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용 레이즈 그룹 CIO 인터뷰
20년 간 일본 금융 시장에 몸담은 전문가…"금리 딜레마 빠진 일본, 고령화도 성장 발목 잡아"
엔·달러 환율과 니케이 지수의 상관관계를 고려할 때 2021년 대비 일본 주식 시장은 12% 저평가
‘역대급 엔저’를 발판 삼아 일본 경제가 다시 도약하고 있다. 성장·소비·투자·주가 지표가 동시에 호전됐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여전히 일본 경제의 부활을 두고 ‘신중론’이 제기된다. 표면적인 경제 지표는 좋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기초 체력은 여전히 부실하다는 이유에서다.
일본에서 자산 운용사 ‘레이즈’를 세운 문지용 최고투자책임자(CIO) 역시 신중론자 중 한 명이다. 문 CIO는 20년간 일본 금융 시장에 몸담은 전문가다. 2003년 게이오대 MBA를 졸업한 후 제너럴일렉트릭(GE)·미쓰이상사 등 기업에서 인수·합병(M&A)을 주도하고 다양한 펀드를 조성하고 운용했다. 20년간 일본 정부의 경제 정책에 따른 금융·부동산·산업의 변화를 지켜봐 온 그는 엔저의 ‘효과’보다 ‘부작용’에 주목한다.
문 CIO는 “일본 정부가 10년째 엔화의 가치를 억제하면서 증시와 채권 시장이 왜곡됐고 일본 사회의 고질병인 ‘고령화’가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CIO로 계신 레이즈 그룹 소개 부탁드립니다.
2015년 설립한 자산운용사입니다. 직전에는 일본 2대 상사인 미쓰이물산에서 시니어 매니저로 일하며 펀드를 조성하고 리츠와 부동산 사모펀드를 총괄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일본 내 기관투자자들과 네트워크가 쌓였고, 직접 펀드를 만들어서 운용해야겠다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뒀어요. 레이즈 그룹은 주로 태양광 발전소 등 일본의 인프라나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미쓰비시 UFJ 신탁은행, 미쓰이 물산, SBI그룹 등 일본 기관투자자들이 저희 펀드에 투자했습니다. 운용 자산은 약 650억엔(약 5800억원)입니다.
-일본 증시가 30년 만에 활황입니다. 일본 경제의 부활 신호로 봐도 될까요.
“일본 정부가 강력한 주주 환원 정책으로 주가를 부양하고 있지만 아직 일본 내부에서는 ‘신중론’이 우세합니다. 닛케이지수는 225개 기업 주가의 평균 지수입니다. 일본 경제가 살아난다고 하면 225개의 주가가 골고루 올라야 하는데 지금은 외국인이 투자하는 도요타·소니와 5대 상사, 반도체 관련 주 위주로 폭등한 상황입니다.
‘리크루트홀딩스’라는 기업을 예로 들어 볼까요. 코로나19 사태 이후 일본이 구인난에 시달리면서 2021년 8000엔까지 주가가 올랐던 회사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4600엔 정도로 반 토막 난 상황입니다. 수출 기업이나 상사처럼 달러로 돈을 벌어들이고 장부에 ‘엔’으로 표시하는 기업들은 ‘엔저’의 효과로 이익이 많이 오른 것처럼 보이는 거죠. 현재 일본 증시에는 이 같은 착시와 왜곡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일본 경제에 대한 전망이 비관적이었습니다. 올해 1분기부터 갑자기 일본의 부활이 거론되는 ‘내부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외부에서 일본 경제를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증시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주가 상승을 이끈 주체가 국내 기관이나 개인 투자자가 아니라 외국인 투자자예요. 일본 증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는 달러 대비 환율입니다. 지금처럼 엔의 가치가 떨어질 때는 닛케이지수가 올라갔고 엔이 강할 때는 닛케이지수가 하락했어요.
정상적인 시장 기준을 2021년 1월이라고 가정해볼게요. 당시 달러 당 엔 환율은 103.23이었고 니케이지수는 2만7158엔이었습니다.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이 한창이던 2022년 1월에는 달러 대비 환율이 116.15엔, 니케이 지수는 2만9301엔으로 증시가 전년 1월 대비 4% 정도 저평가돼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자산 운용사들은 펀드 포지션을 연초에 잡습니다. 올해 초 달러 당 엔 환율은 132.2엔으로 높았는데 닛케이지수는 2만5716엔으로 26%나 저평가돼 있어 많은 투자자들이 연초에 일본 증시로 향한 것으로 보입니다.”
