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간 워싱턴 합의, 동맹국 경제 관계는 ‘무역 자유화’보다 ‘관리 무역’
트럼프 이어 바이든 행정부도 중국 견제
미국과 이해 관계가 다른 유럽
1989년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은 경제 개발의 시장 주도적 정책 제언을 지칭하는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라는 용어를 처음 주장했다. ‘워싱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미국 연방정부 등이 모두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관들이 명시적으로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신흥 경제 국가가 중·장기적으로 경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정책 제언 10가지를 윌리엄슨이 모아 이를 ‘워싱턴 합의’라고 지칭한 것이다. 이러한 정책 제언에는 재정 준칙, 공공 지출의 재조정, 세금 개혁, 금융 자유화, 단일 경쟁 환율 정책, 무역 자유화, 외국인 직접 투자(FDI) 개방, 민영화, 규제 완화, 재산권 보호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 제언에 대해 학계는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부의장을 역임한 스탠리 피셔, 앨런 멜저 카네기멜론대 교수 등은 이러한 아이디어에 대체로 찬성했지만 루디 돈부시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는 격렬히 반대했다. 윌리엄슨은 안정적인 제도와 협력을 바탕으로 경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이러한 정책이 권고된다며 경제 발전을 위한 전제 조건은 아니라고 한 발 물러서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세계 경제의 기조가 ‘워싱턴 합의’와 유사한 궤도로 운용된 신자유주의적 정책에서 벗어나 지정학적 고려와 국가 안보의 중요성이 두드러지면서 미국 경제 시스템조차 ‘워싱턴 합의’에 부합되지 않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중국 경제의 부상에 따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트럼프 행정부에 이어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중국을 제외한 동맹국과의 경제 관계 강화는 ‘무역 자유화’라기보다는 ‘관리 무역(managed trade)’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미국 정부가 미국 기업의 해외 투자와 중국 기업의 미국 현지 투자를 심사해 승인 여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 역시 FDI의 개방 정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결국 미국은 세계 경제 질서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변화의 끝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형태가 될지는 미국 역시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과거와 같은 자유로운 경제 질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의 변화에는 다양한 장애 요인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유럽의 선택이다. 중국에 대한 유럽 국가의 인식은 조금씩 다르다. 미국과 유사한 선상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영국, 중국과의 관계를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는 프랑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고민하는 독일 등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유럽은 미국과 이해관계가 다르다. 중국을 제외하더라도 미국은 에너지·농업·기술 분야에서 자급자족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유럽은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나타났듯이 자급자족할 수 없다. 중국 방문 이후 ‘유럽만의 독특한 접근 방법’을 강조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의 발언이 이를 대변한다.
과연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의 변화에 유럽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이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 위에서 미국과 유럽이 어느 정도 협력할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향방을 주목해야 한다.
강문성 고려대 국제대학 학장 겸 국제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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