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대통령, 소통 나서고 野 ‘닥치고 반일’ 안돼 … 기시다 총리 “하나씩 실천” 약속 지켜야
[홍영식의 정치판] 김대중 정부 외교부와 통일부를 취재하던 시절 일본 외교관 및 주한 일본 특파원들과 사적으로 여러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과거사 논란과 관련해 “피해를 당한 쪽에선 과거를 잊기 어렵다. 사죄 한 번 더 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라는 질문에 일본 측은 “사죄 요구가 끝이 없다. 해도 해도 ‘진정성이 없다’고 하는데 얼마나 더 해야 하나”라고 항변하곤 했다. 실제 1965년 청구권 협정 등 내용을 담은 한·일 기본조약 조인 때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무상이 “우리의 두 나라 그곳의 긴 역사는 불행한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유감이며 우리는 깊게 후회를 느낍니다”라는 것을 시작으로 일본이 사과 또는 유감 표명을 한 게 50여 차례 된다. 그럼에도 일본에 면죄부를 줄 수 없는 것은 툭하면 정치인들의 망언이 터져나오면서 양국 관계를 도돌이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윤석열 대통령이 제3자 변제 징용 배상안을 들고나온 것은 참모들의 신중론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대통령실은 강조한다.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고 시류에 적당히 편승하면 편한 길을 갈 수 있었을 텐데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결단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3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최악의 한·일 관계 방치는 대통령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라며 “양국은 함께 더 많이 얻는 윈-윈 관계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또 안보·경제·글로벌 어젠다에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협력 파트너라고 규정했다. “현재와 과거를 경쟁시킨다면 미래를 놓치게 될 것”이라는 처칠의 말도 인용했다.
윤 대통령의 선(先) 제안은 냉엄한 국제 질서 속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수(手)이기도 하다. 대중 봉쇄를 위해 ‘올코트 프레싱’하고 있는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균열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위해 메워야 하는 틈이다. 한·일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4월 방미를 하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게 대통령실의 판단이다. 대북 억지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미국의 반도체 대중 투자 규제 및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올해 70주년을 맞은 한·미 동맹 업그레이드는 필수고 한·일 개선은 그 전제 조건이라는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잠수함 탐지에 지소미아 필수
일본과의 안보 협력도 다급하다. 정상화 수순을 밟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은 북한 미사일·잠수함 탐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느 모로 보나 일본이 우위에 있다. 군사용 정찰 위성은 한국이 단 한 대도 없는 반면 일본은 9개가 북한 핵실험 장소와 미사일 기지를 샅샅이 감시하고 있다. 한국이 4대밖에 없는 공중 조기 경보기를 일본은 17대나 갖고 있다. 지난해 1월 북한이 극초음속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일본은 발사와 탄착 지점을 한국보다 모두 정확하게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잠수함을 탐지하는 해상 초계기는 한국이 16대 보유하고 있고 일본은 100대가 넘는다. 수심이 깊은 동해 바다 밑 북한 잠수함 탐지 능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이 뛰어나다. 지소미아가 없다면 일본의 대북 탐지 정보를 미국을 통해 받을 수밖에 없고 시차 때문에 다급한 상황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지소미아가 없는 상태에서 정보 교류를 하게 되면 군사기밀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특히 일본은 한국 유사시에 미군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한다. 미군 군수 지원 물품은 대부분 일본에서 조달하는데 지소미아가 없다면 이에 관한 정보도 받을 수 없어 군사 작전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양국 간 경제적 긴밀도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2018년 대법원 배상 판결 이후 이듬해부터 3년 동안 일본 기업의 한국 제조업 투자는 마이너스 57.6%, 한국의 대일 투자도 42.9% 쪼그라 들었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2022년 한국의 일본산 소재·부품·장비 수입 비율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대중 의존도는 더 높아졌다. 이번 윤 대통령 방일을 계기로 경제·안보의 새 틀을 짤 바탕을 마련했다지만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지뢰는 모두 양국 내부 정치에 있다. 정치권에 후폭풍이 거세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실의 부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도 영유권, 위안부 문제가 정상 회담에서 논의됐다는 일부 일본 언론 보도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기정사실화하며 국정 조사 카드를 꺼내고 대통령 탄핵을 거론하며 굴욕 외교 책임까지 묻겠다고 한다. 하지만 독도 문제를 자꾸 거론하는 것은 이 지역을 분쟁화하려는 일본을 도와주는 꼴인데도 민주당이 앞장서 일본 언론 보도 내용을 근거로 논란을 키우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러는 민주당도 한·일 관계 악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때 징용 배상은 어렵다고 판단한 민관공동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집권 때는 징용 시한폭탄이 폭발 일보 직전까지 가도 방기해 버렸고 20조원의 경제 효과를 날려보냈다. 민주당은 ‘계묘늑약’ ‘삼전도 굴욕’ ‘숭일’ ‘일본 하수인’ 등 신조어를 만들어 감성을 부추기며 정부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외교 51 대 49 게임, 이상 좇되 현실에 발 디뎌야
하지만 외교는 이상을 좇되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한다는 지적이다. 나라 간 협상은 51 대 49 게임이라는 외교 격언이 있다. 다만 양측 모두 51을 얻었다고 믿게 할 뿐이다. 민주당 정권은 이런 현실은 외면한 채 100이란 이상만을 좇다가 한·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았다. 한·일 문제는 욕 한 번 내뱉고 마는 감정 카타르시스 차원이 아니다. 원내 제1당이라면 적어도 대안이라도 내놓고 담론으로 삼아 국민을 설득하는 게 정상이라는 지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하러 일본 갔을 때 일왕이라고 하지 않고 천황이라고 불렀고 과거사 발언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일본 국회 연설에선 “50년도 안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역설했다. 2004년 한·일 셔틀 외교를 성사시킨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같은 당 출신 대통령들의 이런 전례를 보더라도 민주당은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반일 마케팅으로 미래 세대에 짐을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대통령실도 이전과 달라야 한다. 민심과 여론이 받쳐 주지 않으면 한·일 관계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게 현실이다. 그런 만큼 피해자 설득에 적극 나서야 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노력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며 야당과도 전향적 자세로 소통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물론 일본도 변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현찰을 내줬고 일본은 어음으로 답했다. 사죄도 없었고 징용 피고 기업들의 징용 변제를 위한 기금 참여도 불투명하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윤 대통령과 구체적인 결과를 하나씩 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더 이상 어음이 부도 내지 않게 할 책임은 일본에 달렸다. 일본은 수십 번 사과했는데도 그때마다 번번이 진정성을 의심받는지 돌아봐야 한다. 피해국이 요구할 때마다 사죄하는 게 가해국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다. 물컵의 반을 채울 의무는 일본에 있다. 양국 모두 돌탑에 돌을 하나하나 얹는다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해 이번 한·일 정상 회담이 ‘사죄-망언’ 논란으로 점철된 지난 60년의 질곡에서 벗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홍영식 한국경제 논설위원 및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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