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경기 성남시 판교 HD현대 글로벌R&D센터(GRC)에서 직원들이 쿨 비즈 룩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서범세 기자
경기 성남시 판교 HD현대 글로벌R&D센터(GRC)에서 직원들이 쿨 비즈 룩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서범세 기자
낮기온이 최고 섭씨 영상 36도까지 치솟는 불볕더위가 이어지면서 직장인들의 출근 룩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자율 복장 제도를 도입해 반바지와 샌들을 허용하는 기업들이 늘면서 반바지 차림의 ‘쿨 비즈 룩’이 일상적인 출근길 패션으로 자리 잡았다.

자율 복장 제도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과 조직 내 MZ세대(밀레니얼+Z세대) 비율이 높아지면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기업들은 창의적이고 개성을 존중하는 근무 환경 조성을 통해 유연한 조직 문화를 만들기 위해 자율 복장 제도 도입에 적극적이다.

유연하고 창의적인 조직 문화가 직원들의 만족도와 업무 몰입감을 높여 궁극적으로 생산성 향상까지 가져오기 때문이다. 폭염에 넥타이와 정장 차림은 덥고 불편한 데다 업무 능률까지 떨어뜨린다.

여름에 넥타이를 매면 답답할 뿐만 아니라 목의 혈류 속도가 감소하고 뇌혈관의 압력이 상승해 두뇌 회전을 방해한다. 쿨 비즈 룩은 에너지 절약에도 도움이 된다. 재킷을 벗고 넥타이만 풀어도 체감 온도가 2도 정도 내려가는 효과가 있다. 반소매와 반바지를 입으면 체감 온도를 더 낮출 수 있다. 쿨 비즈 룩으로 냉방 온도를 약 2도 높이면 여름철 전력 사용량도 줄일 수 있다.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출근길 시민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출근길 시민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5대 그룹, 모두 넥타이 풀었다

삼성·SK·현대차·LG·롯데 등 주요 그룹에선 수년 전부터 반바지를 허용했고 최근에는 임원까지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추세다. 2008년 비즈니스 캐주얼을 기본으로 한 자율 복장을 도입한 삼성전자는 2016년 ‘컬처 혁신’을 선언한 이후 반바지도 허용하고 있다. SK그룹은 2000년부터 자율 복장을 시행했고 2012년 SK하이닉스를 시작으로 반바지를 입을 수 있게 했다.

현대차그룹과 LG그룹은 젊은 총수로 바뀌면서 자율 복장 문화가 시작됐다. 현대차그룹은 정의선 회장이 수석부회장이던 시절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보다 더 ICT 기업답게 변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2019년부터 근무 복장을 완전 자율화했다. 양재동 사옥에선 이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현대차 직원들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제도가 정착됐다.

LG그룹도 구광모 회장 취임 이후 기존의 관습을 깬 실용주의를 앞세운 빠른 실행력을 강조하는 조직 문화를 강조하면서 2018년 LG전자를 시작으로 현재 전 계열사가 복장 자율화를 시행하고 있다. 2021년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근무하며 스마트하고 유연하게 업무에 몰입하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취지로 반바지까지 허용하는 완전 자율 복장 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는 반바지와 티셔츠, 운동화 차림의 직원들로 실리콘밸리의 자유롭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LG 계열사 한 직원은 “복장 자율화로 상황과 날씨에 맞는 옷을 입을 수 있어 업무 효율이 올라가고 허례허식도 적어지니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든다”고 말했다.
HD현대 글로벌R&D센터(GRC) 휴게 공간에서 직원들이 쿨 비즈 룩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서범세 기자
HD현대 글로벌R&D센터(GRC) 휴게 공간에서 직원들이 쿨 비즈 룩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서범세 기자
HD현대 “반바지·샌들 출근도 OK”

그동안 상대적으로 복장 규정이 보수적이었던 중후장대 기업들도 복장 자율화에 동참하고 있다. HD현대그룹은 올해 6월부터 경기 성남시 글로벌 R&D센터(GRC)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쿨 비즈 자율 복장 제도를 시행 중이다.

HD현대는 기존의 중공업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그룹명과 계열사 사명을 바꾸고 판교 시대를 맞아 직원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젊고 역동적인 조직 문화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정기선 HD현대 사장은 미래 경쟁력의 원천인 우수 인재 유치를 강조하며 기업 문화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2022년 창립 50주년 비전 선포식에서 “새로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업 문화가 필요하다”며 “정말 ‘일하고 싶은 회사,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회사’가 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HD현대는 사내 공지를 통해 쿨 비즈 가이드라인도 제시했다. 반바지도 허용되며 ‘시간·장소·상황(TPO)’을 고려해 달라고 권고했다. 정장을 입어도 무방하지만 레깅스·트레이닝복·잠옷·노출이 심한 복장 등 여러 사람이 근무하는 공간에 적합하지 않은 복장은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HD현대는 유연하고 창의적인 근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중 복장 규정을 완화한 것이 유연한 조직 문화를 형성하는 데 한몫했다는 후문이다.

