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한 SVB 자금비중 미국채 55% '미국채 위기론' 확산…
무디스 “미국 은행 시스템 전망, 안정적에서 부정적” 강등
파산도, 진화도 전광석화다. 최근 금융 위기론을 불붙인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은 파산까지 36시간이 걸렸고 사건 발생 나흘 만에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조기 진화에 나섰다. 미 정부는 일요일 저녁 예금 전액 보장을 약속했다. 전례 없는 조치다. 미국 정부는 왜 재빠른 진화에 나섰을까. 미국발 금융 시스템 리스크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긴축의 청구서 2023년 3월 8일 그렉 베커 SVB 최고경영자(CEO)는 1분기 실적과 관련해 주주 서한을 보냈다. 은행의 재정 상태를 강화하기 위해 전략적인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SVB는 매도 가능 증권(AFS) 계정에서 210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매각했고 이로 인해 18억 달러의 세후 손실이 발생했다는 점, 앞으로 재무 구조를 강화하기 위해 22억5000만 달러 증자를 실시하고 일부 투자 유치 계획이 있다는 점 등이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SVB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은 스타트업이 즐겨 쓰는 사무용 메신저 슬랙을 통해 전역에 퍼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보험 스타트업인 커버리지 캣의 설립자 맥스 조는 3월 9일 몬태나 주에서 열린 창업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공항에서 내려 버스에 올랐을 때 동료 창업자들이 모두 미친 듯이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조는 “뱅크런(은행 예금 대량 인출)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SVB에서 회사 자금을 빼내려는 움직임이었다.
1983년 실리콘밸리 지역 내 혁신 벤처기업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된 SVB는 지난 40년 동안 차별화된 사업 전략으로 글로벌 벤처 대출 시장을 선도해 왔다는 평가를 받은 회사였다. 이 회사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유동성 국면이 본격화되던 2021년 전후로 급격하게 몸집을 키웠다. 현금 유동성이 풍부했던 테크 기업들은 SVB에 잉여 현금을 예치하기 시작했고 2021년에만 예금 규모가 86% 불어났다. 고객 예금을 기반으로 몸집이 커진 SVB는 투자처를 찾기 시작했다.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당시 절대적인 안전 자산으로 인식되던 국채 관련 자산이었다. SVB 경영진 역시 이를 안전성이라고 생각해 많은 자금을 투입했다. 무려 55%. 은행 산업 평균 국채 비율이 20.4%에 불과한 것을 생각하면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SVB가 3월 8일 발표한 주주 서한에서 자산 배분이 매우 안전하게(with a high-quality) 구성돼 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2022년 본격화된 Fed의 금리 인상이었다. 빅스텝·자이언트스텝…. 긴축에 가속도가 붙었다. 지난 2년간 미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를 450bp(1bp=0.01%포인트) 올리면서 SVB의 국채 매각 손실은 18억 달러로 불어났다. 장기채 비율만 무려 80%였다.
설상가상으로 벤처캐피털(VC) 시장의 업황 역시 가파르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금리 인상으로 인수·합병(M&A) 건수나 VC 시장 내 자금 동향이 얼어붙었다. 기업들은 은행에 맡긴 자금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 규모와 속도가 문제였다. SVB 탄생 목적에 맞게 예금 고객의 절대 다수는 ‘기업’이었다. 2022년도 매출액 기준으로 상업 금융이 52.4%로 절반 이상의 비율을 차지했고 개인 금융은 전체 매출의 10%도 채 되지 않았다. 고객층이 VC와 스타트업에 쏠려 있어 이들 기업의 업황 부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기업들은 자금을 찾는데 SVB에서 즉각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현금 비율은 총 자산의 7%에 불과했다. 기타 시중 대형 은행들이 최소 10%대 이상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낮은 수준이었다.
