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한경협으로 간판 교체 예정
尹 정부에서 경제사절단 등 주요 행사 주도
국정농단 사태 이후 발길 끊었던 4대 그룹 복귀 여부 관심

[비즈니스 포커스]
삼성·SK·현대차·LG그룹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삼성·SK·현대차·LG그룹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 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오는 8월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다시 태어난다. 1961년 설립 당시 사용했던 이름을 60여 년 만에 다시 꺼내들었다.

전경련은 설립 당시 명칭에 ‘기업인’이 아닌 ‘경제인’이란 단어를 썼는데 ‘나라를 올바르게 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뜻의 ‘경제인’의 취지를 되살리겠다는 것으로 초심으로 돌아가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란 설명이다.

전경련은 8월 전경련 총회에서 명칭 변경을 포함해 산하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의 흡수 통합, 회장 선임 안건 등을 의결할 예정이다. 현재 전경련은 김병준 회장 직무대행 체제다. 전경련의 쇄신을 이끌기 위해 올해 2월 취임한 김 직무대행의 임기는 8월 22일 끝난다.

2011년부터 회장을 맡아 온 허창수 전 회장의 사임 이후 6개월 넘게 회장 공백 상태로 차기 회장 인선과 4대 그룹 복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추락했던 전경련이 ‘재계 맏형’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류진 풍산그룹 회장 사진=풍산그룹 제공
류진 풍산그룹 회장 사진=풍산그룹 제공
차기 수장, ‘미국통’ 류진 회장 유력

새로운 수장으로는 미국 정·재계와 두터운 친분으로 ‘미국통’으로 평가받는 류진 풍산그룹 회장이 꼽히고 있다. 전경련과 류 회장 측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재계에선 유력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미국·중국의 패권 경쟁,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법 본격화 등 글로벌 공급망 블록화와 보호무역주의·자국우선주의 확산으로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 고려된 것으로 풀이된다.

반도체·배터리·자동차·태양광 기업들이 미국 현지에 공장을 짓고 있고 현지 기업과 합작도 늘어나는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입법·규제 동향을 살피고 정치적 환경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 미국 네트워크 구축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주요 그룹이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외교·통상 부문 전직 관료와 미국 정계 인사 영입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다.

류 회장은 민주·공화당을 넘나드는 폭넓은 인맥으로 미국 정권 교체 때마다 한·미 양국 정부와 정·재계 리더들을 잇는 핵심 가교 역할을 해왔다. 류 회장은 2008년 태국에서 만찬을 열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콜린 파월 전 미국 장관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부친인 류찬우 회장 때부터 방위 사업을 해 온 인연으로 미국 정치권 고위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했고 특히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일가와는 끈끈한 인연을 자랑한다. 부시 전 대통령은 201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주기 추도식에서 류 회장을 ‘소중한 벗’으로 표현했을 정도다. 부시 전 대통령은 류 회장의 초청으로 2009년 전경련 제주 하계 포럼의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류 회장은 2001년부터 전경련 부회장단으로 활동하며 양국 관계에 기여했다. 미국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이사도 맡고 있다. 지난 4월 전경련 한미재계회의 7대 위원장에 선임돼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에 경제사절단 일원으로 동행했다.

류 회장은 한·미 관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한미우호상, 2022년 한미 친선 비영리 단체 코리아 소사이어티가 수여하는 밴플리트상을 받았다. 밴플리트상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이 역대 주요 수상자다.

류 회장은 오는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재계회의 제35차 총회에서 IRA와 반도체법 시행 등과 관련한 한국 기업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것으로 보인다.

적폐 낙인 속 5년 내내 ‘패싱’ 수모

전경련은 1961년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초대 회장 등 13명의 경제인이 일본 게이단렌을 모티브로 설립한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전신이다. 이병철 삼성 창업자를 시작으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구자경 LG 명예회장,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 등 당시 대기업 총수들이 역대 사령탑을 맡으며 정부와의 소통을 책임졌다.

