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롯데 경영권 분쟁 때마다 지분 늘려 존재감
가치 투자 원칙으로 저평가 우량주 ‘줍줍’
일본 은행 실적 부진에 경영진 퇴진 압박
한전에 항의 서한 보내 적극적 주주권 행사도

[비즈니스 포커스]
서울 여의도 LG 트윈타워 사진=연합뉴스
서울 여의도 LG 트윈타워 사진=연합뉴스
최근 한국 주식 시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영국의 투자회사 실체스터인터내셔널 인베스터즈 엘엘피(Silchester International Investors LLP, 이하 실체스터)다.

실체스터는 모간스탠리의 펀드 매니저 출신인 스테판 버트가 1994년 영국 런던에 설립, 글로벌 주식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다. 실체스터는 LG그룹의 지주회사인 (주)LG를 비롯해 KT·한국전력공사(한전)의 지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시장에선 저평가된 우량주로 꼽히는 종목이다.

상속 분쟁에 휘말린 (주)LG 지분을 5% 이상 취득하며 3대 주주에 올랐고 천문학적인 적자를 내고 있는 한전에는 “원가 이하로 전기를 팔아 대규모 적자를 내는 데도 왜 전기요금을 인상하지 못하느냐”고 항의 서한을 보냈다.

시장 안팎에서는 묘한 시점의 지분 취득으로 실체스터를 예의 주시하는 중이다. 향후 적극적인 주주 제안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실체스터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영권 분쟁=호재’ LG 주가 고공 행진

실체스터는 4월 12일 LG 지분 5.02%에 해당하는 789만6588주를 확보했다고 공시했는데 매입 시점이 다소 공교롭다. 2023년 2월 고(故) 구본무 전 회장의 배우자와 두 딸이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상대로 상속 회복 청구 소송을 낸 사실이 알려진 직후여서다. LG그룹 오너 일가의 상속 분쟁이 발생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실체스터의 투자 배경과 목적에 관심이 집중됐다.

실체스터는 4~5년 전부터 LG 주식을 장기 매입해 왔는데 4월 5일 4만7000주를 추가로 매수해 지분율 5%를 넘기면서 구광모 회장(15.95%), 국민연금공단(6.83%)에 이어 3대 주주가 됐다. 실체스터의 투자 소식이 알려지면서 LG 주가는 급등했다. 4월 12일 종가 기준 10% 가까이 급등하며 9만35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주식 시장에서 경영권 분쟁은 단기적으로 호재로 작용하는 편이다. 대주주가 지분율을 높이기 위해 공격적인 주식 매입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주가 상승 요인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새로운 경영진이나 기존 경영진이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노력할 것이란 기대감도 작용한다.

실체스터는 LG 지분 보유 목적을 ‘일반 투자’라고 공시했다. 실체스터는 “일상적인 경영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다”면서도 “하지만 의결권 행사 및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배당 증액 요청뿐만 아니라 기타 주주들이 제안하는 일체 안건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고 덧붙이며 향후 주주권 행사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자본시장법상 기관투자가가 기업 지분을 보유하는 목적은 크게 단순 투자, 일반 투자, 경영 참여 등 3가지로 구분된다. 일반 투자 목적은 기존 단순 투자와 달리 배당·지배 구조 개선 등 적극적 주주 활동이 가능하다. 경영 참여는 특정 임원의 선·해임 등에 대한 주주 제안 등 경영권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에선 실체스터가 한국에서 행동주의 펀드로 알려진 것과 달리 해외에선 저평가 우량주에 장기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가치 투자 회사로 분류된다며 LG 경영권에 직접 개입할 목적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픽=송영 기자
그래픽=송영 기자
아직까지는 실체스터가 주주 제안을 하거나 비공개 대화 제의 등을 한 사실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체스터가 지분 보유에 대해 ‘일반 투자’ 목적을 밝히고 있어 LG 경영권 분쟁 참전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김수현 DS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정황상 실체스터가 과거 경영권을 위협할 만큼의 적극적인 전략을 펼친 사례는 없다”면서 “하지만 실체스터의 지분 매입은 향후 LG에 대한 주주들의 요구가 높아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LG가 보유 자산 대비 저평가됐고 풍부한 순현금에 비해 주주 배당금이 낮게 책정돼 왔기 때문에 주주들에게 외면받아 왔다는 분석이다.
명동 한국전력 서울본부./사진=한국경제신문
명동 한국전력 서울본부./사진=한국경제신문
한전에는 전기요금 인상 촉구 항의도

실체스터는 2011년 KT 지분을 5% 이상 취득했다고 최초 공시하며 KT 주주 명부에 깜짝 등장해 이름을 각인시켰다. KT에 10년 이상 꾸준히 투자하며 주요 주주 지위를 유지해 왔는데 그간 행동주의로 불릴 만한 특별한 주주권 행사는 없었다. 현재는 일부를 처분해 5% 미만으로 유지하고 있다.

다만 실체스터도 ‘태세 전환’을 할지 모른다. 최근 들어 실체스터가 주주 가치 제고에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일본 지방 은행 투자 당시 실적 부진을 이유로 경영진 퇴진 압박과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일본 이와테은행(10.2%), 시가은행(7.8%), 교토은행(7.0%)의 최대 주주이자 주고쿠은행(5.1%)의 주요 주주인 실체스터는 2022년 4월 이들 은행에 주주 서한을 보내 각 은행이 보유한 주식에서의 연간 배당금 100%와 대출 등 금융 사업에서의 순이익 50%를 모두 주주들에게 환원하라고 요구한 전력이 있다.

한전의 지분 1.27%를 보유한 실체스터는 한전에도 최근 주주 서한을 보냈다. 주주 서한에는 전기요금 인상 촉구와 한전이 최근 2년간 주주 배당을 전혀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하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알려졌다.

한전의 외국인 지분율은 5월 17일 기준 14.54%로 외환 위기 이후 최저 수준이다. 연료비 상승 요인에도 전기요금을 인상하지 못하는 등 정부의 지속적인 가격 통제에 따른 피로감이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전은 2023년 1분기 6조2000억원 규모의 적자를 냈는데 2021년 이후 누적 적자만 44조6000억원에 달한다. 전기요금 결정 권한은 사실상 정부가 쥐고 있다. 한전이 전기요금을 인상하려면 전기사업법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 전기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산업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또 물가 안정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기획재정부 장관과도 사전 협의를 해야 한다. 연료비 연동제 도입 등 전기요금 체계를 개편하더라도 전기요금 결정 과정에서 정치권의 입김이 과도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KT의 지분을 확보하기 이전인 2006년부터 롯데제과 지분을 지속적으로 매입해 한때 9% 이상을 보유하기도 했다. 2015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형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간 경영권 분쟁 당시에도 롯데제과 주가가 상한가를 기록하자 실체스터는 지분 일부를 처분했다.

롯데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은 2013년부터 시작된 신 전 부회장의 롯데제과 지분 매입이 시발점이었다. 당시 롯데제과는 롯데쇼핑·롯데칠성음료·롯데푸드·롯데리아 등 주요 계열사 지분을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어 경영권 분쟁의 주요 변수로 꼽혀 왔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