-증시 부활 외에 다른 지표도 좋습니다. 특히 외부에서는 일본의 물가 상승과 국내총생산(GDP) 성장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부 분위기는 조금 다릅니다. 일단 엔의 통화 가치가 낮아지면서 일본의 구매력이 낮아졌습니다. 달러 당 엔의 구매력을 나타내는 실질 실효 환율이 50년 만에 최저로 떨어졌어요. 만약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국민들이 들고일어날 겁니다. 시위라도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일본은 국민의 목소리가 약한 나라입니다.
젊은 세대는 정치나 정책에 관심이 없는 데다 간접 선거여서 국민과 정부의 거리감이 점점 멀어지고 있어요. 이런 정치적인 특성도 일본의 경제 상황에 분명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디플레이션을 잡겠다며 ‘2% 물가 상승’을 목표로 10년 이상 노력해 왔죠. 그동안 마이너스 금리, 제로 금리를 유지하면서 돈을 풀었는 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는데 작년에 갑자기 물가가 3.1% 상승했어요. 10년 동안 물가가 오르지 않았던 국민들에게는 갑자기 가계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죠.” -10년 넘게 금리가 낮았는데, 개인 투자자가 주식투자에 뛰어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본은 나라가 빚쟁이인데 국민이 부자인 국가예요. 일본의 가계 금융 자산은 2000조 엔이 넘습니다. 우리 돈으로 1경8000조원 정도인데 그중 현금 예금이 55%를 차지합니다. 60세 이상의 베이비붐 세대가 현금을 가장 많이 들고 있는데, 버블을 경험한 세대라 부동산이나 주식에 쉽게 투자하지 않아요.(실제로 지난 3월 말 기준 일본 가계의 금융자산에서 '현금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주식'보다 5배 많다.) 손실을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일본의 국민성과도 관련 있습니다. 젊은 세대도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사업을 하고 싶어하기보다는 한 회사에 오랫동안 다니면서 정년퇴직하기를 바랍니다. 국민성이 한국과 많이 다르죠.”
-‘엔저’를 두고 일본 정부의 딜레마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오랫동안 이어져 온 장·단기 금리 조작으로 주식과 채권 시장은 왜곡됐고 갑작스러운 물가 상승으로 가계 압박이 늘고 있는 상황인데요. 근본적으로는 ‘엔의 힘’을 다시 부활시켜야 하는데 금리를 올리면 국채 가격이 떨어지고 이는 고스란히 국채의 절반을 떠안고 있는 일본 중앙은행의 부담으로 돌아옵니다. 국가 신용 등급이 하락할 수도 있죠. 엔저의 부작용이 터져 나오는 데도 여전히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50엔을 넘어서면 이제 일본 정부에 남은 카드는 ‘외환 시장 개입’뿐입니다.”
-지금 일본 주식에 투자한다면 어떤 업종을 눈여겨봐야 할까요.
“엔·달러 환율과 니케이 지수의 상관관계를 고려할 때 여전히 2021년 대비 시장은 12%나 저평가돼 있습니다. 일부 업종만 급등하면서 오히려 저평가된 회사들이 많아요. 인구가 줄어드는 일본은 고령 인구가 늘고 있습니다. 헬스케어·제약·실버 산업 관련 업종을 추천합니다. 또한 일본의 관광객 증가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일본에 왜 매력적인 소도시가 많을까요. 가늘고 긴 국토에 의해 지역마다 문화의 차이나 개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바운드(방일 관광객) 관련 비즈니스도 아직은 저평가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일본이 강점을 가진 산업은 오랜 시간 끈기를 가져야 성과를 낼 수 있는 기초 화학·소재·기계류 등입니다. 이런 회사들은 아직 급등하지 않았어요. 일본 기업에 투자하면 미국 중앙은행(Fed)이 금리를 떨어뜨리는 2년 후에는 환율이 어느 정도 정상화되고 회사 가치도 순수하게 높아지면서 좋은 투자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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