시장에서 불안은 공포로 변했다. SVB가 외부 인수 기관을 물색하고 있다는 루머가 번지기 시작했다. 예금주들의 인출 요구는 거세졌다. 주주 서한이 공개된 지 이튿날인 3월 9일 하루 사이 420억 달러를 인출하려고 시도했다. 약 55조6000억원이다. 2022년 말 이 회사의 총 예금 잔액이 1754억 달러란 점에 비춰 보면 4분의 1이 빠져나간 셈이다. 뱅크런의 상황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SVB의 주가는 급락했고 사건은 중소형 은행을 넘어 대형 은행들의 주가 급락으로 옮겨붙었다. 신용 평가사는 잽싸게 등장해 신용 등급을 낮췄고 억만장자의 피터 틸 팔란티어 회장 등은 SVB의 손실이 18억 달러가 아니라 수백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말로 뱅크런을 부추겼다. 이례적 결단 3월 12일 SVB의 증자 계획 무산과 함께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정부도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곧바로 미 정부의 실행안이 발표됐다. ‘파산’ 카드였다. 미 캘리포니아 주 금융보호혁신국은 불충분한 유동성과 지급 불능을 이유로 SVB를 폐쇄하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 관재인으로 임명한다고 밝혔다. SVB의 기존 예금은 샌타클래라 예금보험국립은행(DINB)이라는 법인을 만들어 이전하고 SVB 보유 자산도 매각한다는 방침이었다.
1년 전만 해도 한국의 한 싱크탱크에서는 “SVB그룹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차별화된 사업 모델과 미국 벤처기업 생태계의 빠른 성장에 힘입어 글로벌 금융사와 견줄 만한 성과를 실현하고 있다”며 SVB 모델을 따와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성공 모델로 불린 회사였다.
하지만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6시간이었다. 총자산 규모는 2022년 말 기준 2090억 달러, 미국 내 은행 자산 규모 기준으로 16위의 회사였다. 미국 금융 시장 역사상 상업은행 기준에서 역대 둘째 규모에 달하는 파산이었다. 이보다 큰 규모의 상업은행 파산은 2008년 9월 말 3070억 달러 규모의 워싱턴 뮤추얼 파산 사례가 유일했다.
억만장자 투자자이자 퍼싱 스퀘어 헤지펀드 설립자인 빌 애크먼은 ‘검은 월요일’을 예고했다. SVB 파산 이후 월요일 아시아 시장이 열리는 3월 13일 더 많은 뱅크런이 발생할 것이란 예측이었다. 애크먼 설립자는 “앞으로 48시간이 중요하다”며 “아시아 시장이 열리기 전 미국 정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고쳐야만 한다”고 일침했다.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서도 파산 소식이 전해졌다. 3월 8일 암호화폐 전문 은행인 실버게이트의 청산에 이어 일요일인 3월 12일 뉴욕 소재의 암호화폐 산업의 주요 은행 중 하나인 시그니처은행이 무너졌다. 총 자산 규모는 1014억 달러, 총예금은 886억 달러다. 뉴욕 은행 규제 당국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법정 관리인으로 지정하고 시그니처은행의 자산을 압류했다.
연쇄 파산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이날 저녁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움직였다. 그는 성명을 통해 “은행권의 회복 탄력성을 어떻게 유지해 우리의 역사적인 경제 회복을 지켜낼지에 대해 내일(13일) 아침 연설하겠다”며 구두 개입에 나섰다. 미국 재무부·Fed·FDIC는 고객들이 예금 전액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하고 위기에 처한 다른 은행들에도 대출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예금자 보호를 받지 못하는 25만 달러 이상 예금에 대해서도 전액 보장을 약속했다. 또한 SVB의 손실과 관련해 납세자가 부담하는 비용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내 지시에 따라 이 같은 금융 당국의 발표가 나왔다”고 말했다.
SVB 파산 이틀만에 나온 조치이자 현지 시간 일요일 저녁의 발표였다. 발표 일정도, 내용도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반드시 막아야 할 저지선배경에는 이번 위기의 도화선이 된 미국 국채가 있었다. SVB의 파산은 결국 가장 안전하다는 미국 국채 시장에서 일어난 일대 사건이었다.
