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주요 증권사들은 2023년 연간 전망 보고서를 내며 ‘상저하고’를 외쳤다. 2023년 1~2분기에 주가 저점이 형성된 뒤 하반기부터 상승하는 상저하고 형태를 띨 것이란 분석이었다. 전망은 빗나갔다. 다수의 경제 지표들이 ‘상저’를 가리키지만 주식만은 예외다. 무엇이 증시를 띄워 올렸을까.불확실성이 끌어올린 연초 랠리“탐욕을 먹고 자랐죠.”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최근 코스피 랠리에 이같이 말했다.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로 미국 중앙은행(Fed)의 기준금리 인상 여부가 불투명해지면서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증시를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실제 코스피는 상승세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5월 3일 코스피는 2501.40으로 연초(1월 2일) 대비 12.4% 상승했다. 코스닥 역시 843.18을 기록해 연초 대비 25.6% 급등했다. 미국 나스닥지수가 같은 기간 고점 기준으로 0.19%,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가 1.05%, 중국 상하이 종합지수가 2.94%, 홍콩 항셍지수가 1.83% 오르는 등 상대적으로 제자리걸음을 보였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4월 말 특정 종목들의 무더기 하한가 사태가 영향을 미치며 코스피·코스닥의 상승세를 막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4월 27일부터 다시 오름세가 시작되며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올 상반기 코스피 랠리는 주요 증권사들의 전망과도 배치된다. 지난해 말 주요 증권사는 올해 1~2분기 주가 저점이 형성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 현실화, Fed의 통화 정책 방향 전환 가능성 미미, 수출 부진과 기업 실적 불확실성 등으로 2023년 상반기 주식 시장에 경고등이 켜진 상황이었다.
증권가의 ‘상저하고’ 분석에 따라 연말연시 투자자들은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인버스와 곱버스(코스피200 인버스2X) 상장지수펀드(ETF)에 자금을 넣었다. 상반기 증시가 조정 구간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해 지수를 역으로 추종한 상품을 사들인 것이다.
달라진 상황에 증권사도 부랴부랴 코스피 밴드 조정에 나섰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 2월 2023년 코스피 밴드를 기존 2000~2650에서 2200~2800로 상향 조정했다. 대신증권과 신한투자증권도 앞다퉈 코스피 밴드를 올렸다. 지수 궤적은 기존과 다름없이 상저하고를 예상했으나, 저점을 높여 잡았다. 연초에는 외국인이 증시를 끌어올렸다. 2022년 12월 한 달간(12월 2~29일) 약 1조8763억원어치를 순매도했던 외국인은 1월 들어 유가증권시장에서 1월 31일 단 하루를 제외하고 모두 순매수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이 유가증권시장에서 1월 한 달에만 순매수한 금액이 6조4539억원에 달한다. 이는 2002년 이후 월간 기준 2013년 9월(8조4637억원), 2012년 1월(6조9515억원) 다음으로 역대 셋째로 큰 규모다.
투자 배경은 달러 약세와 중국 경기 부양 기대감이었다. 강력한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일관하던 중국이 지난해 12월 ‘위드 코로나’를 선언하면서 중국 경기 부양 기대감이 살아난 영향이다. 여기에 시장에서는 Fed의 가파른 금리 인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을 제기했다. 1400원대까지 올랐던 원·달러 환율은 연초 달러당 1200원대 초반으로 떨어졌다. 한국 증시로 외국인을 끌어당길 수밖에 없는 요인이자 시장이 예상할 수 없었던 ‘변수’였다.
