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출신의 배우 제인 버킨, 에르메스의 상징이 되기까지
영국 출신의 가수 겸 배우 제인 버킨이 향년 76세로 16일(현지시간) 별세했습니다.버킨은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매출에 영향을 미친 두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미국 배우 출신의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가 '켈리백'에 영감을 줬다면, 버킨은 에르메스의 버킨백 신화를 탄생시킨 장본인입니다.
1946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버킨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1960년대입니다. 1964년 '카빙 어 스테츄(Carving a Statue)'라는 연극으로 데뷔했고, 여러 영화에도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두고 '스윙잉 런던'을 대표하는 배우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스윙잉 런던이란 1960년대 런던을 표현한 것으로, 문화·사회 등 다방면에서 역동적이며 활기찬 사회 분위기를 빗댄 용어입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처음 사용한 이후 60년대 영국 분위기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됐죠.
이렇게 유명세를 얻은 버킨이 에르메스와 만난 것은 1980년대 일입니다. 당시 에르메스의 최고경영자(CEO)는 창업자 '티에리 에르메스'의 5대손 '장 루이 뒤마'였는데, 그가 버킨과 만나면서 새로운 가방이 탄생하게 된 거죠.
1984년 뒤마는 런던에서 출발하는 파리행 에어프랑스 비행기를 탔는데, 옆자리에 제인 버킨이 있었습니다. 그때 버킨은 주로 타원형의 라탄백을 주로 들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 버킨의 사진을 보면 항상 라탄백이 함께 있습니다. 자녀를 돌볼 때도, 친구를 만날 때도 항상 라탄백을 들고 있죠. 그를 패션 아이콘으로 만든 몇가지 패션 아이템을 선정할 때 이 바구니 가방이 항상 포함될 정도니까요.
문제는 이 라탄백에는 입구를 가려줄 지퍼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뒤마와 함께 탄 비행기에서 선반에 라탄백을 올려놓다가 실수로 떨어뜨리게 됐는데, 입구가 뚫려있는 탓에 내용물이 다 쏟아졌고요. 버킨은 아기용품을 넣고 다닐 여행용 가방이 없다는 하소연을 하면서 쏟아진 것들을 주워 담았는데, 이때 뒤마에게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수납력이 좋은 가방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죠.
그렇게 탄생한 제품이 바로 아무나 살 수 없다는 '버킨백'입니다. 뒤마가 출시 직후 버킨에게 이 가방을 선물해 주면서 제품명도 '버킨백'으로 불리기 시작했고요. 에르메스와 버킨의 인연은 1984년부터 39년간 이어진 셈이죠.
버킨의 유명세를 활용한 에르메스의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버킨백은 에르메스의 스테디셀러로 등극, 켈리백과 함께 매출을 견인하는 핵심 상품이 됐습니다. 대기자가 많고, 에르메스의 구매 정책으로 돈이 있어도 쉽게 구매할 수 없어 리셀 시장에서는 2배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되기도 하고요. 에르메스가 최고급 명품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은 이 버킨백의 영향이라고 봐도 되는 거죠.
에르메스와 버킨의 사이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동물 보호에 대한 목소리가 커질 2010년에 문제가 생겼죠. 2015년 미국 동물보호 단체 '페타(PETA)'가 아프리카 짐바브웨와 미국 텍사스의 파충류 농장에 잠입해 악어 도살 영상을 촬영, 공개했기 때문입니다. 이 농장은 에르메스가 소유한 무두질(가죽 가공 공정) 공장에 가죽을 납품하는 곳이었고요. 논란이 심화하자 버킨은 에르메스 측에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고요. 에르메스가 당시 '문제가 없다'는 내용으로 여러 번 해명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됐습니다.
에르메스는 1837년 승마용품을 만들던 회사에서, 1900년대 들어서 생활용품과 여행용 가죽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됐죠. 그런 회사가 세계 최고의 명품 회사로 자리 잡은 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패션 아이콘이었던 제인 버킨의 영향일 테죠.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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