그간 제로 금리 체제에서 여러 자산이 늘었지만 가장 과도하게 평가된 것은 미국채라는 지적이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 SVB가 투자를 결심한 2021년에도 이 같은 지적이 잇따를 때였다. 당시 미국 투자회사 싯인베스트먼트어소시에이츠의 브라이스 도티 선임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CNBC와의 인터뷰에서 “채권 투자자 관점에서 보면 미국 국채가 최대 거품”이라며 “국채 가격에 거품이 끼었다,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너무 낮다(가격이 너무 높다)”고 말했다. 그는 Fed와 미 의회가 대규모 유동성을 공급하지 않았다면 국채 수익률이 이처럼 낮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채 위기론은 Fed의 금리 인상과 함께 시작됐다. 미국채의 초대형 매수 세력인 Fed가 금리 인상 정책으로 국채 보유 규모를 줄였고 일본과 중국 등 미국채를 많이 들고 있던 아시아 국가 중앙은행들도 매수는커녕 갖고 있던 미국채도 내다 팔았다. 강달러가 지속되면서 외국인 개인 투자자들도 미국채 매입에 부담을 느꼈다. 실상 긴축 국면에서 미 달러를 매입할 ‘큰손’이 자취를 감추면서 유동성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이다(큰손들은 미국채 대신 ‘금 시장’으로 이동했다). 미 재무부도 일찌감치 상황의 심각성을 알았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지난해 10월 12일 “(미 국채 시장에서) 충분한 유동성이 없어지는 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회사의 경고는 계속됐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지난해 10월 20일 보고서를 내고 “미 국채 시장은 취약한 상태이고 충격이 하나만 더 발생하면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BoA의 랠프 악셀은 “국채 시장의 유동성과 회복력의 감소는 오늘날 글로벌 금융 안정에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고 2004~2007년 사이의 주택 거품보다 더 나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채의 위기는 세계 기축 통화로 군림해 온 달러 패권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강력한 위협이다. 이미 시장에서는 달러 패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시그널이 나오고 있다. 전 세계 중앙은행 외환 보유액 통화별 비율을 보면 20년 전인 2000년대 초반에는 달러의 비율이 71%에 달했지만 현재는 59%로 줄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달러 비율 감소가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미국이 달러 패권을 통해 전 세계에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반미 국가들의 탈달러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고 최근에는 미국이 자국 중심 정책과 국가 안보 전략을 펴면서 우방국에게도 미 달러 의존도를 탈피할 유인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 국가들은 달러 중심의 외환 보유액을 다각화하고 양자 간 통화 스와프 또는 공동 화폐 개발 등을 통해 미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금리 인상 후부터는 더 빠른 속도로 줄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전 세계 외환 보유액은 1년 전보다 10.0% 줄어든 1경773조708억 달러로 조사됐다. IMF가 통계를 내고 있는 1999년 이후 가장 큰 폭의 감소치다.
이미 세계 무역 시장에서는 달러 패권이 위협 받은 지 오래다. 중국과 러시아 등 주요 국가들은 상거래에서 비달러 사용 계획을 밝혔다. 러시아는 이미 러시아산 석유 또는 천연가스를 사려면 루블화를 내야 한다고 선언했다. 중국·인도를 비롯한 일부 국가들은 러시아 에너지를 루블화로 구매하고 있다.
또 다른 국가는 미국과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는 중국이다. 특히 달러의 힘을 지탱한 ‘페트로 달러(오일 머니)’ 시스템이 최근 중국에 의해 흔들린 것은 달러의 지위에 충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1974년 석유 파동이 터지자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은 ‘원유 결제는 오직 달러로만 한다’는 ‘페트로 달러 시스템’을 비밀리에 체결했다. 이 계약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 안보를 보장받았고 미국은 전 세계에서 달러 지위를 높이며 기축 통화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
그런데 페트로 달러의 지위를 노리는 화폐가 생겼다. ‘위안화’다. 2022년 12월 7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와 회담하면서 원유를 위안화로 구매할 수 있게 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또 사우디아라비아뿐만 아니라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에도 원유의 위안화 결제 허용을 요구했다.
40년 이상 원유 시장을 지배해 온 페트로 달러 체제를 깨고 위안화로 석유 결제를 가능하게 하려는 야심이자 기축 통화에 대한 도전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16년부터 위안화로 원유를 거래하는 방안을 추진해 온 중국이 결실을 눈앞에 뒀다”며 “페트로 달러 체제가 중대한 기로에 놓였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그간 달러에 대한 도전을 좌시하지 않았다. 이란·이라크·리비아 등 한때 ‘악의 축’으로 지목됐던 나라들도 페트로 달러에 도전했다가 미국의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 베네수엘라도 달러 이외 통화로 원유를 판매하려고 했다가 미국의 무차별 경제 제재를 받았다. 달러의 기축 통화 지위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SVB 사태는 이러한 세계적 정세가 치닫는 와중에 터진 골칫거리였다. 페트로 달러 체제마저 중대한 기로에 놓이면서 미국 정부는 국채로 불거진 이번 SVB의 위기를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일종의 저지선인 셈이다. 최악의 시나리오의도야 어찌됐든 이례적인 미 정부의 빠른 결단과 적극적인 리스크 관리는 시장의 불안 심리 확산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예금주는 물론 증시 불안도 잠재웠다. 시장이 우려했던 ‘검은 월요일’은 없었다. 다음 날에는 ‘안도 랠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모든 하방 압력이 제거된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단기 상승’일 뿐 Fed의 행보에 따라 시장이 언제든지 급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SVB 파산 이후 금융가에는 다시금 금리 인상 조기 종료론이 불붙었다. SVB와 시그니처은행의 연이은 파산 등이 ‘긴축의 청구서’란 의견에 무게가 실린 때문이다.
