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우리 사회 내 미래 불안감을 부추기는 거대 암초는 ‘고령화’다. 고령화는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미래가 아닌 현재가 됐다. 최근 행정안전부의 주민등록인구통계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943만2919명으로 집계됐다. 총인구수 5140만8155명 대비 노인인구 비율은 18.3%에 달한다. 정부는 내년에 노인인구 10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한다.
여기에 인구절벽과 여전히 경제위기론이 사그러들지 않는 상황에서 자산관리는 미뤄도 될 노후의 과제가 아닌 지금 당장 준비해야 할 의무가 돼 버렸다. 이런 흐름 속에 계약 조건에 따라 다양한 옵션으로 생전은 물론 사후까지 본인의 재산을 관리해주고, 가족에 대한 케어까지 가능한 신탁이 자산관리계 구원투수로 주목받고 있다.
신탁, 자산관리 구원투수로 등판
‘믿고 맡긴다’는 뜻의 신탁(信託)은 예금, 펀드 등 금융 자산은 물론 부동산과 같은 비금융 자산에 대한 안정적 관리와 함께 고객의 재산을 생전부터 보관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정할 수도 있어 자신의 노후를 위한 방법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신탁 계약 자체가 재산의 유언과 같은 효력이 있어 수탁자에 의한 상속 집행을 통한 가족 간 다툼의 가능성도 줄일 수 있다. 상속인이 어리거나 자산관리 능력이 부족한 경우까지 보살필 수 있는 관리 방법도 준비할 수 있다.
신탁 플랫폼을 기반으로 부동산 자산의 경우에도 다양한 솔루션이 가능하다. 매각 후 상속할 경우와 상속으로 갈 경우 세금의 차이를 비교함은 물론이고, 그 부동산을 보유할 경우 관리 방안과 자산 가치를 증식하기 위한 사전증여와 신축 콘셉트 등에 대해서도 동반자로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미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신탁 상품이 출시돼 국민들의 노후를 책임지고 있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늘어난 수명만큼 자산관리에 대한 고민도 가지각색”이라며 “최근 수년째 고액자산가들 중심으로 상속·증여 플랜의 일환으로 유언대용신탁, 수익자연속신탁을 활용하고자 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 다양한 재산을 종합적·적극적으로 관리하는 유연한 신탁 본연의 기능이 부각되는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흐름에 따라 국내 신탁 시장의 외연도 넓어지고 있다. 지난 4월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2년 신탁업 영업 현황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내 60개 신탁사 수탁고는 총 1223조9000억 원을 기록했다. 2021년 말 대비 4.9%(57조2000억 원) 증가한 수준이다. 구체적으로 은행 수탁고(541조8000억 원)와 보험사 수탁고(19조7000억 원)가 각각 전년 말 대비 9.4%, 8.3% 증가했다. 신탁보수 역시 전년 대비 3.2%(714억 원) 증가한 2조2996억 원을 기록했다.
최근에는 고령화 시대와 맞물려 신탁은 투자 기능뿐만 아니라 재산 관리의 고유 기능을 활용해 생존신탁(가족을 수익자로 지정해 생존 시 파산, 질병 등의 위험으로부터 가족의 생활비 등을 보호)이나 유언신탁(사망 시를 대비해 상속재산 처분 계획을 미리 설정), 사회안전망 역할을 담당할 후견신탁이나 복지신탁 등 다양한 변주를 시도 중이다.
배정식 법무법인 가온 패밀리오피스센터 본부장은 “국내 신탁 시장이 외연의 확장말고도 내실 면에서도 진화 중”이라며 “이른바 ‘K-신탁’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고유의 경쟁력을 쌓아 가고 있다. 한국인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응용력과 추진력, 창의력이 강한데, 그런 강점들이 신탁이 지닌 유연성과 더해져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배 본부장은 그러면서 “다만, 이러한 신탁의 유연성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신탁을 오롯이 활용하기엔 규제도 심하고, 업권 간 갈등이 크다”며 “무분별한 경쟁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신탁 시장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이 곧 소비자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와 상품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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