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 적합 업종 제도에 시장 진입 막혀
현대차는 사업 개시 3년 이상 지연
소비자 편익 침해 논란 여전
대기업에 생산·고용 위축, 중소엔 ‘피터팬 증후군’ 양산

[비즈니스 포커스]
서울 장안평중고차매매시장에 중고차들이 주차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장안평중고차매매시장에 중고차들이 주차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현대차·기아를 비롯한 완성차업계가 2023년 하반기부터 중고차 사업에 본격 진출한다. 현대차가 2020년 중고차 시장 진출을 선언한 지 3년 만이다.

현대차·기아는 최근 정기 주주 총회에서 인증 중고차 사업 진출을 위한 정관 변경을 가결했다. 업계에선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정보 비대칭성으로 인해 투명하지 않았던 중고차 시장에 대기업들이 뛰어들면서 유통 구조 투명화, 소비자 선택권 확대 등 ‘메기 효과’를 낼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중고차업계 “현대차, 골목상권 침해” 반발

현대차·기아의 중고차 시장 진출이 3년이나 걸린 이유는 중고차 판매업이 2013년 2월부터 대기업 진출을 제한하는 중소기업 적합 업종으로 지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적합 업종에 지정되면 3년간 관련 업종과 품목에 대해 최대 6년 동안 대기업의 사업 확장과 진입 자제가 권고된다. 이 때문에 SK그룹은 중고차 판매업이 중소기업 적합 업종에 지정되면서 사업 확대에 제약이 커지자 중고차 거래 플랫폼 SK엔카를 사모펀드인 한앤컴퍼니에 매각했다.

중고차 판매업은 2016년 적합 업종 지정이 연장됐고 2019년 2월 중소기업 적합 업종에서 해제됐지만 그간 소비자가 당장 현대차·기아 등 대기업의 중고차를 시장에서 만날 수 없었다. 중고차 매매업계가 대기업의 진출을 막아 달라며 정부에 생계형 적합 업종 지정을 요청했고 정부가 결정을 미루면서 완성차와 중고차 매매업계의 갈등이 3년 넘게 지속돼 왔다.

2022년 3월 중소벤처기업부 내 생계형 적합 업종 심의위원회가 중고차 판매업을 생계형 적합 업종으로 지정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현대차·기아 등 완성차 기업을 비롯한 대기업들도 중고차 시장에 진출할 길이 열렸다.
그래픽=송영 기자
그래픽=송영 기자
하지만 기존 중고차 업계는 대기업들의 중고차 시장 진입에 대해 “골목상권 침해”라면서 여전히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는 현대차가 최근 경기 용인시 오토허브 중고차 매매단지에 입주 계약을 맺은 것과 관련해 “‘골목상권’에 진입해 자동차매매업에 종사하는 30만 영세 소상공인 가족의 생존권을 빼앗는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중고차업계를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진입 규제가 결국 소비자 권익 침해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설문에 따르면 소비자들의 80.5%는 중고차 매매 시장이 불투명하면서 혼탁하고 낙후돼 있다고 인식하고 있고 63.4%는 국내 완성차 제조 대기업의 중고차 매매 시장 진입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5년 동안 ‘1372 소비자상담센터’에 등록된 중고차 상담 건수는 4만3903건이지만 이 가운데 단 2.2%인 947건만 피해 구제가 된 것으로 집계됐다.

동국제강, 방화문 사업 확대 제동

화재 발생 시 불길의 확산과 연기 유입을 차단해 인명 구조 시간을 확보해 주는 방화문 시장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 적합 업종 규제로 인해 일부 대기업들의 신사업 확장에 제동이 걸렸다.

방화문 품질 인정제 시행에 따라 주요 철강사들이 신사업으로 방화문 시장에 뛰어들었는데 기존 방화문업계가 중소기업 적합 업종 지정을 요구했고 최근 동반성장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대기업들의 신규 진입 및 생산 시설 확장이 3년간 제한됐다. 신사업으로 이 시장에 진출했던 동국제강·경동원·아주엠씨엠 등 대기업들은 생산 시설 확장을 자제해야 한다.

한국의 방화문 시장은 2019년 기준 1조100억원 규모로, 240개 업체 중 연간 매출 300억원대인 10여 개 중소 업체가 시장 전체 매출의 30∼40%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230개의 업체는 대부분 연매출 20억원 미만의 영세 기업이다.

