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신용정보 전·현직 직원들, 임금소송 1심 승소
“정년연장형도 임금 지나치게 삭감되면 무효”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외벽 모니터의 고령자 계속 고용장려금 광고. 사진=연합뉴스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외벽 모니터의 고령자 계속 고용장려금 광고. 사진=연합뉴스
정년을 연장한 임금 피크제라도 임금 삭감 폭이 크면 무효라는 법원 판결이 처음 나왔다. 임금 피크제를 적용한 기간의 임금이 임금 피크제를 적용하지 않았을 때 정년까지 받는 임금보다 적다면 연령 차별로 봐야 한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그동안 ‘정년 연장형 임금 피크제’는 기업의 패소 사례가 없어 소송 전선에서 ‘무풍지대’로 여겨졌던 만큼 파장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임금 피크제는 ‘정년 연장형’과 정년 변경이 없이 임금을 줄이는 ‘정년 유지형’으로 나뉜다.

대폭 삭감된 연봉이 문제…기업 첫 패소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1민사부(부장판사 정회일)는 2023년 5월 11일 KB신용정보 전·현직 노동자 4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피크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KB신용정보에 원고들이 임금 피크제 적용 기간에 받지 못한 연봉과 퇴직금 미지급분 약 5억4000만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KB신용정보는 2016년 2월 노동조합과 체결한 단체협약에 따라 임금 피크제를 도입하면서 직원 정년을 만 58세에서 만 60세로 연장했다. 제도를 적용하는 나이는 만 55세로 정했다. 임금 피크제 적용 직원에게 기존 연간 연봉의 45~70%를 업무 성과에 연동해 지급했다. 일부 직원은 임금 피크제 적용 첫해부터 연봉이 전년 대비 45% 수준으로 깎일 수 있다.

재판부는 “근무 기간이 2년 더 늘었음에도 임금 총액은 오히려 삭감될 가능성이 높다”며 노동자 측의 손을 들어줬다. KB신용정보 직원은 임금 피크제가 없으면 만 55세 도달 이후부터 원래 정년인 만 58세까지 3년간 직전 연봉의 300%(3년치 기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임금 피크제 도입 후엔 성과 평가에서 매년 최고 등급을 받아야 이 수준의 연봉을 받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마케팅직은 5년간 성과 평가에서 최고 등급(S) 한 번 이상 또는 둘째 등급(A+) 두 번 이상, 행정직은 5년 내내 S등급을 받아야 기존 연봉의 300%를 받을 수 있다. 이 기간 연 최저 등급을 받는다면 기존 연봉의 225%(45%×5년)만 받는다.

과거 정년 연장형 임금 피크제 소송에서 승소한 기업들은 이 정도로 임금 삭감 폭이 크지 않았다. 예컨대 KT는 정년을 만 58세에서 60세로 연장하면서 임금 피크제 적용 시점부터 정년까지 매년 10%포인트씩 임금이 줄어들도록 했다.

삼성화재도 정년을 만 55세에서 60세로 변경하면서 만 56세부터 4년에 걸쳐 연봉이 기존의 90%에서 60%로 차례로 감소하도록 임금 피크제를 설계했다.

안도했던 기업들, 다시 혼란

이번 판결로 임금 피크제를 운영 중인 기업들의 셈법은 한층 복잡해졌다는 평가다. 2022년 5월 대법원이 “합리적 이유 없이 나이만으로 직원의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 피크제는 연령 차별”이란 판결을 내린 직후 산업계에는 큰 파장이 일었다.

하지만 그 후 하급심에서 정년 연장형 임금 피크제는 연령 차별이 아니라는 판결이 잇따르면서 기업들이 안도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KT·삼성화재·한국농어촌공사 등이 잇달아 승소했다.

