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사고나 의료 과실처럼 환자와 피해 당사자에게 불리한 편파적 용어들의 교체 시급
다만 약에서 구하옵소서 시리즈 6전편에 세계적으로 매년 적어도 260만 명의 환자가 의료 오류(medical error)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한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공식 보고서를 살펴봤다. 보고서는 또 전 세계 환자 10명당 1명이 의료 오류 피해자가 된다는 믿기 힘든 사실도 적시했다.
그런데 이런 가공할 생명과 안전 위협을 두고 ‘의료 오류’라는 경량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다. 이 정도 규모라면 의료 재앙 또는 의료 재해라는 육중한 단어가 적절하지 않을까.
의료 오류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의료 과오(medical malpractice), 의료 과실(medical negligence), 의료 위해 작용(adverse events) 등의 하위 개념들을 포함한다. 이 개념들이 지닌 편파성에 대한 학자와 전문가들의 비판은 날카로웠다.
루시안 리프 하버드 공중보건대 박사는 의료 오류라는 용어 사용이 “시스템 결점이 아닌 개인 부주의로 인한 실수라는 관념을 지속시킨다”고 지적했고 외과의사 아툴 가완데 씨는 그 개념은 “의학이 일반적으로 정확성의 과학인 것 같은 착각을 유도하는 문제가 심각하다(뉴요커, 2002년)”고 지적했다.
또 마셸 멜로 스탠퍼드 법대 박사는 ‘의료 과오(medical malpractice)’와 ‘의료 과실(medical negligence)’이란 용어들이 “근본적·제도적 문제를 회피하고 개별 의료 서비스 제공자에게 책임을 전가(2006년)”하는데 이용된다고 주장했고 외과의사 마틴 마카리 박사는 과실이란 법적 개념이 “의료 서비스 제공자가 감당해야 할 입증 책임을 환자에게 전가하는 정의롭지 못한 관행을 정당화해 왔다(뉴욕타임스, 2007년)”고 피력했다. 기울어진 개념의 운동장 : 의료 사고와 의료 과실
의료 오류에 상응하는 한국의 용어는 의료 사고다. 일부 전문가들은 두 가지를 구분하지만 일반적으로 의료 사고라는 모호한 통칭이 사용된다. 또한 의료 과오와 의료 과실 등 두 별개의 개념이 존재하지만 한국에서는 통상 의료 과실이라는 용어로 통합해 부른다.
물론 이 두가지 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무단 복제’한 것이다. 아직도 이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으니 한·일 법률 짝퉁 표절 시비라도 벌어지면 어떻게 감당할지 심히 염려된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의료 사고와 의료 과실 모두 매우 편협한 관점을 전달한다는 점이다.
의료 사고의 법적 정의는 ‘보건 의료인이 환자에 대해 실시하는 진단·검사·치료·의약품 처방 및 조제 등의 의료 행위로 인해 사람의 생명·신체·재산 피해가 발생된 경우’다. 그런데 의료 사고는 진단·검사·치료 등 의료의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신 사고를 지칭하므로 의료인의 의도적 가해 또는 실수나 귀책 사유 없이도 발생할 수 있다.
의료인의 오류, 잘못과 책임성이 확실히 규명되면 의료 과실이라고 부른다. 보건 의료인이 당연히 지켜야 할 절차·의무·주의 등을 위반해 환자의 신체의 완전성에 손상을 초래한 경우에 해당한다. 물론 이 ‘과실’에 해당하는 위반성을 현행 의료 법과 제도 속에서 환자 측이 법적으로 증명하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두 용어 모두 상당한 편견과 부당한 전제들을 탑재하고 있다. 물론 의료업계와 종사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다.
사고와 과실은 의도성을 배제한 개념들이다. 그 대신 우연·우발성만 강조한다. 그래서 의료 행위 중 벌어진 위해 사건들은 의료인과 업체의 책임과 무관한 기술적·절차적 오류 또는 실수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 준다.
