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경영권 방어 과정에서 거액 손실 끼쳐”
한상호 전 대표도 190억원 공동 배상
대법원이 다국적 승강기 업체이자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 주주인 쉰들러그룹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한상호 전 현대엘리베이터 대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쉰들러그룹의 손을 들어주면서다.
이 판결로 현 회장은 계열사인 현대엘리베이터에 2000억원 이상(이자 포함)의 배상금을 물게 됐다. “경영권 방어에 몰두하는 대기업 경영진이 반면교사 삼아야 하는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7000억원대 손해 끼쳤다” 주장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2023년 3월 30일 쉰들러가 현 회장과 한 전 대표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소송에서 “현 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에 170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한 전 대표는 190억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소송이 2014년 제기된 점을 감안하면 현 회장의 총배상액은 이자를 합해 2000억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 회장(7.8%) 등 최대 주주 및 특수 관계인이 지분 26.5%를 갖고 있고 쉰들러는 15.5%로 2대 주주다. 쉰들러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현대그룹의 ‘백기사’ 역할을 했다. 하지만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 등을 거치며 사이가 틀어졌다.
쉰들러는 현 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에 7000억원에 달하는 손해를 입혔다고 주장하면서 2014년 주주 대표 소송을 걸었다. 주주 대표 소송은 경영진의 결정이 주주 이익과 다를 경우 주주가 회사를 대표해 회사에 손실을 입힌 경영진을 상대로 제기하는 소송이다.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가 2006~2013년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수의 파생 금융 상품에 가입한 것을 문제 삼았다.
이 계약에는 △계약 상대방은 계약 기간 동안 적대적 인수·합병(M&A) 가능성이 있던 현대상선의 주식을 보유하면서 현대엘리베이터에 우호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현대엘리베이터가 계약 상대방에게 수수료를 지급하며 △만기 시와 계약 체결 시의 현대상선 주가를 비교해 차액을 정산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자본금 확충을 위해 유상 증자에 나선 현대증권 주식 관련 파생 상품 계약도 체결했다.
계약 만기에 현대상선과 현대증권의 주가는 계약 체결 시보다 하락했다. 결국 현대엘리베이터는 막대한 금액의 정산 차손금을 계약 상대방에 지급했다.
쉰들러 측은 현 회장이 불리한 것을 알면서도 경영권을 위해 무리한 계약을 했다고 주장했다. “현 회장 등이 해운 업황이 좋지 않았고 현대상선의 부실을 알면서도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2심에서 판결 뒤집혀
이번 소송은 ‘경영상의 판단’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느냐가 핵심 이슈였다. 1심은 “현대엘리베이터 경영진의 파생 금융 상품 계약 체결 행위는 허용되는 경영 판단의 재량 범위 내에 있는 것”이라며 쉰들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판결은 2심에서 뒤집혔다. 2심은 “현 회장은 계약 체결 여부를 결의하는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현대엘리베이터 이사들이 현대엘리베이터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수 있는 파생 상품 계약 체결을 의결하는 것을 막지 않는 등 감시 의무를 게을리했다”고 판단했다.
다만 배상 책임은 1700억원으로 제한했다. 해운업 불황이 길어지면서 주가가 계속 내려 갈 것이라고 예측하기 어려웠던 점, 의무 위반 정도에 비해 손해 규모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커진 점, 현 회장이 그동안 현대엘리베이터에 기여한 부분이 있는 점 등을 고려했다.
대법원도 2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대법원은 우선 “이사의 경영 판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익은 원칙적으로 회사가 실제로 얻을 가능성이 있는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소속 회사가 동일한 기업집단에 속한 계열 회사의 주식을 취득하거나 제삼자가 계열회사 주식을 취득하게 하는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이사가 따져야 할 사항을 상세히 짚었다.
대법원은 계열사의 유상 증자에 참여해 발행 신주를 인수하면 이사는 계열 회사의 소속 회사 영업에 대한 기여도, 재정적 부담, 계열 회사의 재무 상태 및 경영 상황, 예상되는 이익과 불이익의 정도 등을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경영권 방어 등을 목적으로 제삼자와 계열 회사 주식을 기초 자산으로 하는 파생 상품 계약을 체결할 때는 이사가 주가 변동에 따른 손실 가능성 및 규모, 소속 회사의 부담 능력 등을 객관적·합리적으로 검토하고 그에 따라 파생 상품 계약의 규모나 내용을 적절하게 조정해 소속 회사가 부담하는 비용이나 위험을 최소화하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했다.
이 같은 기준을 토대로 판단할 때 대법원은 현 회장 등에게 손해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계약 체결의 필요성이나 손실 위험성 등에 관해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았거나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사의 경영 판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익의 내용이 무엇인지, 파생 상품 계약을 이용해 제삼자가 계열 회사 주식을 보유하게 하는 경우 이사가 검토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지에 관해 이번 판결에서 처음으로 판시했다”고 설명했다.
[돋보기]
“韓 정부, 2억 달러 배상하라” ISDS 소송에 영향 미치나
이번 대법원 판결은 경영진뿐만 아니라 국가의 손해 배상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는 시각이 있다. “이번 판결이 쉰들러그룹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ISDS)’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쉰들러는 2018년 한국 정부에 1억9960만 달러(약 2600억원) 규모의 ISDS를 제기했다. 2013~2015년 경영권 방어를 위한 현대엘리베이터의 유상 증자와 전환사채 발행으로 3억 달러 이상의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쉰들러는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등이 현대엘리베이터의 유상 증자 등을 묵인해 손해를 봤다고 주장한다.
반면 정부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유상 증자에 대해 금융 당국은 법령에서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다”며 “금융 당국의 행위와 쉰들러의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쉰들러는 김앤장법률사무소와 미국 로펌을, 정부는 법무법인 태평양과 또 다른 미국 로펌을 선임했다.
다만 ISDS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금융 당국의 허가와 이사의 감시 의무 미이행은 별개 문제”라는 것이다. 쉰들러 사건은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상설중재재판소(PCA)가 심리하고 있다. 조만간 첫 심리 기일을 여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한종 한국경제 기자 onebe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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