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동아시아 외환 위기,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 2012년 남유럽발 재정 위기, 최근의 미·중 분쟁과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 등 다수 경제 위기에서 중국은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받았고 글로벌 금융 위기 극복 과정에서 중국은 소방수 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서구 자본주의보다 중국식 경제 체제가 우월하다는 점을 중국이 내세우기도 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와 달리 중국은 공산당(CCP)이 집권하는 국가이고 당이 주도해 과거 중국 경제 위기를 극복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크더라도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가능하다. 하지만 과거의 성공 사례는 주로 대외적 충격으로 인한 위기에 대응하는 것이었지만 현재 위기의 원인은 국내 문제에 기인하고 있어 과거의 위기와 성격이 다르다.
지난 6월 중국 연구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싱크탱크 메르카토르중국학연구소(MERICS·메릭스)가 ‘흔들리는 중국(Shaky China)’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국의 초강력 견제에 부채 누적(가계·기업·지방 정부), 과잉 투자(부동산·인프라), 인구 감소 등으로 구조적 문제로 중국 경제 위기를 예상하는 보고서가 많았다. 하지만 메릭스 보고서는 중국 정치·경제적 문제점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향후 중국의 모습을 5가지 시나리오로 정리해 주목받았다.
기본 시나리오는 현재의 불안한 상황이 앞으로도 지속되는 것이고 둘째 대치 시나리오는 대만 위기가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고 중국이 서구 사회와 단절(디커플링)되는 상황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중국몽’이 실현돼 중국이 세계 패권을 차지하는 것이 셋째 시나리오(중국 우위)이고 미국 주도 동맹국들이 중국을 견제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 넷째 시나리오(미국 우위)다. 마지막 시나리오는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중국이 덩샤오핑 전 주석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복귀해 국제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지만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으로 평가됐다.
이들 5개 시나리오 중 어느 것도 완벽하게 실현되기는 어렵고 시진핑 정부의 국정 장악력 수준과 중국의 사회·경제적 불안(스트레스) 수준에 따라 시나리오별 실현 가능성이 달라질 것으로 메릭스 연구진은 판단했다. 사회·경제적 불안 수준이 높아지게 되면 대치 시나리오와 미국 우위 시나리오가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봤다. 즉 중국 내에서 정치·경제적 불안이 커질수록 중국 당국은 국민의 불만을 외부로 관심을 돌리는 전략을 추구할 것이란 점이다. 많은 중국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바다.
지난 30여 년간 중국은 세계 경제 성장의 견인차였다. 중간재와 에너지·자원을 대거 수입함에 따라 한국은 물론이고 자원 부국들은 경제 성장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세계인들은 넘쳐나는 값싼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으로 생활비를 줄일 수 있었다. 중국 경제의 향방은 세계 경제와 인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중국과의 공급망이 약화되면서 다수 아시아 국가들은 이미 경기 침체 국면을 맞고 있다.
메릭스 보고서는 향후 중국의 진로는 국내 문제에 대해 중국 지도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무엇보다 중국은 경제난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금년 초만 하더라도 중국 당국은 6%대 성장이 무난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다수 국제 금융 기관들은 최근 성장 전망치를 4%대로 낮췄다. 인플레이션 압력에 시달리는 다른 국가와 달리 중국은 물가가 떨어지는 디플레이션 조짐이 커지고 있어 경제 위기 우려를 키우고 있다.
각종 경기 전망 지표가 악화되는 가운데 성장률 인하와 디플레이션은 중국 경제가 장기 불황에 접어들었다는 해석의 근거가 된다. 과거와 달리 과도한 부채와 과잉 투자로 중국 당국이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다. 불황이 깊어지면 미국과의 ‘강 대 강’ 구도를 강화할 것이고 이는 경기 침체를 장기화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중국이 되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인교 전략물자관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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