월가에서는 이번 SVB 파산의 원인으로 ‘금리 인상 가속화’를 지목했다. 금리 인상에 취약한 업종에 집중된 예금과 투자 자산의 만기 미스 매치가 문제의 원인이란 지적이었다. Fed가 금리를 더 인상하면 크레딧 리스크가 터지므로 인상을 더 할 수 없을 것이란 분석이 쏟아져 나왔다. 3월 12일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3월 21일부터 22일까지 예정된 3월 미국 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금리를 인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이 추가 긴축을 암시하는 발언을 쏟아낸 지 불과 5일 만의 일이다.
물론 Fed 정책 목표의 우선순위가 물가 안정인 만큼 금리 인상을 멈추지 않을 것이란 시각도 팽배하다. 이미 파월 의장은 물가를 잡는 과정에서 일부 부작용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그는 “Fed는 경제적인 고통 없이 물가를 낮추는 연착륙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물가가 급격하게 상승하는 한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완전한 진화도 아니다. 국제 신용 평가사인 무디스는 3월 14일 미국의 전체 은행 시스템에 대한 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고 밝혔다. SVB 붕괴에 따른 결정이었다. 무디스는 보고서에서 “SVB와 실버게이트·시그니처은행에서 벌어진 예금 인출 사태와 이들 은행의 파산에 따라 (미국 은행들의) 경영 환경이 급속도로 악화하고 있다는 점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미 정부가 안전망 강화 대책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태라는 진단이다. 무디스는 “미실현 손실이 많고 개인 고객이 적고 비보험 예금주가 많은 은행들은 여전히 예금주들의 (인출) 경쟁에 더욱 민감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 경제가 올해 중 경기 침체에 빠지면서 은행업계에 대한 압력이 가중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무디스가 신용 등급 하향을 검토한 곳은 퍼스트리퍼블릭·인트러스터파이낸셜·UMB·자이언즈뱅코프·웨스턴얼라이언스·코메리카 등 6개 지역 은행이다.
실제 17일에는 캘리포니아주 지역은행인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의 주가가 큰 폭으로 폭락했다. 전날 대형은행들이 우리돈으로 39조원대 예금을 맡기는 등 구제금융에 나섰지만, 불안한 투자심리를 막을 순 없었다.
한동안 미국 내 중소규모의 지역은행에 대한 불안심리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SVB처럼 자산 규모 대비 증권 비율이 높고 현금 비율이 낮은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여진이 진행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2008년 금융 위기의 리플레이다. 글로벌 은행과 기업 혹은 다른 산업으로의 유동성 경색이 전이되는 것이다. 그러면 뱅크런이 추가 확대될 것이고 미국 중소 은행은 연쇄 파산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2008년 금융 위기 역시 서브프라임 문제가 일반적인 주택 대출로 점염되면서 은행에서 은행으로, 은행에서 기업으로, 미국에서 세계로 확산 점염됐다.
미국을 넘어 세계로 위기가 전이되면 유럽 중소 은행에서 파산 소식이 하나둘 들릴 수 있다. 스위스의 세계적 투자은행인 크레딧스위스는 글로벌 위기론을 지피는 요소 중 하나다. 크레딧스위스는 3월 15일 발간한 연간 보고서에서 “2021·2022 회계연도 재무 보고서와 내부 통제 과정에서 ‘중대한 결함(material weakness)’을 발견했다”며 “이를 바로잡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회계법인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크레딧스위스의 재무 보고서 내부 통제가 효과적인지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남겼다.
미 스타트업에 대규모 투자한 소프트뱅크도 미 테크 기업과 유니콘 기업들의 디폴트까지도 상상 밖의 일은 아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디폴트가 확산되면 미 상업용 부동산 관련 산업으로 유동성 경색이 재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특히 기업의 자산 실사가 이뤄지면서 의도된 또는 의도하지 않은 추가 부실이나 모럴 해저드가 발견될 경우의 불안 요소도 남아 있다. 어디까지나 최악의 시나리오다. 조병현 다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SVB 파산이 시스템 리스크를 야기할 사안이라고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경기나 산업의 업황 부진과 높아진 자금 조달 비용, 현금 조달 능력 위축 등의 조건이 동시에 갖춰진다면 빠른 속도로 신용 리스크가 확산될 것이라는 경고 정도로는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시스템 리스크는 과도”다수의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는 2008년 금융 위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사고 발생의 원인이 다르고, 금융 위기 이후 각 국가별로 시스템을 정비한 만큼 그때의 위기가 재현되지는 않을 것이란 주장이다. 여기에 긴축에 대한 후유증이 시스템 리스크에 대한 우려를 확산시킨 만큼 Fed의 긴축적 스탠스에 변화가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선제적 예측도 깔려 있다.
