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그룹, 잇따라 전략회의 열며 경영 전략 점검
경쟁사 S급 인재·고위 관료 등 스카우트
역대 최악의 실적에도 R&D 투자 확대

[비즈니스 포커스]
어려워도 ‘사람·기술’에 공격 투자…생존 전략 새판 짠다
글로벌 복합 위기와 불확실성이 고조되며 경영 환경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제조업이 부진의 늪에 빠짐에 따라 경기 하강을 시사하는 경제 지표들이 증가하고 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제조업 출하가 줄면서 제조업 재고율이 역대 최대치로 치솟았고 설비 투자도 부진하다. 고금리로 소비·투자 위축 흐름이 지속되는 가운데 중국의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 효과도 기대에 못 미쳤다.

기업들은 예상보다 더딘 경기 회복 속도에 대비해 하반기 경영 전략 점검에 돌입하고 있다. 비용 절감을 추진하면서도 미래 투자, 인재 확보에는 과감하게 투자해 복합 위기에 대응한다는 계획이다.

“예상보다 회복 더뎌” 하반기 전략 회의 앞당겨

“예상보다 경기 회복이 지연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고객을 향한 변화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면서 근본적인 경쟁력을 높여야 합니다.”

5월 31일 LG그룹 계열사 사장단협의회에서 구광모 회장이 당부한 말이다. 이날 LG그룹 최고경영자(CEO)들은 상반기 사업 성과를 살펴보고 경영 전반의 다양한 요소들을 점검해 선제적으로 대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LG그룹은 매년 상반기에는 구 회장 주재로 미래 전략을 논의하는 전략보고회를, 하반기에는 경영 실적과 다음해 사업 계획을 논의하는 사업보고회를 열고 있다. 올해 전략보고회는 지난해보다 20여 일 앞당긴 5월 8일부터 진행됐다. 글로벌 경기가 급속도로 악화함에 따라 선제적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는 주요 경영진과 해외법인장 등이 온·오프라인으로 모여 6월 20~22일 글로벌 전략 회의를 연다. 글로벌 전략 회의는 매년 6·12월 두 차례 열린다. 한종희 부회장이 이끄는 디바이스경험(DX) 부문은 6월 20~22일, 경계현 사장이 이끄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은 6월 20일 전략 회의를 열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6월 15일 서울 광진구 그랜드 워커힐 서울에서 열린 ‘2023 확대경영회의’에서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SK그룹 제공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6월 15일 서울 광진구 그랜드 워커힐 서울에서 열린 ‘2023 확대경영회의’에서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SK그룹 제공
SK그룹은 6월 15일 확대 경영 회의를 열었다. 최태원 SK 회장은 이날 미·중 경쟁과 글로벌 경기침체 등 각종 위험 변수들과 기회 요인에 맞춰 유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 플래닝(Scenario Planning)’을 강화하자고 주문했다.

최 회장은 글로벌 전략 재점검도 당부했다. 최 회장은 “글로벌 시장은 옛날 같은 하나의 시장이 아닌, 다양한 변수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시장이 됐다”며 “그룹 차원으로 미국·중국·유럽·일본 등 각 시장 별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대차와 기아는 매년 7월 서울 양재동 사옥에서 해외법인장 회의를 연다. 권역별 전략과 글로벌 전체 전략을 점검하는 자리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에 따라 현재 한국에서 제조해 수출되는 현대차그룹의 전기차는 IRA의 지원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보조금 혜택을 늘리기 위한 대응책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롯데그룹은 오는 7월 신동빈 회장 주재로 VCM(Value Creation Meeting : 구 사장단회의)을 열고 하반기 경영 전략을 모색할 예정이다. VCM은 매년 1·7월 두 번 열린다. 신 회장은 올해 신년사와 상반기 VCM에서 현재의 불확실한 경영 환경을 ‘상시적 위기’의 시대로 규정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도전 정신을 강조한 바 있다. 하반기 VCM에서도 상시적 위기 시대를 지속 성장 발판으로 전환하기 위한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이 3월 9일 현대차 울산공장 수출 선적부두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자동차 전용선인 ‘글로비스 스카이호’에 오르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윤석열 대통령이 3월 9일 현대차 울산공장 수출 선적부두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자동차 전용선인 ‘글로비스 스카이호’에 오르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불황을 기회로…인재·R&D에 아낌없이 투자

재계의 하반기 경영 전략 핵심 키워드는 ‘사람’과 ‘연구·개발(R&D)’로 요약된다. 재계는 불황일수록 우수 인재 영입과 R&D에 대규모 투자를 이어 갈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인재와 기술로 위기를 타파한다는 전략이다. 이재용 회장은 2022년 회장 취임 이후 기술과 인재를 강조해 왔다. 이 회장은 “미래 기술에 우리의 생존이 달려 있다”며 “최고의 기술은 훌륭한 인재들이 만들어 낸다”고 역설했다.

