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가 미국의 신용 등급을 강등하면서 제시한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의회의 분열이다. 피치는 미국 의회가 중기 재정 가이던스를 세워 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화당의 감세안, 민주당의 재정 지출 확장 정책이 더해지면서 정부 부채가 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올해 5월 24일 부채 한도 협상(미국은 법적으로 정부 부채의 한도를 정해 놓고 있고 이를 증액하기 위해서는 미 의회의 동의가 필요)으로 미국의 채무 불이행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신용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낮출 때도 피치는 미국 의회의 당파성이 부채 한도 관련 문제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둘째, 재정 적자의 확대다. 최근 미 의회는 재정 적자를 축소하기로 합의했지만 중기 재정 전망에 조금밖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내년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추가 재정 적자 축소는 더 기대하기 어렵다고 예측했다.
셋째, 정부 부채의 증가다. 미국의 정부 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12.9%로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이후 최고치인 122.3%보다 낮아졌지만 여전히 팬데믹 이전인 100.1%(2019년 기준)를 크게 웃돌고 있다. GDP 대비 정부 부채는 ‘AAA’ 등급을 받는 국가들의 중간 값인 39.3%에 비해 2배 이상 높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2025년 118.4%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충격에 미국 재정이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중기 재정의 과제다. 최근 미국의 금리가 상승하면서 국채의 이자 부담이 증가하는 반면 고령화로 재정 지출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12년 전과 다른 요인 12년 전 S&P가 미국의 신용 등급을 하향 조정했을 당시 미국의 S&P500지수는 하루 만에 6% 급락하는 등 글로벌 금융 시장의 충격은 컸다. 하지만 12년 전과 다른 요소들 때문에 미국의 신용 등급 강등에 의한 혼란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학습 효과다. 2011년에는 ‘미국 국채는 무위험 자산’, ‘달러는 기축통화’라는 전제하에 쌓아 올린 미국의 위상이 무너지면서 전 세계 금융 시장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불안이 컸다. 디폴트 우려에 하락하던 미국 주요 주가지수는 신용 등급 강등 소식이 전해진 후 하루 사이에 약 6% 급락한 점도 이런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후에도 미국 국채는 무위험 자산, 달러는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는 공고했다. 국채 10년물 금리는 하루 만에 24bp(=0.24%포인트) 급락한 이후 하락 추세가 지속됐고 달러 인덱스도 소폭 하락 후 강한 상승세가 나타났다.
이번에 신용 등급을 낮춘 피치도 기축통화로서 자금 조달의 유연성이 높다는 점을 들면서 미국의 신용 등급이 높은 이유를 설명했다. 글로벌 3대 신용 평가사 중 2개사가 ‘AA+’ 등급을 부여하면서 미국의 공식 신용 등급은 ‘AA+’로 강등됐다. 이에 따라 미 국채의 담보 가치가 하락하면서 미국 국채를 담보로 하는 거래가 청산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국채의 담보력이 낮아질 위험은 적다고 판단된다. 2011년 S&P의 미국 신용 등급 강등 이후에 금융회사들이 ‘AAA’ 등급 채권과 ‘미국 정부 보증’ 조건이 포함된 채권을 동일하게 평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둘째, 거시 경제 불안 요인이다. 2011년 초부터 곡물 가격 급등에 따른 MENA 사태(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난 민주 혁명), 동일본 대지진, 유럽 재정 위기 등의 불안 요인들이 산적했다.
이에 따라 미국 신용 등급 강등 소식에 투자 심리가 더욱 위축됐고 미국의 신용 등급 강등 소식에 급락했던 자산이 회복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 2거래일 만에 7% 이상 하락했던 코스피지수는 10월 초까지 신용 등급 강등 직전 대비 14% 하락한 후에야 반등했다. 2011년 당시에는 G20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기선행지수(CLI)도 하락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7개월 연속 반등하고 있다. 이번에도 불안 요인이 떠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높은 인플레이션을 일단 낮췄다는 성취감과 경착륙을 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높은 상황에서 2011년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셋째, 통화 정책의 여력 차이다. 2011년에는 유례없는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로 제로 금리 도입과 비전통적 통화 정책을 대규모로 시행했다. 이미 초완화적인 정책을 사용하고 있어 새로운 위험이 떠올라 경기 둔화 우려가 확대됐을 때 통화 정책으로 대응할 여력이 없다는 걱정이 컸다.
반면 2022년부터 시작된 주요국들의 긴축으로 지금은 통화 완화 정책을 적지 않게 회수해 놓은 상황이다. 미국의 신용 등급 강등 등 예상하지 못한 위험으로 경기가 둔화될 경우 여차하면 통화 완화 정책을 시행할 수 있다며 안심하는 분위기다.
넷째, 재정 정책 기조다. 2011년 8월 2일 예산관리법이 통과되면서 미국의 재정 정책은 긴축 기조로 급선회했다. 긴축 재정이 성장에 기여하지 못하면서 성장 우려가 높아졌다. 단기 관점에서 9월 말까지 다음 회계연도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을 위험은 남아 있지만 최근 통과된 재정 적자 감축안은 고강도의 긴축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투자를 촉진하려는 별개의 법안들이 재정 확장 기조를 지지하는 차이가 있다.
미국의 신용 등급 이슈로 금융 시장의 변동성은 나타날 수 있다. 다만 2011년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금융 시장의 혼란의 폭은 크지 않고 기간도 짧을 것이다. 특히 미 국채는 미국의 신용 등급 강등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의 그 초우량 안전 자산이라는 지위를 잃기는 어렵다고 판단한다. 물론 신용 등급의 하향 조정이 정부 부채의 증가라는 점은 부담 요인이지만 오히려 신용 등급 하락으로 안전 자산 선호가 높아지고 물가가 둔화되고 있어 금리는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임재균 KB증권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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