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가지 맛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에 가면 고민이 앞선다. 대체 어떤 맛을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이곳도 마찬가지다. 문을 열고 마주한 마스킹테이프 세상에서는 아무리 결단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결정이 쉽지 않다. 총천연색은 물론이고 요가하는 사람, 낮잠 자는 고양이, 막 구운 듯 노르스름한 빵, 짓궂은 어린아이의 얼굴, 파란 하늘을 그대로 옮겨 온 듯한 패턴까지 없는 패턴을 찾는 게 힘들 정도다. 이렇게 다양한 마스킹테이프가 숍 양쪽 벽면 수납함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마음에 드는 마스킹테이프는 직접 사용해 볼 수 있다. 롤드페인트에 입장하면 테스트 종이를 한 장씩 건네받는다. 이 종이에 원하는 마스킹테이프를 붙여 볼 수 있고 숍 중앙에 자리 잡은 작업대에서 아트나이프나 커팅매트를 활용해 작품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커팅매트는 작은 모양이 옹기종기 그려져 있는 책받침과 같은 모양새인데 이 매트에 마스킹테이프를 얹은 후 비치는 모양대로 오려내면 모양 스티커처럼 활용할 수 있는 도구다. 작업이 끝난 테스트 종이는 상단 구멍에 끈을 달아 책갈피로 사용할 수 있다. 롤드페인트의 대표이자 마스킹테이프 작품을 선보이는 채민지 작가는 이곳을 단순 판매 숍이 아닌 마스킹테이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미고자 했다. “롤드페인트를 방문하는 분들이 마스킹테이프를 이렇게도 붙이고 저렇게도 붙여보며 몰입하는 순간에 가치를 둘 수 있으면 좋겠다”며 “더 나아가 이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마스킹테이프가 자신만의 표현 도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숍 중앙에 작업대가 있는 이유 역시 방문객이 마스킹테이프의 다양한 면모를 경험하고 갔으면 해서다.
롤드페인트의 역사는 대구에서 먼저 시작됐다. 2019년 10월 대구 봉산동에 문을 열어 2023년 4월 말까지 그 역사를 같이한 롤드페인트는 5월 17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으로 거점을 옮겼다. 채민지 작가는 “혼자 작업실의 개념으로 시작했던 숍을 운영하다 보니 23㎡(7평) 남짓한 매장이 부쩍 좁다고 느껴졌다”며 “이왕 확장 이전을 결심한 김에 꽤 오랜 기간 대구에 있기도 했고 내부적으로 환기를 주고 도전의 차원에서 서울로 이전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신선한 경험을 선사하는 곳
마스킹테이프는 원래 공업 용품이다. 건설 현장에서 페인트가 묻지 않아야 하는 곳이나 양생이 필요한 구간에 주로 붙인다. 마스킹테이프를 아트의 세계로 확장시킨 것은 일본 마스킹테이프 제조사 ‘카모이’다. 세 명의 공예가와의 협업을 통해 ‘mt’라는 브랜드를 시작했고 현재까지도 유명 아티스트와 협업해 다양한 마스킹테이프를 선보이고 있다. 마스킹테이프 아트가 아직 낯선 한국과 달리 일본은 이미 탄탄한 마니아 층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시작이 이렇러다 보니 마스킹테이프는 일본 기업의 제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국산 마스킹테이프의 저력 역시 만만치 않다. 일러스트 작품이나 여행 사진, 수채화 작품 등 마스킹테이프화할 수 있는 소재가 무궁무진한 것은 물론 기업에서 선보이는 굿즈 라인업에 마스킹테이프가 필수로 들어가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제작하는 이들도 많아 한국 제작 제품도 다양한 편이다. 아직까지 한국 소비자들은 마스킹테이프를 주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할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스킹테이프는 생각보다 쓰임새가 다양하다. 책을 읽다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만났을 때 표시할 수도 있고 밋밋한 스위치 커버에 붙이면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된다. 원하는 마스킹테이프 몇 가지를 조금씩 잘라 이어 붙이면 어디에도 없는 자신만의 패턴이 되고 전단지 뒤에 붙은 자석을 떼어 마스킹테이프를 붙이면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용 자석을 만들 수 있다. 숫자가 그려진 마스킹테이프를 활용하면 어디든 붙일 수 있는 캘린더가 뚝딱 완성된다.
이곳의 상호명 롤드페인트(Rolledpaint)는 돌돌 말린 물감이라는 의미다. 단색의 마스킹테이프를 겹겹이 붙여 푸른 하늘을 표현할 수 있고 패턴 마스킹 테이프를 죽죽 찢어 스트라이프 셔츠를 만들 수도 있다. 채 작가는 “‘쭉’ 찢어 ‘쓱’ 붙이면 작품이 되고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자신만의 손길이 닿은 애장품이 된다”며 “손재주가 없다고 겁먹지 말고 평소 하지 않았던 작업을 해본다면 그것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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