삼성전자는 미래 기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글로벌 인재 영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월 삼성전자의 선행 R&D 조직인 삼성리서치(SR)는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매니저 출신인 권정현 상무를 영입해 로봇센터의 로봇인텔리전스팀 총괄을 맡겼다.

2022년엔 TSMC 출신 엔지니어인 린준청 씨를 반도체(DS) 부문 어드밴스드패키징(AVP)팀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퀄컴 엔지니어링 부문 부사장을 지낸 베니 카티비안을 미국 법인 부사장으로 스카우트하기도 했다. AMD·애플·GE·메르세데스-벤츠 등 글로벌 기업에서 각 분야 S급 인재들도 대거 영입했다.

정치 외교 통상 분야 고위 관료 영입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현대차는 대외협력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외교부 출신의 김동조 전 청와대 외신대변인을 상무로, 김일범 전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을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IRA와 유럽 핵심 원자재법(CRMA) 등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확산 기조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산업통상자원부 과장 출신도 상무로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9월 29일 경기 광주시 곤지암리조트에서 열린 'LG 사장단 워크샵'에서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최고경영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LG그룹 제공
2022년 9월 29일 경기 광주시 곤지암리조트에서 열린 'LG 사장단 워크샵'에서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최고경영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LG그룹 제공
IRA·CRMA 적극 대응…해외 대관 강화

LG그룹도 글로벌 공급망 이슈와 정책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에서 모두 국무조정실 차장을 지낸 윤창렬 서울대 객원교수를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조직 신설도 준비하고 있다.

LG그룹은 배터리 기업인 LG에너지솔루션과 배터리 소재 등 첨단 소재를 생산하는 LG화학이 IRA와 CRMA 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 기민한 대응이 필요하다. 구 회장은 폴란드에 있는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과 LG화학 청주 양극재 공장을 직접 챙기며 공급망 대응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SK그룹은 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에 글로벌 대관 총괄 조직인 글로벌 공공대응팀(GPA)을 신설하고 김정일 전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을 팀장으로 선임했다. 삼성전자도 외교통상부 통상전략과장 출신인 김원경 부사장과 산업통상자원부 미주통상과장 출신인 권혁우 상무를 영입해 GPA팀을 운영 중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6월 13일 부산항 북항을 방문해 30개국 주한 대사 등 행사 참석자에게 부산의 매력과 엑스포 유치 역량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롯데지주 제공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6월 13일 부산항 북항을 방문해 30개국 주한 대사 등 행사 참석자에게 부산의 매력과 엑스포 유치 역량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롯데지주 제공
어려울 때일수록 단기 성과에 치중해 R&D 투자를 축소하는 것은 미래를 팔아 먹는 일이다. 한국 기업들은 위기 때 공격적인 투자로 위기를 극복한 사례가 많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끊임없이 위기의식을 강조하며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일본 기업들이 투자를 축소할 때 과감한 선행 투자에 나섰다. 불황 이후 경쟁 업체들과의 기술 격차를 벌려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 불황 여파로 올해 1분기 반도체 사업에서 각각 4조5800억원, 3조4000억원 등 8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냈지만 불황에도 공격 투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1분기 R&D에 역대 최대 규모인 6조5800억원을 투자했다.

시설 투자도 전년 동기(7조9000억원) 대비 36% 증가한 10조7000억원을 집행했다. SK하이닉스는 전사적으로 투자를 줄이는 상황에서도 인공지능(AI) 등 향후 시장 변화를 주도할 산업에 활용되는 최신 메모리 제품에 대한 투자를 지속하기로 했다.

CEO스코어에 따르면 주요 대기업이 2022년 경기 둔화로 순이익이 27% 이상 감소했지만 R&D 투자는 전년보다 8조4000억원 이상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이 R&D 투자를 비용으로 보기보다 장기적인 투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2022년 R&D에 전년보다 10.3% 많은 24조9292억원을 투자했고 SK하이닉스는 전년보다 21.3% 늘린 4조9053억원을 투자했다. 재계 관계자는 “당초 보수적인 경영 계획을 수립했지만 불황일수록 다가올 호황을 준비한다는 각오로 R&D와 인재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