연초 ‘잘나가던’ 코스피의 발목을 잡은 것은 미국 은행의 위기였다. 3월 12일 실리콘밸리 지역 내 혁신 벤처기업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된 SVB가 불충분한 유동성과 지급 불능으로 쓰러졌다. 실리콘밸리를 좌지우지한 미국 지방 중소은행의 붕괴는 바다 건너 코스피를 강타할 것으로 예상됐다. 제2의 글로벌 금융 위기를 예상하는 이도 있었다. 일부에선 SVB 파산이 여타 금융 업종으로 확장되거나 안전 자산 쏠림 현상으로 투자 심리가 위축될 가능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강보합’이었다. 코스피는 오히려 전 거래일 대비 16.01포인트(0.67%) 상승한 2410.6에 마감됐다. 개인은 팔았지만 외국인과 기관은 각각 186억원, 3075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커지는 금리 인하 기대감긴축에 대한 후유증이 시스템 리스크에 대한 우려를 확산시킨 만큼 Fed의 긴축적 스탠스에 변화가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선제적 예측이 증시를 끌어올린 배경이었다. 금융가에는 다시 금리 인상 조기 종료론이 불붙었다. 미국 중소은행의 연이은 파산이 ‘긴축의 청구서’란 의견에 무게가 실린 것이다. 월가에서도, 여의도에서도 Fed가 금리를 더 인상하면 크레딧 리스크가 커지므로 더 인상할 수 없을 것이란 분석이 쏟아져 나왔다. 3월 12일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3월 21일부터 22일까지 예정된 3월 미국 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금리를 인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이 추가 긴축을 암시하는 발언을 쏟아낸 지 불과 5일 만의 일이었다.
시장도 이에 동의하는 듯 보였다. 올해 첫 실적 스타트를 끊은 삼성전자가 전년 대비 이익이 95% 급감한 대규모 어닝 쇼크를 발표하면서 하락 우려가 커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금리 인하 기대감이 더 큰 때문이었다.
한국 투자자 중 대부분은 연내 금리가 인하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삼성증권이 지난 4월 19일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 7717명 중 60%는 연내 Fed의 금리 인하 가능성을 예상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들은 최근 SVB 사태, 경기 침체 우려 등에 따라 연내에 미국의 긴축 정책이 완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반기 중 금리 인하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한다는 답변이 67.1%나 됐다. 금리 완화에 이어 증시가 본격적인 반등을 시작할 시기는 응답자의 62.4%가 올 하반기를 예상한다고 답했다. 하반기 증시 회복에 대한 기대감에 주식을 조기 매집한 것이 코스피를 끌어올린 배경인 셈이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개인 투자자들은 Fed의 긴축 정책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글로벌 매크로 환경에 따라 하반기 투심이 빠르게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입증하듯 개인 투자자들의 ‘사자’세도 분명했다. 5월 3일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에서는 개인 투자자들이 나 홀로 주식을 사들이며 저가 매수에 나섰다. 5월의 미국 FOMC 정례 회의 결과를 하루 앞두고 이번 회의를 끝으로 금리 인상이 마무리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진 것이다. 오건영 신한은행 WM그룹 팀장은 유튜브 '김작가TV' 채널에서 “지난 흐름을 보며 사람들은 불황이 찾아오면 (정부가) 돈을 뿌릴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며 “금리 인하가 대형 호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리 인하 이전에 주식을 매수해야 더 큰 이득을 얻기 때문에 불황을 알리는 경기 지표와 달리 증시에서만 예외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Fed의 방침이다. Fed는 5월 3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하며, 아직 기준금리 동결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분간 금리인하 전환이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시장의 기대와 달리 파월 의장은 물가를 잡는 과정에서 일부 부작용을 감내해야 한다는 의견을 바꾸지 않고 있다. 그는 “Fed는 경제적인 고통 없이 물가를 낮추는 연착륙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물가가 급격하게 상승하는 한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성장과 물가란 두 개의 평행선이 팽팽하게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오 팀장은 “시장이 ‘성장’을 인질로 잡고 Fed에 총을 겨누고 있는 셈”이라면서도 “Fed 역시 물가를 잡지 않으면 더 큰 고통이 따를 것이란 경고를 계속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나친 낙관은 성공할 수 있을까. 이경민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현재 시장은 5월 FOMC 회의에서 25bp 인상, 이후 1~2차례 금리 동결 후 금리 인하를 기대하고 있다”면서도 “파월 의장이 연내 금리 인하 가능성에 거리를 두고 추가 인상 여지를 둘 경우 시장 참여자들의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전환되면서 증시 하방 압력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