비의도성·우연·실수가 강조되다 보니 책임 의료기관·인력에 대해 피해자 측의 관대함이 유도된다. 의료 위해 사건의 비극적 결과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이 운이나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넘어갈 여지가 크다.
사고와 과실이란 개념들은 구조적 문제와의 연결성을 차단한다. 지속·다발·필연을 야기하는 시스템에 대한 의혹 자체를 봉쇄한다. 그 대신 개별 의료인의 미숙과 일시적 불찰로 축소 규정해 버리는 개념적 방역 조치요, 책임 소재의 손절이다.
의료 과실과 의료 사고는 의료인의 행위 중심으로 성립된 개념들이다. 사고와 과실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는 그 결과로 인한 피해이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환자의 손해와 고통이다. 이 용어들에는 환자 주체와 피해자 중심성이 결여돼 있다.환자 중심주의 원칙
한국과 일본에서 통용되는 용어의 다수는 이처럼 권위적이고 의료 업종 편향적 시각을 제시한다. 환자와 피해 당사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이 용어들을 시급히 교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의료 과실 대신 ‘의료 위해’를, 의료 사고 대신 ‘의료 재해’라는 강도 높은 용어를 사용하면 어떨지 생각해 봤다.
사회적 경각심을 높이고 환자는 물론 의료기관·정부·언론·사법부의 관점과 태도에 일말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산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런 용어들은 과도한 의료 공포 조장이나 의료 인력과 기관에 대한 불신만 키울 우려도 있다.
영국·캐나다·호주의 해법에 시선이 간다. 이들 나라는 의료 오류, 위해 사건(adverse events), 의료 과오 등 여러 개념들을 묶어 ‘환자 안전사고’라는 통칭으로 전환했다. 단순 용어 교체가 아니라 관점·우선순위·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다.
이에 호응해 세계보건기구(WHO)도 2002년부터 ‘환자 안전’을 핵심 의제로 설정했다. 그리고 보다 안전한 의료 관행을 장려하기 위해 환자안전세계연대를 출범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예방적 조치와 행동 원칙을 제시했다.
1. 환자 중심주의 : 의사가 아닌 환자를 중심에 세우고 의료적 결정 과정에 환자 참여 폭 확대
2. 시스템 연계성 : 각 의료 부서·인력·장비·기관 간의 상호 연결성 강화를 통한 환자 안전 개선
3. 투명성 제고 : 환자와 이해 당사자에게 환자 안전과 의료 조치에 관한 정보 공유
4. 공정 문화 : 의료 인력과 기관의 책임성을 강화하되 처벌보다 학습과 개선 권장
5. 지속적 개선 : 안전과 의료 질 개선을 위한 지속적 모니터링과 피드백 구조 형성
사실 한국에서도 2016년부터 환자안전법이 시행됐다. 하지만 탈중앙적이고 민주적인 의료 세계관이 뒷받침되지 못한 채 해외 분위기에 휩쓸려 제정된 법령이라 용어상 차별성과 개념적 특정성이 모두 미흡했다.
의사법·약사법·일반 형법 등으로 산만하게 분산돼 있는 관계 법령과 용어들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주변 일반인에게 환자안전법에 대해 물어봐도 모두 금시초문이라고 한다. 그 사이 의료 사고와 의료 과실 같은 낡고 편향된 개념들이 여전히 활보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언어의 한계가 시야와 관점, 이해력과 상상력, 태도와 행동의 한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의료 사고나 의료 부실 같은 면피성 용어들은 의료 사업자들의 ‘안전 퇴로’로 활용될 뿐 환자와 피해자 중심성은 완전히 배제돼 있다. 의료 사업자의 윤리적·법적 책임성을 강화하고 환자의 인권과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개념들에 대한 공적 논의가 시급하다. 사진출처: 더 산디에고 유니온 트리뷴(The San Diego Union Tribune)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영화이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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