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Study]
‘황금알 낳는’ DB하이텍, 부도 위기에서 세계 10대 파운드리 회사로[Case Study]
‘영업이익률 46%.’

세계 10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회사인 DB하이텍은 지난해 매출의 절반 가까이를 이익으로 남겼다. 46%의 영업이익률은 꿈의 이익률이다. 한국 상장사 중 2위이자 파운드리업계 선두인 대만 TSMC와 거의 대등한 수익률이다.

그런데 이 알짜 기업은 한때 만년 영업 적자를 기록하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DB그룹(구 동부그룹)을 흔들 정도로 위험했던 순간도 있었다. 누적된 영업 적자에 ‘부도 위기’까지 내몰리며 그 누구도 DB하이텍의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다. DB하이텍은 어떻게 만년 영업 적자에서 영업이익률 46%의 세계 10대 파운드리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가지 않은 길에 이정표를 만든 DB하이텍의 스토리를 따라가 봤다.대주주의 결단
‘황금알 낳는’ DB하이텍, 부도 위기에서 세계 10대 파운드리 회사로[Case Study]
2008년 말 DB그룹(구 동부그룹)의 반도체 사업은 난항을 거듭했다. 미국발 금융 위기도 있었지만 내부적 진원지는 반도체였다. 누적 적자와 엄청난 부채로 그룹 내에서도 “반도체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룹이 갖고 있던 부동산 등 자산을 팔아 반도체에 쏟아부었지만 적자만 늘어 갈 뿐이었다.

당시 동부그룹은 금융사와 동부제철·동부건설·동부고속·동부팜한농 등 건실한 회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반도체 없어도 먹고살만 한 것도 현실이었다. 외부에서는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있는데 굳이 동부까지 반도체를 해야 하나”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만큼 존재감이 없었다.

이런 논란이 오가던 2009년 10월 18일 김준기 당시 동부그룹 회장(창업회장, 이하 김 회장)은 경영진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모든 투자 유치 프로젝트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3500억원의 사재를 들여 동부하이텍을 살리겠다”고 밝혔다. 좋게 말하면 집념이고 나쁘게 말하면 경영자들이 갖고 있는 특유의 고집이었다.

채권단에도 이 같은 방안을 통보했다. 채권단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김 회장은 오랜 염원이었던 반도체 사업을 포기할 수 없어 사재를 내놓았다. 3500억원으로 DB하이텍 자회사인 동부메탈 지분 50%를 인수해 반도체 부문에 자금이 흘러들어가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 자금은 DB하이텍의 숨통을 틔워 줬다.

“입사한 이후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회장이 사재를 출연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죠. ‘회사가 망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을 겁니다.” 당시 옆에서 회장을 보좌했던 한 임원의 말이다.

반도체는 김 회장으로서는 버릴 수 없는 카드이기도 했다. DB화이텍 반도체 부문은 이미 설비 투자를 완료해 더 이상의 설비 투자가 필요 없는 정도까지 키워 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룹의 미래가 반도체에 달렸다”고 수차례 말해 왔다. 확신이었다.오래된 꿈DB그룹의 반도체에 대한 꿈은 오래전에 시작됐다. 1970년대 DB그룹은 빠르게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시장에 뛰어들어 큰 성공을 거뒀다. 1980년대 들어 해외 건설이 한풀 꺾이기 시작하자 신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김 회장이 주목한 것은 미래 산업의 쌀로서 전자 산업의 핵심 소재인 반도체 산업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미래 첨단 산업인 정보기술(IT) 산업을 발전시켜 일본·중국과 경쟁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그룹은 1983년 코실(현 SK실트론)을 설립해 한국 최초로 실리콘 웨이퍼를 생산하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반도체 소재 생산을 위해 제휴한 몬산토그룹이 바이오 사업에 집중하겠다며 소재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결국 6년 만인 1989년 지분 51%를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LG에 넘기고 말았다.

다들 DB가 반도체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영진은 반도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호시탐탐 반도체 시장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별도의 조직을 통해 준비도 했다. 코실을 매각하고 10여 년이 흐른 1997년 동부전자(현 DB하이텍)를 설립하면서 반도체 사업에 재도전했다. 그동안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 축적한 기술과 사업 경험이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좌초 위기에 부닥쳤다. 당시 미국 IBM과 제휴하고 256메가 D램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지만 곧장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가 터지며 대형 암초를 만났다. 국가적 위기에 공장 건설은 중단됐고 256메가 D램 사업 진출 역시 공식 발표까지 해놓은 상황에서 중도 포기해야 했다. DB그룹의 반도체 사업은 완전히 엎어진 것처럼 보였다.

김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을 돌기 시작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생산하면 단가를 맞추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2000년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일본 도시바 등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과 기술 이전 및 제품 공급에 대한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동부그룹의 반도체 사업에 불씨가 붙었다. 당시 도시바와 계약하던 날 김 회장은 “해냈어”라며 감격했다는 게 임원들의 전언이다.

