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연계한 사용자 접점 혁신 중점…고객 가치 제공 위한 생태계 지원 관건
애플이 6월 5일 ‘2023 세계 개발자 회의(WWDC)’에서 혼합현실(MR) 헤드셋 ‘비전프로(Vision Pro)’를 발표했다. 침체기에 빠진 메타버스 관련 악재가 쏟아지는 가운데 열린 이번 행사는 애플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언론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애플, 9년 만에 신제품 비전프로 공개애플의 새로운 헤드셋은 하드웨어 측면에서 2000만 대 이상 판매된 오큘러스 퀘스트2 또는 지난해 10월 출시된 메타 퀘스트 프로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상도나 몰입감 등 기술적 완성도, 현실과 가상 세계를 연결하는 기능적 완결성, 다른 기기 호환성, 기존 애플리케이션(앱) 활용도 등 여러 면에서 타 기기 대비 진일보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기술적으로나 사용자 경험 측면에서 긍정적인 의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플의 ‘비전프로’가 메타의 가상현실(VR) 헤드셋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홀로렌즈보다 기술적 완성도나 기능적으로 한 단계 진보했다고는 하지만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혁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애플이 9년 만에 내놓은 신제품 비전프로는 단순히 기술적 우위성을 논하기보다 애플이 지향하는 미래 컴퓨팅 환경에 대한 비전(vision)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평가해야 한다.
우선 애플은 메타버스라는 공간 생태계를 새롭게 재정의하고 있다. 메타버스는 미래 컴퓨팅 환경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용어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메타버스라는 용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발표에서도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메타버스라는 말 대신 공간 컴퓨팅(spatial comput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맥이 개인용 컴퓨터를, 아이폰이 모바일 컴퓨팅 시대를 주도했다면 차세대 기술 패러다임은 공간 컴퓨팅이 될 것이라고 비전프로를 소개했다. 팀 쿡은 왜 공간 컴퓨팅이라고 말했나공간 컴퓨팅은 2003년 사이먼 그린월드의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석사 논문에서 등장한 용어다. 그는 공간 컴퓨팅을 “기계가 실제 개체와 공간의 지시 대상을 유지하고 조작하기 위한 기계와 인간의 상호 작용”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혹자는 공간 컴퓨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기존의 메타버스라는 거대한 담론에서 애플이 자사 제품을 경쟁사들과 차별화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이 주장은 자사만의 폐쇄적이고 독자적인 정보기술(IT) 생태계를 통해 새로운 혁신을 주도해 온 그동안의 애플의 행보를 볼 때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메타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주도하고 있는 메타버스 생태계와는 다른 비전을 보여주려는 애플의 의도로 해석된다. 비전프로를 ‘애플버스 증강현실(Appleverse AR)’이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애플이 단지 경쟁사와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한 마케팅적 용어로만 쓰지 않았다. 공간 컴퓨팅으로의 개념 전환은 인간이 디지털 환경과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재정의하고 인간과 기계, 인간과 사물 간의 새로운 사용자 접점(user interface)을 혁신하려는 노력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관측된다.
마치 아이폰의 터치 방식이 새로운 기계와 사람의 사용자 경험을 재정의 한 것처럼 비전프로도 사용자가 새로운 공간 컴퓨팅 환경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는 사용자 접점 환경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간 컴퓨팅 환경이 기기 속 스크린을 통해서만 컴퓨터와 상호 작용했다면 애플이 추구하는 공간 컴퓨팅은 우리 주변에 편재된 컴퓨팅 환경에서 컴퓨터와 자연스럽게 상호 작용할 수 있는 디지털 환경을 말한다. 실제로 비전프로는 어떠한 컨트롤러 없이도 손과 눈의 움직임으로 앱을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애플의 새로운 공간 컴퓨팅 환경에서는 메타의 가상공간 ‘호라이즌 월드’처럼 특정 가상 공간에 갇혀 상호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 현실 세계와 밀접히 연결돼 상호 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쿡 CEO는 이를 컴퓨터 그래픽이 사용자 주변의 세계에 겹쳐지는(overlay) 것이라고 표현했다.
