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한국의 아홉째 아메리카도에 편입됐다. 도지사 조 바이든.’
최근 2030대 사이에선 ‘초전도체 관련 밈(meme : 소셜 미디어를 타고 유행하는 사진과 동영상)’이 화제다. 고려대 출신 한국 연구진이 ‘꿈의 물질’이라고 불리는 상온·상압 초전도체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발표하면서 초전도체 관련 밈이 쏟아지고 있는 것.
진위 여부를 떠나 ‘꿈의 물질’을 한국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개발했을 수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흥분한 분위기다. 이전까지만 해도 해당 주제는 과학계의 전유물이었다. 지금은 2030대들이 적극 나서 ‘LK-99’의 성공을 응원하고 있다. 이들 중 초전도체란 다소 어려운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들은 왜 초전도체에 열광할까.과학에 대한 갈증 아카이브에 LK-99 논문이 올라온 것은 7월 22일. 한국 미디어가 LK-99을 보도한 최초 시점은 7월 27일이다. 하지만 이전부터 LK-99은 누리꾼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7월 25일 미국의 소셜 커뮤니티인 레딧에 해당 논문이 공유되면서 과학 커뮤니케이터들 사이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국 커뮤니티에도 해당 소식은 빠르게 전파됐다. 초전도체에 관심을 가진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창구가 됐다. 이들을 통해 하루 사이 과학계뿐만 아니라 주식·스포츠·패션·정치 등 한국 외 대부분의 커뮤니티에 LK-99 논문이 확산됐다.
‘초전도체가 상용화되면’, ‘실시간 초전도체 상황’ 등 초전도체를 모르는 이들조차 초전도체가 갖는 힘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전하는 ‘쉬운’ 과학 이야기가 초전도체를 모르는 이들을 끌어당겼다.
과학 커뮤니케이터는 과학과 대중을 이어 주는 매개체로, 과학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일반인들에게 과학을 쉽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2010년 전후만 하더라도 성인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저조했다. 최근 10년 사이에야 어린이와 청소년 중심의 과학계에 관심을 갖는 성인들이 늘어났다. 중심에는 유튜브가 있다. 대중성이 낮은 과학을 소재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이들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50만 구독자가 넘는 과학 채널도 생겼다. 과학 속 성인이 처음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13년 팟캐스트의 ‘과학하고 앉아 있네’란 교양 과학 프로그램이 10위권 안에 진입했을 때다. 이후 ‘어쩌다어른(tvN)’이나 ‘알쓸신잡(tvN)’과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과학을 다루면서 점차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현재 과학에 대한 관심은 책 판매량에도 나타난다. 유시민 작가가 쓴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는 교보문고에서 인문 부문 1위다. 유시민 작가의 명성만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그의 전공은 과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동안 인문학 분야의 글을 써 왔기 때문이다. 그가 과학을 소재로 쓴 첫 책이 수많은 인문학을 제치고 1위란 점은 과학 초심자들의 갈증을 보여준다.
물리학자 김상욱 경희대 교수가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도 자연·과학 부문 베스트셀러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의 원작을 제쳤다.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설립된 기초과학 공익 재단인 카오스재단의 강연도 대중에게 인기가 좋다. 올해에는 ‘상대성이론’ 강연을 진행했는데 클릭 수가 최대 51만 회다. ‘시공간과 중력의 본질은? 상대성이론’이 주제였다.
이렇게 과학에 입문하며 과학에 관심을 가진 수많은 커뮤니케이터들은 대중에게 초전도체를 쉽게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노벨상에 대한 국민적 염원도 LK-99을 응원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노벨상은 떼어 놓은 당상’, ‘입증되면 노벨상’이란 제하의 기사들은 LK-99에 대한 기대감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개 국가의 국력을 비교할 때 객관적 잣대로 노벨상 수상자 수를 제시한다. 한국은 현재까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수상한 노벨 평화상이 유일하다. 국가 순위로는 에티오피아·케냐·필리핀 등의 32개 국가와 함께 공동 51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력과 인구수를 감안할 때 한국의 노벨상 수상자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편이다.
