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 / 사진=연합뉴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 / 사진=연합뉴스
돈을 빌리면 이자를 물어야 한다. 그런데 이자가 없는 나라가 있다. 일본이다. 2016년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도입한 이후 일본은 7년째 단기 금리를 마이너스로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주요국 가운데 유일하게 장기와 단기 두 가지 기준금리를 운영한다. 단기 기준금리는 마이너스 0.1%, 장기 기준금리는 0±0.5%로 둘 다 0%이거나 마이너스다. 한국의 기준금리는 3.5%로 일본보다 3.6%포인트 높다.

이 차이는 엄청나다. 서울 강남과 같은 부동산 규제 지역은 담보인정비율(LTV)이 50%여서 집값의 절반까지만 돈을 빌려준다. 총부채상환비율(DTI)까지 감안하면 빌릴 수 있는 돈은 더 줄어들 수 있다. 그러고도 현재 금리는 연 4%대다.

일본은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면 집값의 100%를 빌릴 수 있다. 그러고도 30년짜리 대출을 연 0.5%의 금리에 빌릴 수 있다. 똑같이 5억원을 빌렸을 때 한국인이 월 185만원(이자율 연 4.5%)의 이자를 물어야 하는 반면 일본인은 월 20만원에 내 집 마련이 가능한 셈이다.

그래서 일본 미디어들은 종종 일본 사회를 ‘금리가 없는 세계’라고 표현한다. 금리가 없는 세계 일본이 7월 28일부터 다시 ‘금리가 있는 세계’로 돌아갔다. 일본은행은 7월 28일 금융 정책 결정 회의를 열고 단기 금리를 연 마이너스 0.1%, 장기 금리는 0% ± 연 0.5%로 유지하면서도 “장·단기 금리 조작(YCC) 정책을 보다 유연하게 운영한다”고 결정했다. 이를 위해 가격 지정 공개 시장 운영의 실시 기준을 0.5%에서 1.0%로 상향 조정했다.집 살 돈을 100%까지 빌려주는 일본

이날 결정의 핵심은 ‘하면서도’라고 본다. 기준금리를 유지하기는 하는데 유연하게 운영한다는 알쏭달쏭한 표현이다. 지금까지 일본은행은 장기 금리의 기준인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변동 폭 상한(0.5%)을 넘어서면 0.5%의 금리에 국채를 무제한 사들였다.

장기 금리를 0.5%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국채 매수 수요, 즉 싹을 자르기 위해서였다. 이를 가격 지정 공개 시장 운영이라고 한다. 앞으로는 장기 금리가 급변동하지 않는 한 1%까지 오르더라도 공개 시장 운영을 실시하지 않겠다는 게 이날 결정의 요지다.

장기 기준금리는 0%지만 ±0.5%까지는 허용한다. 여기에 다시 1%까지 오르는 것은 놓아 둔다면 일본의 장기 기준금리는 0%일까, 0.5%일까, 아니면 1%일까. 또 0±0.5%는 유지하지만 가격 지정 공개 시장 운영의 실시 기준을 0.5%에서 1.0%로 상향 조정한 것은 금리를 올린 것일까, 올리지 않은 것일까.

일본은행의 이번 결정은 주요국 가운데 마지막까지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을 고수하던 일본이 출구 전략을 시작한 것으로 봐야 할까, 아닐까.

기준금리를 동결하지만 기준금리가 오르는 것은 허용한다는 모순적인 결정은 금융 시장 관계자들에게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일단 외신들은 일본은행의 이날 결정애 대해 ‘출구 전략에 시동을 걸었다’고 평가했다.

블룸버그는 일본은행의 모호한 결정을 ‘매파적 수정(hawkish tweak)’이라고 평가하고 ‘긴축 정책을 거부하던 마지막 주요 중앙은행이 마침내 항복했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고 전했다. 표면적으로는 장·단기 기준금리 등 대규모 금융 정책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사실상 장기 금리를 0.5%에서 1%로 인상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장기 금리는 8월 29일 0.660%로 9년 7개월 만에 최고치까지 올랐다.