5월에는 삼성물산 패션부문과 함께 임직원이 모델로 참가하는 패션쇼와 비즈니스 룩 강의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 정기선 사장도 후드티를 입고 참석했다. 7월에는 쿨 비즈 룩 시행 한 달을 맞아 자신의 출근 룩을 찍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공유하는 ‘내가 GRC 패피’라는 행사도 진행했다.

직원들의 옷차림 참고 모델이 되는 임원들의 복장 규정도 대폭 완화했다. HD현대 건설기계부문 3사(HD현대사이트솔루션·HD현대건설기계·HD현대인프라코어)에선 매주 금요일을 ‘뉴진스 데이(New Jeans Day)’로 정해 임원들도 청바지·운동화 등 캐주얼 복장을 착용할 수 있게 했다.
사진=서범세 기자
사진=서범세 기자
쿨 비즈 자율복장 도입 두 달…직원들 ‘만족도 UP’

8월 7일 찾은 GRC에는 반바지·티셔츠·운동화 차림의 쿨 비즈 룩을 입은 직원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HD현대의 MZ세대 직원들에게 쿨 비즈 시행 두 달간의 변화에 대해 물었다.

문준식 HD한국조선해양 책임매니저는 “매일 반바지를 입고 시원하게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하절기가 아닐 때는 넥타이까지 착용해야 할 만큼 보수적인 분위기가 있었는데 노타이·반소매 와이셔츠, 자율 복장, 반바지가 단계적으로 도입되면서 업무 능률이 오르는 것 같고 회사에 대한 만족도도 올라갔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어떤 옷을 입을지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승원 HD현대일렉트릭 책임매니저는 “정장이든 캐주얼이든 기존에 갖고 있던 옷들을 폭넓게 출근 룩으로 활용할 수 있게 돼 개인적으로는 옷을 사는 데 쓰던 비용을 줄일 수 있어 좋았다”며 “개인의 선택과 개성을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긍정적인 변화라고 본다”고 말했다.

업무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는 반응도 있었다. 한두희 HD현대코스모 선임매니저는 “코로나19 엔데믹(주기적 유행) 이후 사내 동호회 활동도 다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축구 등 스포츠 동호회나 모임이 있는 날엔 출근할 때부터 편하게 입고 올 수 있게 됐다”며 “편한 복장으로 사내 동호회에 열심히 참여할 수 있게 돼 결과적으로 동료 간 소통도 더 잘되는 것 같다”고 했다.

김성엽 HD한국조선해양 매니저는 “사실 기존의 복장 규정에 큰 불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면서도 “쿨 비즈 제도로 주변에 반바지를 편하게 입는 동료들이 늘면서 복장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회사가 주도적으로 유연한 기업 문화 조성에 힘쓰는 게 느껴져 애사심이 샘솟고 있다”고 밝혔다.

산뜻한 옷차림에 효율도 쑥쑥…“과하면 독”

자율 복장이더라도 기업마다 허용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복장이 적합한지 판단하기가 쉽지는 않다. 적절한 길이와 핏에 대해서도 직장인들의 생각이 각기 다르다. 이 때문에 여름철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적절한 옷차림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반바지를 입고 출근했다가 상사로부터 핀잔을 들었다거나 노출이 심한 동료의 옷차림에 불편을 겪었다는 내용이 단골 소재다.

GRC에서 만난 직장인들은 “아무래도 회사에서 바캉스 룩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며 “고객을 만나거나 경영진이 참석하는 회의에서는 정장이 필요할 때도 있어 TPO에 맞는 옷차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고 입을 모았다.

그동안 여름에도 맨발이 훤히 보이는 샌들은 비즈니스 매너에 어긋난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올여름 장기간 이어진 집중 호우와 높은 습도로 남성 직장인들 사이에선 샌들이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문 책임매니저는 “비오는 날은 출근하면서 신발이 다 젖기 때문에 샌들이 훨씬 편하다”며 “회사가 복장 가이드라인을 세세하게 정해 주지 않아도 상황에 따라 합리적으로 가능한 옷차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으면 한다”고 말했다.

퍼스널 이미지 브랜딩 전문가인 박영실 퍼스널이미지브랜딩랩 & PSPA 대표는 “너무 캐주얼하거나 부적절한 디자인의 옷은 동료들과의 협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옷의 상태는 항상 청결을 유지하고 회사의 복장 규정을 준수해야 하며 반바지와 스커트를 입을 때는 적절한 길이와 핏을 선택해 과하게 입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회사와 부서별로 조직 문화가 다르고 쿨 비즈 자율 복장에 대한 개념도 다양한 만큼 복장 규정이 모호하면 예기치 못한 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다.

박 대표는 “회사의 조직 문화와 직무에 맞는 구체적인 쿨 비즈 룩 매뉴얼을 제작하고 그것을 토대로 전 직원 대상의 ‘쿨 비즈 드레스 매너’ 교육을 통해 회사와 부서에 따라 허용할 수 있는 자율 복장 룩북을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