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전기차 방전되나]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테슬라의 자체 충전소. 사진=한국경제 DB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테슬라의 자체 충전소. 사진=한국경제 DB
“아직 전기차는 시기상조야. 차라리 하이브리드를 사.”

도로에서 전기차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자동차 구매자가 된다면 이야기는 또 다르다. 초보 운전자 A 씨는 최근 전기차 구매를 알아보다가 주변 지인들에게 이와 같은 조언을 수없이 들었다. 전기차가 대세는 맞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란 의견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중화의 거리가 멀어 보였던 전기차는 이제 자동차 제조사별로 전기차를 선보일 정도로 확대되고 있다. 현재 중국은 2035년까지 순수 전기차 50%의 판매 비율, 미국은 2030년까지 신차 판매의 50% 전동화 목표, 유럽은 2035년까지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를 발표한 상황이다.

하지만 늘어난 공급에 비해 최근의 수요는 지지부진하다. 글로벌 시장에서 2021년 115.5%였던 전기차 판매 증가율은 지난해 61.2%로 급감한 데 이어 올해는 50%대 아래를 기록했다. 특히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으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판매 감소세가 뚜렷하다. 잘나가던 전기차를 멈춰 세운 걸림돌은 무엇일까.① 가격 : 보조금 삭감과 반값 전기차4430만원. 한국 시판 전기차, 그중에서 경차 ‘2023 쉐보레 볼트 EV’의 가격이다. 일반 경차 값이 1000만원대인 점과 비교하면 전기차의 높은 가격대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가격은 전기차 구매 수요를 막는 가장 큰 장벽이다. ‘좋기는 한데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올해 테슬라와 포드의 급격한 가격 인하에도 불구하고 전기차를 구입하려면 여전히 평균적으로 내연기관차에 비해 웃돈을 지불해야 한다. 미국 자동차 전문 평가 기관인 켈리블루북에 따르면 7월의 평균 전기차 가격은 5만3469달러(약 7138만원)로, 전체 차량의 평균 가격인 4만8334달러(약 6453만원)에 비해 크게 높았다.

그동안 세계 각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조금 정책을 활용했다. 비용을 지원하면 전기차 수요가 늘 것이란 판단이었다. 정책은 적중했다. 전기차 시장의 몸집이 급격하게 커졌다. 한국은 최대 2000만원에 달하는 국가 보조금을 지원했다. 적극적인 보조금 정책 추진으로 한국 전기차의 비율은 2022년 기준 9.9%다. 세계 시장에서도 전기차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 시장 규모는 1000만 대, 전체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4%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전기차 수요층이 예상을 뛰어넘으면서 국가 보조금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올해 2월 정부는 직영 정비센터 등이 없는 제조사의 전기차 보조금을 최대 20% 삭감했다.

다른 나라는 더 강경하다. 중국은 2009년부터 소비자 진작을 위해 펼쳐 온 전기차 구매 보조금을 올해 초 전면 폐지했다. 유럽 최대 자동차 시장 중 하나인 독일 또한 올해 전기차 보조금 상한선을 6000유로에서 4500유로로 1500유로(25%) 삭감했다. 내년부터는 보조금 상한액을 3000유로로 더 줄일 계획이다.