경제 성장기에 재계의 의견을 대변했지만 일해재단 자금,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선 비자금 모금, 1997년 세풍사건, 2002년 불법 대선 자금 의혹 등에 연루되면서 비판도 받아 왔다.

2016년 국정농단 사태 이후 삼성·SK·현대차·LG 등 4대 그룹이 모두 전경련을 탈퇴했고 문재인 정부에서 5년 내내 적폐 취급을 받으며 입지가 급속히 쪼그라들었다.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가 각종 행사를 주도하면서 해외 순방 경제사절단, 청와대 신년회 등 주요 행사에서 번번이 제외돼 ‘전경련 패싱’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친기업을 표방한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부터 위상 회복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윤 대통령 당선 직후 국내 경제 단체 중 가장 먼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정책 제안서를 제출했고 첫 경제 단체장들과의 회동에서 전경련이 대통령과 경제 단체장들과 일정을 조율하는 연락 창구 역할을 했다.

김병준 회장 직무대행이 합류한 이후 방일·방미 경제사절단 구성과 행사를 주관하며 그간 대한상의에 내줬던 경제사절단 주도권도 되찾고 있다. 현재 대통령 해외 순방에선 두 단체가 번갈아 경제사절단을 선정하고 있다. 지난 6월 프랑스·베트남 순방 때는 대한상의가, 7월 폴란드 순방은 전경련이 경제사절단 구성과 행사를 주관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전경련회관.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전경련회관. 사진=한국경제신문
美·日 경제사절단 주관…주도권 탈환 안간힘

전경련은 무너진 위상 회복에 사활을 걸고 있다.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정책과 규제 개혁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재계의 대변인으로서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2022년 말에는 155건의 규제 개혁 과제를 발굴해 정부에 전달했다.

첨단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산업계에서 반도체·2차전지·디스플레이 등 국가 핵심 기술에 대한 유출 우려가 커지자 기술 유출 범죄의 양형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을 선제적으로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제출했다.

전경련 재건의 핵심인 4대 그룹의 복귀도 가시권에 들어섰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동안 전경련과 철저히 거리를 뒀던 주요 그룹 총수들이 최근 전경련 주관 행사에 잇따라 참석하고 있다. 전경련이 주관한 방일·방미 경제사절단에는 이재용 회장과 최태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가 모두 참석했다.

폴란드 경제사절단에는 구광모 회장과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구자은 LS그룹 회장이 참석했다. 정의선 회장은 전경련이 국민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한 행사인 ‘갓생한끼’에 참석해 MZ세대(밀레니얼+Z세대)들과 소통했다.

다만 일각에선 4대 그룹의 복귀가 아직 시기상조라는 반응도 있다. 삼성은 이재용 회장이 2016년 말 국정농단 사태 국회 청문회에서 공식 탈퇴를 선언한 뒤 옥고까지 치렀고 LG그룹은 1999년 전경련이 중재한 반도체 사업 빅딜 사건 이후 구본무 전 회장이 전경련에 발길을 끊어 다소 껄끄러운 관계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맡고 있어 재가입하더라도 2024년 3월까지인 임기를 마친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 회장은 최근 열린 대한상의 제주포럼 기자회견에서 “(대한상의와 전경련이) 경쟁 관계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며 “가능하면 시너지를 많이 내서 지금의 어려운 문제를 같이 해결하는 데 필요한 동반자로 되는 관계를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4대 그룹은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전경련을 탈퇴했지만 한경연에는 형식상 회원으로 남아 있다. 전경련이 한경연을 흡수 통합하기로 하면서 4대 그룹이 새로 출범하는 ‘한국경제인협회’로 자동 복귀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지만 재가입에는 이들 그룹의 동의가 필요하다.

재계 관계자는 “4대 그룹이 정경 유착 고리를 끊기 위해 전경련을 탈퇴한 만큼 재가입을 위해선 적절한 명분이 필요할 것”이라며 “현재로선 일부만 복귀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