애플이 추구하는 공간 컴퓨팅의 개념은 VR과 AR을 분리된 공간 개념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인간과 컴퓨터 간 상호 작용, 인공지능(AI)과 컴퓨터 비전의 측면을 결합해 주변 공간을 이해하고 상호 작용할 수 있는 디지털 세계다.애플 공간 컴퓨팅 개념, 메타와 차이점은최근 메타 임직원과의 회의에서 마크 저커버그 CEO는 “애플의 비전프로가 컴퓨팅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될 수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니다”며 회사별 철학적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메타가 꿈꾸는 세상은 “더 사회적이고 사람들이 더 새로운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고 가깝게 느끼는 것 그리고 좀 더 활동적”이라는 말로 차이를 설명했다.
사실 메타는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 플랫폼을 통해 성장한 기업이라 기존의 플랫폼을 대체할 새로운 플랫폼의 모습도 그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소셜 VR 플랫폼인 ‘호라이즌 월드’다.
애플은 메타버스의 전통적인 가상 공간 개념에 한정되지 않고 메타버스 공간을 좀 더 확장하려고 한다.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매끄럽게 혼합하는 공간 컴퓨팅은 현실과 유사한 VR을 통해 물리적 환경을 대체하기보다 현실 세계를 디지털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중점을 뒀다.
애플과 메타의 또 다른 점은 사용자다. 메타가 아바타를 통해 가상 공간에서 상호 작용하는 것에 비해 애플은 자신을 스캐닝한 페르소나를 통해 마치 타인과 실제 물리적 공간에서 상호 작용하는 환경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메타의 호라이즌 월드에서 보이는 아바타와 달리 애플은 실제 모습과 같은 얼굴의 디지털 버전을 제공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용자의 눈을 보여주며 인간적인 상호 작용의 요소를 유지하게 하는 아이사이트(Eyesight)도 현실과 가상 세계에서의 인간을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어떤 가치 제공할까기술을 통한 혁신이 성공하려면 기술적 완성도 못지않게 이를 통해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지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비전프로 가 보여주는 기술적 찬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전문가들이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소비자들이 이 고가의 헤드셋을 왜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이유가 불분명하다. 시각적·음향적으로 만들어 내는 환상적인 현장감과 몰입감은 근본적인 대답이 되지 않는다. 과거 3D TV가 실패한 이유도 상당 부분 이러한 이유에서다. 기술은 목적이 아니고 도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비전프로는 애플의 다양한 기기에서 이용하던 기존의 앱과 서비스를 새로운 혼합 공간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4K TV로 보는 것처럼 더 선명한 영상을 영화관에서처럼 시청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왜 집이나 회사에서 하는 일을 거추장스러운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해야 하는지, 왜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보는 TV 방식 대신 TV를 머리에 묶는 것 같은 다소 괴이한 방식으로 디즈니 영화를 감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다.
기술보다는 사용자에 제공할 가치 있는 서비스나 킬러 앱이 필요하다는 원론적 담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도 공간 컴퓨팅을 위한 킬러 앱은 우리가 지금 스마트폰에서 사용하는 앱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가장 성공적인 모바일 앱은 데스크톱 PC에서 가능한 앱이 아니고 모바일에 최적화된 앱이다.
이런 맥락에서 애플은 450만원 하는 값비싼 비전프로를 일반 소비자에게 많이 판매할 생각은 없다고 느껴진다. 공간 컴퓨팅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제품을 제공하기 위한 게 궁극적인 목표로 보인다. 애플 비전프로가 개발자와 초기 수용자(early adopter)를 위한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애플이 비전프로의 예상 판매량을 당초 100만 대에서 대폭 감소한 15만 대로 하향 조정했다는 외신 보도도 이런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비전프로가 시장에 나오려면 내년 초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직 데모 영상만으로는 새로운 사용자 접점에서 어떠한 혁신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동안 애플이 개인 컴퓨터부터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애플 워치를 통해 이뤄 온 성과를 고려하면 기대해 볼 만한 시간은 아닐까 싶다.
심용운 SK경영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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