보조금이 줄어드는 마당에 ‘반값 전기차’ 전망은 소비를 더욱 요원하게 만든다. 전기차 비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차량 탑재용 리튬 이온 전지의 가격 하락이 빨라지고 있고 이런 사실이 최근 달아오르는 전기차 업체들 사이의 경쟁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2020년 3만 달러(약 4000만원) 미만의 ‘반값’ 전기차를 3년 내에 내놓겠다고 공언했다. 업계에서는 테슬라의 신차 공개가 임박했다고 추정한다. 독일 폭스바겐은 최근 전기차(EV) 콘셉트카인 ‘ID.2all’을 공개하고 가격이 2만5000유로(약 3300만원) 미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 단계 상위 모델인 ID.3보다 1만 유로 이상 저렴하다. 양산 시점은 2025년이다. 토마스 셰퍼 폭스바겐 CEO는 “대중에게 전기차 접근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야흐로 전기차 가격 경쟁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전기차와 내연기관차의 가격이 비슷한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기를 2025년으로 예상했다. 그러다 보니 보조금 삭감 시기가 지나치게 일렀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값 전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보조금도 삭감된 이 시기에 자동차를 구매할 리 만무하다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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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공급과잉 : 살 사람은 다 샀다“자동차 기업은 규모의 불경제에 빠졌다.” 세계 최대의 비영리 국제 모빌리티 컨소시엄인 모비의 공동 창업자 크리스 밸린저는 저서 ‘모빌리티 이코노믹스’에서 “세계 자동차 산업의 대량 생산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규모의 불경제는 일정 생산 수량을 넘으면 생산 규모를 늘릴수록 오히려 수익성이 악화돼 이익 감소에 빠지는 상황을 말한다. 그는 “자동차 생산 능력은 세계적으로 과잉 상태이기 때문에 수요가 감퇴하고 있는 중에도 가격을 인하해 공장 가동을 끌어올리려는 제조사가 늘어날 것이고 이는 곧 규모의 불경제를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이제 막 대중화의 초입에 들어선 전기차 시장도 과잉 생산의 덫에 빠졌다. 앞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 전기차 시장점유율이 7∼12%에 이를 것으로 2021년 예측했지만 이미 14%를 넘겼다. 그러자 올해 35%로 상향 조정했다.

과잉의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의해 자국산 전기차에 큰 혜택을 주고 있지만 소비 진작에는 실패했다. 올해 2분기 기준 미국 전기차 재고는 9만2000대로 전년 동기에 비해 4배 수준으로 급증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342% 폭등한 수치다. IRA법에 따라 자국산 전기차에 약 1000만원의 구매 세액 공제 혜택을 지급하지만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는 의미다. 미국 자동차 시장 조사 기관인 콕스오토모티브는 “소비자들이 전기차를 구매하는 것보다 신차가 더 빠르게 출시됨에 따라 재고 수준이 미국 곳곳에서 급증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문제는 수요를 넘어선 공급이다. 콕스오토모티브에 따르면 올해에만 33종류의 전기차가 미국에서 출시될 것으로 예측됐다. 내년에는 신형 또는 업데이트된 전기차가 50종류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이미 출혈 전쟁이다. 올해부터 중국 정부가 전기차 보조금 제도를 전면 폐지하자 전기차 제조사들은 제살 깎아 먹기식 마케팅으로 소비자를 유인하고 있다. 지난 7월 6일 BYD·테슬라 등 현지 16개 전기차 회사가 ‘시장 질서 수호를 위한 서약서’에 서명하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가격 할인 경쟁을 자제하자는 일종의 신사 협정이지만 ‘반독점법에 위배된다’는 지적에 이틀만에 무효 처리됐다. 가격 경쟁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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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인프라 : 부익부빈익빈‘주행거리불안증(레인지 앵자이어티: range anxiety)’ 전기차를 몰면서 배터리가 방전될까 걱정하느라 발생한 정신적 피로와 스트레스를 표현한 단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다가 멈추지 않을까 충전에 대한 조급함과 불안감에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지만 공급에 비하면 충전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콕스오토모티브의 소비자 설문 조사에서 전기차 구매 고려자들이 가격 다음으로 가장 크게 우려하는 점은 충전소 접근성 부족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배터리 주행 거리가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충전소는 여전히 모자란다는 것이다. 이들은 2030년까지 충전기 대 자동차 비율 7 대 1을 달성하려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충전기 수의 2.5배를 전국에 설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리적 불균형도 큰 문제다. 미국 전체 공공 충전 인프라의 거의 30%가 캘리포니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신규 전기차의 시장점유율도 충전 인프라가 자리한 캘리포니아에서 훨씬 높게 나타났다. 업계 관계자는 “충전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고 운영되는지 확인하는 것이 향후 전기차 판매 성장을 뒷받침하는 데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상황도 비슷하다. 몇 년 전만 해도 주차 공간이 부족한 상황에도 전기차의 자리는 남아 있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불과 1년 새 전기차가 2배 증가한 45만여 대를 기록했지만 전기차 충전기 누적 보급 대수는 지난해 말 기준 19만4000기에 그치고 있다. 이 중 급속 충전기는 2만1000기(10.6%)로, 완속 충전기가 대부분(17만3000기·89.4%)을 차지한다. 급속 충전기 1기당 전기차 대수는 전국 평균 18.9대다.