LK-99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영화같은 스토리도 한몫했다. 진위 여부를 떠나 무려 20년의 연구다. 거기에 스승과 제자가 등장한다. 스승은 이론을 남기고 제자는 20년에 걸쳐 연구를 완성한다. 아주 낡은 연구소에서….
LK-99의 등장은 마치 영화와 같다. 상온·상압에서 초전도체 연구의 바탕을 마련해 한국 초전도 이론의 대가로 알려진 고 최동식 고려대 교수의 제자인 당시의 비전임교수 이석배 씨와 대학원생 김지훈 씨가 1999년 신물질 ‘LK-99’을 만들고 이 연구를 재개하기 위해 2008년 퀀텀에너지연구소를 설립한다. 그로부터 2023년까지 지루한 시간이 계속된다. 김지훈 연구원은 이 과정을 이같이 말했다.
“난 실험 재료를 섞고 가열하고 초전도체 특성이 안 보이면 멈췄고 보이면 계속 진행했다. 이는 매우 지루한 과정이다. 난 20년간 1000번의 실험을, 전 과정을 실험했다.”
극적인 스토리에 누리꾼들은 환호했다. 이미 ‘초전도체 각본’, ‘초전도체 등장인물’ 등이 누리꾼들에 의해 나온 상황이다.
‘이석배 분 : 저 이거 20년 만들었습니다. 이대로는 포기 못합니다.’
물론 영화의 끝은 해피엔딩일수록 좋다. 아직 진위 여부는 가려지지 않은 상황이다. 누리꾼들의 염원 또한 해피엔딩을 그리고 있다. ‘K’ 심금을 울린 스토리LK-99을 둘러싼 밈의 주제 대부분은 ‘K-위상’이다.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초전도체가 개발된다면’을 가정한 미래의 이야기는 한국이 세계 제1의 국가가 될 것이란 주장으로 비화됐다. 국가 경쟁력 강화로 세계 제1의 국가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바뀐다는 재치하에 ‘미국이 한국의 아홉째 아메리카도에 편입됐다’, ‘아메리카도지사 조 바이든’ 등과 같은 밈이 쏟아졌다.
한국이 만든 초전도체 LK-99이 기후 변화 문제를 해결한다는 밈, 꿈에 그리던 고토 수복이 가능하다는 밈, 은하가 대한민국 소유가 된다는 밈까지 나왔다. 재치있는, 하지만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는 유머에 K-누리꾼들은 열광했다. 만약 일본에서 이 같은 논문이 나왔다면 지금과 같은 관심이 있었을까. 한국이 과학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그림. 누리꾼들은 마치 국가 대항전처럼 LK-99이 태극마크를 단 듯 우리 편의 승리를 염원하고 있다. 여기에는 세상을 바꾸는 기술에 대한 희망도 있다. 최근 국내외 부정적인 이슈들이 팽배하며 혐오·증오 등의 감정이 팽배했는데 초전도체 기술이 사람들에게 기술적 진보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을 심어줬다는 분석이다. 베스트셀러 ‘비관이 만드는 공포 낙관이 만드는 희망’의 저자는 “낙관주의는 역사의 화살을 추진시키는 활과 같다”며 낙관주의적 상상력 없이 인류의 진전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누리꾼들 역시 마치 축제를 즐기듯이 LK-99에 희망 회로를 돌리고 있다.
‘돈’도 초전도체에 대한 관심을 지속할 매개다. 초전도체에 관심이 커지면서 관련주들은 상한가를 찍는다. 반도체·2차전지 등 최근 ‘짭짤’했던 주식들은 대개 과학의 ‘ㄱ’자 정도는 알아야 이해가 가능한 종목들이었다. 초전도체는 그 정점이다. 테마주가 형성된 지금 초전도체에 대한 관심은 ‘LK-99’의 진위 여부가 가려질 때까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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