품질 인정제에 부합하는 방화문을 생산하기 위해선 최소 100억원의 설비 투자가 필요한데 막대한 투자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업체가 없어 향후 수급 대란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기존 240개 업체 중 인증 획득 업체도 24개에 그치며 핵심 기능인 ‘차열’ 인증 업체는 7개에 불과하다. 대기업들의 시장 진입이 막히면서 필수 건설 자재인 방화문 수급 불안과 국민 안전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현대차·기아의 중고차 시장 본격 진입을 앞두고 중소기업 적합 업종 제도의 존폐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붙고 있다. 중소기업 적합 업종은 대표적인 갈라파고스 규제 중 하나다. 세상과 격리된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처럼 국제적 흐름이나 변화된 현실과 거리가 있는 불합리하거나 불편한 ‘나 홀로 규제’를 뜻한다.

도입 10년이 넘었지만 실효성 논란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 제도가 대기업의 생산성과 고용 활동을 위축시키고 오히려 중소기업 경쟁력의 한계를 불러와 점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는 국책 연구 기관의 제언도 나왔다.

김민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중소기업 적합 업종 제도의 경제적 효과와 정책 방향’ 보고서에서 “적합 업종 제도가 보호 기간에 중소기업의 생산 활동에 일부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대기업의 생산 활동을 위축시켜 산업 전반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 연구위원은 “대기업의 확장 혹은 진입을 제한하는 강력한 수단을 통해서도 중소기업의 성과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못해 제도 운영의 실효성이 낮다고 진단할 수 있다”면서 “중소기업 적합 업종 합의의 신규 신청을 중지하고 현 지정 업종에 대한 해제 시기를 예시해 점진적 폐지를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픽=송영 기자
그래픽=송영 기자
공공 SW 시장, 대기업 제한해 품질 저하

업계에선 중소기업 적합 업종 제도와 함께 공공 소프트웨어(SW) 대기업 참여 제한 제도도 수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제도는 2013년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 개정에 따라 삼성SDS·LG CNS·SK C&C 등 대기업 정보기술(IT) 서비스 계열사의 공공 SW 시장 독과점을 제한하고 역량 있는 중견·중소기업을 육성하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당초 자산 10조원 이상 대기업 집단은 국가 안보 관련 분야 외에는 공공 SW 사업에 참여가 제한됐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됐던 2021년 백신 예약 시스템 장애를 계기로 국가적으로 긴급한 SW 사업은 대기업 참여 제한 예외 심의를 신속하게 처리하는 패스트 트랙까지 생겼다.

당시 백신 접종 사전 예약 시스템에 수백만 명이 몰리며 먹통이 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자 정부는 LG CNS·네이버·카카오 등과 긴급 회의를 열고 LG CNS와 네이버를 긴급 투입해 시스템 개선에 나섰다.

코로나19 사태의 유행으로 초·중·고 수업이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된 2020년에는 EBS의 온라인 수업 사이트에 수십만 명의 학생이 몰려 서비스 접속 오류가 발생해 LG CNS가 해결사로 나서기도 했다.

당시 교육부와 EBS는 대기업의 공공 SW 서비스 참여 제한 규정에 따라 연매출 100억원 안팎의 중소기업 두 곳에 온라인 수업 시스템 개발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조정실 산하 규제혁신추진단이 이 제도를 2023년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규제 혁신 과제로 확정하면서 제도의 전면 폐지나 완화를 우려하는 중견·중소기업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대기업 참여 제한으로 중소기업들이 더 이상 회사 규모를 키우지 않고 중소기업에 만족하는 ‘피터팬 증후군’이 확산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 지 오래다.

피터팬 증후군은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꺼리는 현상을 일컫는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에 편입되는 것을 피하는 이유는 성장으로 얻는 이익보다 중소기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이익이 더 크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10년 내 중소기업을 졸업한 한국의 중견기업 300개를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 기업의 77%는 중소기업 졸업 후 지원 축소 등 새롭게 적용받는 정책 변화에 대해 체감하고 있거나 체감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들에게 ‘중소기업으로서 누릴 수 있는 정책 수혜를 위해 중소기업으로의 회귀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물은 결과 30.7%가 ‘그렇다’고 답했다.

중소기업 졸업 후 체감하는 정책 변화 중 가장 아쉽고 부담스러운 변화는 ‘조세 부담 증가(51.5%)’였다. 이어 ‘중소기업 정책 금융 축소(25.5%)’, ‘수·위탁 거래 규제 등 각종 규제 부담 증가(16%)’ 등이 꼽혔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