한국 도심 지역에 기계식 주차장이 많다는 점도 전기차를 고민하게 하는 요소다. 기계식 주차장에는 배터리 무게 때문에 전기차 주차가 사실상 불가하다. 직장인 C 씨는 “먼 거리에 있는 공용 주차장을 이용해야 해서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말했다.

배터리 자체의 기술적 한계도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기차는 겨울에 최대 60%나 평균 주행 거리가 짧아지고 여름에는 33%가 줄어든다는 보고가 있다. 사계절 한국에서 전기차의 유지 관리가 매우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충전 시간도 여전히 문제다. 만에 하나 차가 고속도로에 멈춰 섰다면 기존 액체 연료의 경우 보험회사에 전화 한 통으로 연료를 채울 수 있지만 전기차는 연료를 쉽게 운반할 수 없다. 여전히 부단한 연구·개발이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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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안전 : 메이드 인 차이나의 한계‘달리던 테슬라 전기차 화재’,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기차 화재로 전소’, ‘충전 중이던 전기차에서 불 나 전소’….

소비자들을 멈칫하게 만드는 마지막 장벽은 안전이다. 올해에만 전기차 전소 소식이 여러 건이다 보니 소비자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최근 내연기관차를 계약한 B 씨는 “급발진 이슈에 화재까지 아무리 안전을 강조해도 내가 걸리면 100% 사망이라고 생각하니 전기차 구매를 꺼리게 된다”고 말했다.

실상 화재에는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보다 확률적으로는 더 안전하다. 지난해 12월 기준 전국에 등록된 내연기관차(휘발유·경유·LPG)는 총 2373만2076대인데 내연기관차 화재는 총 4512건 벌어졌다. 화재 비율은 0.019%다. 반면 전기차는 총 38만9855대가 등록됐고 지난해 발생한 화재(44건) 비율은 0.011%다. 미국에서도 자동차 10만 대당 화재 비율을 보면 오히려 하이브리드가 3.47%로 가장 높았다. 이어 내연기관차(1.53%), 전기차(0.025%) 순서다.

숫자의 진실과 달리 ‘전기차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팽배한 것은 전기차에 불이 붙으면 진화에 큰 어려움이 있어 치명률이 높고 사고 현장도 상당히 끔찍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남는다는 점이다. 전기차 배터리는 충격을 받았을 때 온도가 순식간에 고온으로 치솟으면서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이른바 ‘배터리 열폭주’가 발생한다. 하지만 배터리가 철제로 덮여 있어 일반 소화제가 침투하지 못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진화에 어려움을 겪는다. 현재로선 차를 통째로 거대한 수조에 집어넣는 방식(침수법)으로 배터리 열을 식히면서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는 방법이 최선이다.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불신도 제조사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특히 한국에서는 ‘메이드 인 차이나’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 때문에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다. 전기차 1위 업체인 테슬라조차 중국산 배터리를 달고 있다. 테슬라는 중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모델Y를 판매 중이다. 중국 상하이 공장에서 만든 이 차량에는 세계 1위 배터리 업체인 CATL이 공급한 리튬인산철(LFP) 배터리가 탑재됐다. 현대차·기아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사전 계약을 시작한 ‘더 뉴 기아 레이 EV’에도 CATL의 LFP 배터리가 탑재됐다. LFP 배터리의 가장 큰 장점은 싼 가격이다. 철과 인산 등 값싼 금속을 사용해 NCM 배터리보다 30~40% 정도 저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의 강자는 CATL(1위)과 BYD(2위)의 나라 중국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의 다양한 라인업이 소비자의 선택권을 넓힐 것”이라면서도 “중국산 배터리 탑재에 대한 불안감을 충분히 불식해야 하는 숙제도 안고 있다”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