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이후 시련 이어진 영국…고립 고집하면 더 큰 문제 생길 수도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책임과 미국 경제의 대공황 시작으로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의 영화를 되찾는 분위기가 성숙되면서 1931년 영연방이 태동했다. 다른 지역 블록과 달리 느슨한 형태의 영연방은 현재 참가국 52개국, 인구 25억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지역 협의체다. 주요 20개국(G20)과 비슷하게 운용된다.
영연방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잠시 전성기를 누리다가 미국 주도의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뒷전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빨리 쇠퇴한 곳은 경제 분야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국제통화기금(IMF)을 양대 축으로 한 세계 경제 질서가 정착되면서 영연방 국가의 탈퇴 조짐까지 일기 시작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영국은 1973년 뒤늦게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 두 차례 대전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던 하나의 유럽 구상은 1957년 로마조약을 기점으로 EU로 재출범한 이후 순조롭게 성장했다. 반면 미국 주도의 브레튼우즈 체제는 1972년 닉슨의 금태환 정지 선언으로 흔들려 영국으로서는 EU가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출범 이후 EU는 두 갈래 길로 추진됐다. 하나는 회원국을 늘리는 ‘확대’ 단계로, 초기 7개국에서 28개국으로 늘어났다가 영국의 탈퇴로 27개국으로 줄어들었다. 다른 하나는 회원국 간 관계를 끌어올리는 ‘심화’ 단계로, 유로화로 상징되는 유럽 경제 통합(EEU)에 이어 유럽 정치 통합(EPU), 유럽 사회 통합(ESU)까지 달성해 간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문제는 영국의 EU 가입 당시 독일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EU의 가입을 ‘굴욕’이라는 자국 국민의 비판과 일부 영연방 국가의 반기로 영국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영국 국민의 자존심인 파운드화 주권을 포기하는 유로화 구상에는 처음부터 참가하지 않은 데 이어 2016년에는 아예 EU를 떠났다.

국제 금융 시장의 중심지였던 런던의 위상은 대륙의 변방 금융지로 추락하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주식 시장은 프랑스 파리와 베네룩스 3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으로, 채권 시장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빠르게 이동되는 추세다. 런던 금융 시장이 위축될수록 뉴욕 금융 시장의 위상은 더 높아지고 있다. 고립된 영국의 결말은브렉시트 이후 국제 금융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는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는 프랑크푸르트가 가장 빨리 부상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가장 중요한 독일 경제가 코로나19 사태 등과 같은 외부 충격을 잘 흡수하면서 유럽 재정 위기에서 입증됐듯이 유럽 통합이 흔들릴 때마다 최후의 보루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가 신인도 면에서 미국보다 월등히 낫다. 미국은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가 위험 수위를 넘어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 국가 신용 등급이 한 단계 떨어진 데 이어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재정 지출 남발로 또다시 강등당할 위기에 놓여 있다. 하지만 독일은 재정 수지뿐만 아니라 경상 수지가 대규모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자체적으로는 증강현실 시대에 국제 금융 중심지로 갖춰야 할 필수 조건인 클라우드와 핀테크, 블록체인 기업이 집중돼 있고 독일 경제의 자랑이기도 한 막강한 제조업과 컨설팅, 미디어 기업이 뒷받침하는 복합 도시다. 세계 최대 규모인 무역 박람회인 메세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 오토쇼, 음악 박람회, 도시 박람회도 매년 열린다.
분데스방크에 따르면 영국에서 활동해 온 비독일계 금융회사가 프랑크푸르트를 비롯한 독일 금융 시장에 이전시킬 자산 규모가 무려 8170억 달러(약 89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유럽중앙은행(ECB)이 브렉시트 이후 영국을 탈출할 것으로 추정한 자산인 1조3000억 유로(약 1718조원)의 절반이 넘는 규모다.

조셉 바이너 등의 연구에 따르면 유럽처럼 경제 발전 단계가 비슷한 국가끼리 결합하면 무역 창출 효과가 무역 전환 효과보다 커 역내국과 역외국 모두에 이득이 된다. 어떤 형태로든 통합을 추진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다. 영국의 고립은 남아 있는 유럽 국가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다른 회원국 탈퇴의 단초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유럽 재정 위기를 겪으면서 유로존 탈퇴 문제로 한 차례 홍역을 치렀던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가 동참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EU 탈퇴 이후 영국 경제가 독자적으로 회생하면 회원국의 탈퇴 움직임은 의외로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같은 회원국 내부에서는 분리 독립 운동이 고개를 들 가능성도 우려된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에 이어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와 근접한 동부 등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회원국 탈퇴가 잇따르고 분리 독립 운동마저 일어난다면 유럽 통합은 붕괴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아 있는 회원국 경제에도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영국의 EU 탈퇴를 계기로 유럽 경제성장률이 1%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보는 예측 기관이 대부분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도 ECB 총재가 금융 완화 정책을 계속 추진할 뜻을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유로화 가치도 유로존 출범 초에 보였던 등가 수준(1유로=1달러)까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탈리아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극한 상황에서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던진 말 한마디가 먼 훗날 높게 평가받으면서 ‘지동설’이 확고해졌다. 영국의 고립으로 유럽 통합 앞날이 당장은 어두워 보이지만 그 속에서 움트고 있는 새로운 통합의 싹이 태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갈라파고스 함정은 또 하나의 고통이다.” 역대 그 어느 국왕보다 도덕적으로 결점이 많은 찰스 3세가 고립을 계속 고집하면 대영 제국의 앞날은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과 영연방 국가의 탈퇴가 가속되면서 더 큰 시련이 닥칠 것으로 예상된다. “통합만이 마지막 남은 대영 제국을 유지하는 길이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