품’인 만큼 경기 침체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각에선 올해 하반기 시행 예정인 ‘법인차 연두색 전용 번호판’ 부착이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이번 조치로 15만 대 정도의 신규 법인 승용차에 전용 번호판이 부착된다. 그동안 수입 고가 차량은 개인보다 법인명으로 구입해 세제 혜택과 연간 운영비 등을 기업에 전가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는 각각 지난해 판매량의 91%, 77%가 법인 명의의 차량이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