이런 판결의 바탕엔 ‘정년 연장 자체가 임금 삭감에 대한 보상’이란 판단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도 “대법원 판결은 정년 유지형에 대한 판결이고 정년 연장형은 원칙적으로 연령 차별이 아니다”고 말하며 기업들의 불안감을 달래 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KB신용정보가 패소하면서 정년 연장형 임금 피크제도 상황에 따라선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임금 피크제를 도입했을 때 어느 정도로 임금을 삭감해야 괜찮은 것인지 고민이 깊어졌다는 평가다.

이번 재판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법은 대법원이 1년 전 판결 때 제시한 ‘노동자의 불이익 정도와 임금 삭감에 준하는 업무량‧강도 저감 조치 등을 종합적으로 따졌을 때 불합리해야 임금 피크제를 연령 차별로 볼 수 있다’는 기준을 판단 근거로 삼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임금 피크제를 도입한 한국 기업의 87.3%가 정년 연장형을 선택했다. 2013년 고령자고용법 개정에 따라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는 과정에서 임금 피크제를 도입한 기업이 많기 때문에 정년 연장형의 비율이 높다.

김동욱 법무법인 세종 노동그룹장은 “정년 연장형 임금 피크제는 무효 논란에서 자유롭다는 생각은 이제 기업들의 희망 사항에 그칠 수도 있다”며 “임금 삭감률이 높은 기업들을 상대로 한 임금 피크제 소송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돋보기]
정년 유지형은 무효 가능성 더 높아지나…유효 인정 사례도 있어

정년 연장형 임금 피크제조차 무효라는 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기업들 사이에선 정년 유지형 임금 피크제가 적법하다고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는 분위기다.

정년이 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 삭감에 대한 보상이 적절히 주어졌는지를 두고 다툴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같은 노동자 보호 조치가 충분했다면 임금 피크제를 무효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기 때문에 기업 측에 꼭 불리한 상황은 아니라는 평가다.

서울동부지방법원 제15민사부(재판장 정완)는 2022년 10월 27일 한국광물자원공사(현 한국광해광업공단) 퇴직 노동자 7명이 회사를 상대로 임금 피크제로 감액된 임금을 달라고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광물자원공사의 임금 피크제는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이 공사는 2015년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고 임금 피크제 도입에 합의했다. 정부가 공기업과 준정부 기관을 대상으로 권고안을 만드는 등 임금 피크제 도입을 장려한 것에 따른 것이다.

공사는 임금 피크제를 적용 1년 차 때는 기존의 80%, 2년 차 때는 60% 수준의 연봉을 지급하고 있다. 이미 2009년 노사 합의로 직원 정년이 만 58세에서 만 60세로 연장됐기 때문에 임금 피크제를 도입할 때는 별도의 정년 연장 조치를 하지 않았다.

원고들은 재판에서 “노동 시간 단축 없이 급여만 줄인 임금 피크제는 합리성이 없기 때문에 효력도 없다”며 “합리적 이유 없이 고령자고용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022년 5월 대법원이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의 정년 유지형 임금 피크제를 무효라고 판단했을 때 제시한 근거를 그대로 반영했다.

하지만 서울동부지법은 공사의 경우엔 임금 감축보다는 임금 피크제 도입 취지에 무게를 더 뒀다. 재판부는 “공공 기관 임금 피크제는 정년 연장에 따른 공공 기관의 인건비 부담 증가와 신규 채용 감소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세대 상생 제도”라며 “임금 삭감 없이 정년을 연장하면 인사 적체와 인건비 부담을 가져와 명예퇴직 등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임금 피크제 도입에도 정년이 연장되지 않은 것은 고령자고용법 개정 전부터 이 회사 노동자들이 정년 60세를 보장받았다는 의미”라고도 했다.

공사의 임금 삭감 폭이 크지 않다고도 판단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재판부는 “임금 피크제 적용 임금은 원고들과 동일한 직급에 있는 노동자의 평균 임금과 비교해 90~159%”라며 “다른 공공 기관과 비교해도 감액률이 과도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