이전 반도체 사업과 방향성은 달랐다. 메모리에서 비메모리로 틀었다. 2001년 비메모리 파운드리 양산을 시작하고 1년 뒤에는 아남반도체를 인수하며 ‘규모의 경제’를 확보했다. 업의 특성상 사업 초기 대규모 시설 투자가 필수적이었다. 비슷한 시기 비메모리 파운드리 사업을 시작한 대만·중국·싱가포르·이스라엘 등 경쟁 업체들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경쟁력을 끌어올렸지만 한국의 상황은 달랐다. 외국 경쟁 기업들과 달리 일체의 정부 지원 없이 오직 민간 기업 혼자의 힘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맨땅에 헤딩’이었다.
‘황금알 낳는’ DB하이텍, 부도 위기에서 세계 10대 파운드리 회사로[Case Study]
인재 영입과 적자의 난가장 큰 문제는 기술 격차였다. 사업 초기 비메모리 반도체라는 용어조차 생소했을 정도로 기술적 한계가 극심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당시 한국의 파운드리 기술력은 업체에 제품을 납품하고서도 이게 양품인지, 불량품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낮았다”고 말했다.

그룹 경영진은 결국 사람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인재 유치에 공을 들였다. 비메모리 선진 기업인 미국 텍사스인스투루먼트(TI)의 핵심 기술 인력들을 대거 영입했다.
2005년 TI의 최고기술경영자(CTO) 출신인 오영환 씨와 루 후터 등 다수의 기술진을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거래처 다변화와 핵심 기술 개발 등 사업 역량을 강화하며 동부화이텍의 성장 계기를 만들었다.

경영진의 지원과 인재를 등에 업은 동부하이텍은 2008년 세계 최초로 0.18㎛ 복합고전압소자(BCDMOS) 공정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스템 반도체 회사로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성공이 확실한 성과로 이어지는 데는 시련이 더 필요했다. 동부하이텍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동안 차입 규모는 총 1조9000억원으로 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반도체 산업엔 30년 역사상 최악의 불황까지 닥쳤다. DB의 반도체 사업은 매년 수천억원의 적자가 발생했고 누적 적자가 3조원에 달하고 부채가 한때 2조3000억원을 넘어설 정도로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금융 비용 부담이 커지자 채권단은 재무 구조 개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안팎에서 반도체 사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김 회장은 “반도체 사업은 시간과 자금이 매우 중요한 사업이며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끝까지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김 회장이 사재를 출연한 것도 이때였다. 셋째 변곡점을 사재 출연으로 돌파한 셈이다. 그는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며 “기업을 하다 망해서는 절대로 안 되겠지만 한편으로 ‘나는 망해도 좋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 어떠한 위험이 따르더라도 비메모리에 전념할 것이고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누군가가 이어 받아 성공시킬 수 있다면 선구자로서의 내 역할에 충분한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의지를 보였다.
‘황금알 낳는’ DB하이텍, 부도 위기에서 세계 10대 파운드리 회사로[Case Study]
‘46%’ 황금 알을 낳는 거위재무 구조와 기술 격차의 문제를 해결하자 남은 것은 성장이었다. DB하이텍은 점차 전 세계 고객들에게 기술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미국·일본 등 선진국 시장으로 고객사를 다변화했다. 또한 새롭게 성장하는 중국 시장에서 기반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2010년에는 아날로그 반도체 특화 파운드리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올랐다.

미운 오리 새끼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탈바꿈한 것은 2014년이다. DB하이텍은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 진출 13년 만인 2014년 영업이익 턴어라운드에 성공한 데 이어 2015년 순이익 흑자 전환을 달성했다.

하지만 2013년부터 계열사에서 문제가 터졌다. 동부건설은 건설 경기 침체로 타격을 받았고 동부제철은 전기로 투자에 대한 부담으로 재무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정부는 선제적 구조 조정 방침에 따라 동부그룹에 구조 조정을 요구했다. 그 후 수년간은 구조 조정의 시간이었다. 동부건설·동부제철·동부팜한농·동부고속 등이 줄줄이 매각됐다.

주채권 은행인 KDB산업은행은 반도체도 팔려고 내놓았다. 하지만 마땅한 임자가 없었다. 얼마 후 매각 의사를 철회했다. 경영진은 이후 오래된 꿈을 포기하지 말고 제대로 키워 보자고 다짐하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2017년 동부에서 이름을 바꾼 DB그룹에서 반도체(DB하이텍)는 서서히 주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는 DB하이텍에 기회가 됐다. 반도체를 다품종 소량 생산하는 DB하이텍에 주문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호황은 이어졌다. 2022년 DB하이텍은 매출액 1조6753억원, 영업이익 7693억원을 기록하며 4년 연속 최대 실적을 경신했다. 대부분의 제조업체들이 실적 쇼크로 적자를 면치 못하거나 한 자릿수 이익률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에서도 DB하이텍은 꿈의 이익률이라고 할 수 있는 46%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매출의 절반 가까이를 이익으로 남기는 알짜 회사이자 그룹 내 캐시카우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10년전 , 4000원에 불과했던 주가도 20배 이상 올라 6만원을 넘어섰다. 시가총액 3조원 규모의 알짜회사로 변신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DB하이텍의 성공 신화를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사업 초기 막대한 설비 투자 비용과 함께 높은 기술 장벽에 부딪쳐 수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며 존폐 위기까지 내몰렸기 때문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반도체 사업은 오너의 의지 없이 하기 힘든 사업”이라며 “오너의 의지와 어려움에도 이를 버텨 내고 기술력을 끌어올린 직원들의 헌신이 결합된 결과”라고 평가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