먼저 사고의 원인이다. 2008년 금융 위기는 부실 대출 자산의 파생 상품 확산과 모럴 해저드가 원인이라면 SVB 사태는 가파른 금리 인상에 따른 일부 은행의 자산 부채 관리(ALM) 전략의 실패로 보는 이들이 많다. 이종빈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VC·스타트업의 업황 부진이 트리거인 것은 맞지만 본질적인 원인은 SVB의 채권 투자 쏠림”이라며 “저금리 채권에 헤지 없이 매수를 진행함으로써 금리 상승에 따른 손실이 커진 게 예금 인출에 대응하지 못한 이유”라고 꼬집었다. 이웅찬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 역시 “리먼 사태의 본질은 부동산에 대한 과도한 대출과 부동산 버블 붕괴 때문이었던 반면 이번 SVB 사태는 미 국채가 문제”라며 “버블 후 폭락해 버린 부동산, 부실화된 모기지 채권과 미 국채는 다르다”고 말했다.
둘째는 2008년의 교훈이다. 이번 미 정책 당국의 대응은 이례적일 정도로 빨랐다. 특히 Fed가 은행에 유동성을 지원하기 위해 조성하는 새로운 기금(BTFP : Bank Term Funding Program)은 강력한 유동성 지원책으로 판단된다. BTFP는 국채·주택저당증권(MBS) 등 적격 자산을 담보로 1년간 액면가로 빌려 주는 대출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하면 평가 손실 중인 국채나 MBS를 팔지 않고도 예금 반환이 가능해진다.
금융 건전성 측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2008년 금융 위기를 겪고 나서 정책 당국의 규제 강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건형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대형 금융회사뿐만 아니라 기타 은행 지주사 등 대형 은행의 티어(Tier) 1 자본 비율은 2008년 한 자릿수대에 불과했다”며 “규제 강화 속에 지금은 해당 비율이 2022년 2분기 기준으로 11%대로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단, 미국은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의 금융 규제 완화였다.
앞서 미국은 글로벌 금융 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해 2010년 ‘도드-프랭크법’을 제정해 금융 규제를 강화했다. 하지만 2018년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글로벌 시스템 중요은행(G-SIB)’으로 분류되는 대형 은행을 제외한 나머지 중소·지방은행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규제가 과하다”는 중소기업들의 지적에 금융 규제 완화법에 서명한 것이다. 특히 베커 SVB 최고경영자(CEO)가 선두에서 이를 강력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그는 “G-SIB들을 위한 도드-프랭크법의 틀은 SVB나 우리와 규모가 비슷한 은행들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미 정치권에서는 다시금 고삐를 조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실리콘밸리 일부를 지역구로 둔 로 칸나 연방하원의원은 “2008년 이후 우리는 바로 이런 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규제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미래의 불안정성을 막기 위해서는 의회가 합심해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에 시행된 규제 완화 정책을 뒤집어야 한다”고 말했다.마지막 숙제, 심리와 국채이제 마지막 남은 문제는 심리다.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확산되면 뱅크런을 막을 도리가 없다. SVB 예금주들 역시 당국의 보증을 받으면서 예금을 찾을 필요가 없었지만, 3월 13일 은행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은 앞다퉈 돈을 찾았다. 이화진 현대차증권 애널리스트는 “정부의 신속한 대응과 매각 추진으로 시스템 리스크 확산 가능성은 낮다”면서도 “이제는 스마트폰 버튼 하나로 뱅크런이 가능한 시대에 오면서 자금 이탈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가장 큰 위험 요소”라고 말했다.
이번 위기의 도화선이 된 미국 국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남는다. 이웅찬 애널리스트는 “지방 은행의 듀레이션 미스 매칭 사건에 미국 금융 시스템에 대한 잘못을 묻는 것은 과도하다”면서도 “그 언젠가 우리가 제로 금리에 대한 청구서를 받아야 하고 재정 지출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미국 국채의 가치와 위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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