일본은행이 대규모 금융 완화를 유지하는 모양새를 유지하면서도 사실상의 출구 전략에 나선 것은 경기를 부양하면서 물가도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고육책이다. 이날 일본은행은 올해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을 2.5%로 예상했다. 지난 4월 예상치(1.8%)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세계적 금리 인상에 출구 전략 찾기 시작?

7월 물가 상승률은 3.1%로 16개월 연속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목표치인 2%를 웃돌았다. ‘물가 상승은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대규모 금융 완화를 계속해야 한다’는 일본은행의 기존 논리가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과 유럽연합(EU) 중앙은행처럼 물가를 잡겠다며 금리를 올릴 수도 없는 게 일본은행의 고민이다. 일본 경제가 여전히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기대만큼 성장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이 10년 만에 출구 전략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 영향은 엄청나다. 당장 일본인의 소비와 일본 기업의 설비 투자 등 일본 실물 경제에 변화가 예상된다. 전 세계 금융 시장에 끼칠 파급력 또한 이에 못지않다. 올해 2분기 동안에만 18% 급등한 일본 증시(닛케이225지수)에 투자를 검토하는 한국 투자가들에게 영향을 미칠 결정이기도 하다.

일본의 금리 상승은 엔화 가치와 일본 주식뿐만 아니라 전 세계 채권 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투자 자금의 움직임이 급변할 것으로 보인다. 금리가 사실상 ‘제로(0)’인 엔화를 빌려 미국 등 금리가 높은 국가의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급격히 청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이가 확대되고 엔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일본은 자국의 부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부의 유출을 겪었다. 2022년 1월까지 미국의 기준금리는 0.25%였다. 일본과의 차이는 0.35%포인트였다. 작년 3월부터 미국 중앙은행(Fed)이 인플레인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5.5%까지 끌어올리면서 미·일 금리 차는 순식간에 5.6%포인트까지 벌어졌다.

그 결과 작년 3분기에만 연율 환산 19조7284억 엔의 부가 해외로 빠져나간 것으로 추산된다. 1994년 이후 최대 규모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일본 투자가가 들고 있는 해외 주식과 채권은 531조 엔어치에 달한다.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2.5배에 달하는 규모다. 지난 10년간 해외로 빠져나간 부, 즉 해외 증권 투자 규모는 70% 급증했다.

해외 투자가 늘어나면서 일본인 투자가들은 주요국 채권 시장의 큰손이 됐다. 아일랜드 채권 시장의 15%, 호주 채권 시장의 12%를 일본인 투자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채권 시장점유율도 5%에 달한다.

세계 금융 당국은 이미 엔 캐리 청산으로 일본인들의 자금이 귀환할 리스크를 경고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4월 발표한 국제 금융 안정 보고서에서 “일본은행이 금융 완화를 조정하면 호주·EU·미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이 자금 유출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행의 결정이 있었던 7월 28일 세계 채권 시장이 크게 요동친 이유다. 이날 호주 10년물 국채 금리는 일시적으로 0.55%, 필리핀은 0.1%, 말레이시아는 0.035% 상승했다. 금리가 올라 미국·EU와의 금리 차가 줄어들면 엔저가 엔고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진다. 일본 여행을 준비하는 관광객으로선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기업 실적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미즈호리서치&테크놀로지는 장기 금리가 0.5%포인트 오르면 늘어나는 이자 부담 때문에 일본 기업의 영업이익이 2.4%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자 부담이 큰 운수·우편업과 부동산업의 영업이익은 4~5%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연구소는 “장기 금리가 1% 오르면 기업의 수익이 5% 줄고 일본의 GDP도 0.3% 감소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금리가 올라 유동성이 줄어들고 기업 실적이 악화되면 주식 시장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데 신고 닛세이기초연구소 수석 주식 전략가는 “장기 금리가 1%까지 오르면 닛케이225지수 상장 종목의 주가수익률(PER)이 1배 정도 낮아진다”고 분석했다. 지수로 환산하면 닛케이지수를 2000포인트 정도 끌어내릴 것으로 보인다. 이데 수석은 “엔화 가치가 상승해 기업의 실적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깨지면 닛케이지수 3만 선이 무너질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