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연의 다시, 연결]
“이별 후 공허함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안주연의 다시, 연결]
이게 고민거리가 되는지 한참 고민하다가 그래도 이런 분들이 의외로 많지 않을까 싶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연락드립니다. 저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이제 2년 차가 된 20대 아현(가명)입니다.

저는 최근 이별했습니다. 대학생이 된 이후 직장인이 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구여서 받아들이기가 많이 어려웠습니다. 최근까지도 눈물로 지새우다가 이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 용기 내 사연을 쓰게 됐습니다. 이별 후 내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아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도 자진해 맡았고 매일 오후 11시까지 야근도 종종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생각이 납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요.

언제쯤 괜찮아질지 마음이 많이 힘듭니다. 남들이 들으면 당황할 수도 있는데 더 큰 자극을 받으려고 이사도 할 정도로 제게는 심각한 일입니다. 앞으로도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 계속 이런 일이 있을 텐데 그게 너무 두렵기도 해요. 슬퍼할 시간도 없이 일상에 뛰어드는 것도 사실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아현(가명) 님, 반갑습니다.

“이게 고민거리가 될지 고민하다가 이런 분들이 의외로 많지 않을까 싶어” 사연을 보낸다고 하셨는데, 이 대목에서 아현 님의 솔직한 성격과 문제 해결의 자세가 느껴졌습니다. 맞아요. 우리는 직장 생활 외의 삶에서도 많은 사건과 도전을 만나게 됩니다. 가족과의 갈등, 배우자나 연인 관계에서의 결별이나 어려움, 건강의 위기, 재정적 어려움과 같은 스트레스들이 우리의 일상을 흔들고 업무에 전념하기 어렵게 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개인적 삶의 고난과 업무 수행의 균형을 잡아 갈지는 직장인들의 중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아현 님은 공허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신의 지나간 연애 정리와 현재의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적어 주셨어요. 일도 열심히 하고 고민도 주변에 나누고 재회도 시도해 보고 운동도 하고 집도 꾸밉니다. 굉장한 분입니다. 진심으로요.

헤어진 연인과의 관계가 아현 님의 지금까지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큰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큰 스트레스에는 당연히 긴 회복 기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삶의 스트레스의 원인을 ‘큰 변화’와 ‘상실’ 등 두 가지로 나눕니다. ‘큰 변화’는 앞서 드렸던 예시들입니다. 당사자가 반기는 일이든 피하고 싶던 일이든 당분간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시행착오를 해야 하는 상황들입니다. 한동안 직장과 생활 변화 적응 등 양쪽에서 업무량과 기대 수준을 낮추고 두 가지를 병행하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큰 변화여도 6개월 안에는 평소 페이스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직장 생활에 지장이 있다고 해도 차차 괜찮아질 것을 알기에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쉽습니다.

‘상실’은 좀 더 어려운 문제입니다. 가족·연인·친구·반려동물 등 친밀한 존재와의 사별이나 결별은 돌이키기 어려울 때가 많고 감정적으로 큰 타격을 줍니다. 당사자는 소중하던 관계가 깨졌다는 충격·슬픔·외로움·절망감과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 등을 동시에 혹은 순차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를 관계에 대한 ‘애도 반응’이라고 합니다. 다수에서는 약한 우울증처럼 2개월 정도 지속되고 서서히 나아진다고 하지만 사람에 따라 더 깊은 우울감을 더 오래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애도 과정을 일을 하면서 겪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현 님이 “이별 후 내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도 맡고 자진해 야근도 하고” 심지어 이사와 인테리어까지 새로 한 심정이 이해도 가고 한편 안타까웠어요. 일상을 계속하려는 노력은 중요하지만 이런 방식의 아픔 잊기는 세탁해야 할 옷이 차 있는 옷장에 새 옷을 밀어 넣는 것에 가깝습니다.

현재 아현 님은 ‘아픈 나’보다는 ‘이 기회에 더 열심히 일하는 나’, ‘환경을 바꾸는 나’의 생활로 도피한 느낌이 듭니다. 상처를 들여다보고 자신이 다친 것을 충분히 아파하고 앞으로도 뭔가를 하다가 다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두렵고 쉽지 않은 거죠. 하지만 실제로 상처가 아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업무와 자극이 잦아든 밤에는 아픔과 슬픔이 되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다른 관심사로의 전환이나 새로운 재미와 보람 찾기도 아픔을 이겨 나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실을 견뎌 내다가 지칠 때 잠시 쉬는 방법입니다. 다른 주제로의 도피가 애도에 대한 대응의 전부가 되면 안 됩니다.

애도는 이별로부터 겪는 감정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고통을 껴안는 쪽에 가깝습니다. 피하려고 애써도 옷장엔 세탁할 옷들이 있습니다. 아현 님, 연인과의 결별로 마음이 아플 때 집중해야 할 ‘나’는 ‘자기 계발하는 나’가 아닌 ‘아프고 힘든 나’입니다. 중요한 결별을 깊게 경험하고 있는 자기 말입니다. 밝고 사교적인 아현 님에게는 낯설지도 모르는 ‘마음이 아픈 나’에 머무르고 집중해 보는 것은 삶에서 아주 중요한 경험입니다.

전 연인과의 경험을 들어 줄 수 있는 친구·지인·선후배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찬찬히 얘기하고 기억들을 세세히 떠올려 보는 것은 중요한 과정입니다. 지질하다거나 멘탈이 약한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거나 되뇌일 수 있는 공간(일기장·게시판 등)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아현 님의 기억과 시간 안에는 좋았던 일, 괴로웠던 일, 슬펐던 일, 기뻤던 일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런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 말하고 돌아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작업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자기만의 고유한 속도도 있고 특정한 감정들마다 다른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 시간을 과도하게 단축하려고 하거나 얼른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일상이 과도하게 무너지지 않고 건강이 유지될 정도라면 때때로 올라오는 감정과 기억들을 ‘그때 그랬었지’ 하고 스스로 그대로 받아 주는 과정이 애도의 핵심입니다. 다만 감정의 강도들이 너무 세다면 심리 상담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직장 생활은?’ 하고 걱정될 겁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아픔을 경험하고 돌볼수록 오히려 상처 회복 기간이 줄어들고 다른 삶의 영역에도 다시 신경 쓸 수 있게 됩니다. 겪어야 할 것을 겪고 있기에 마음이 홀가분할 것이고 그래서 직장에서는 직무에 집중하는 일이 점차 쉬워질 거예요. 개인적 고통과 공동의 업무를 병행하는 데는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을 공유하고 아현 님에게 맞는 균형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아현 님도 동료들도 더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은 자라면서 의존하던 대상이나 상태와 분리되고 독립돼 나가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초연결 사회가 멀티태스킹과 생산성 강조로 주의력을 빼앗다 보니 우리는 상실과 애도처럼 시간이 걸리는 일에 대해 더욱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치유해 준다’는 말은 있었던 일을 덮고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난 일을 자세히 보고 느끼고 몰랐던 점을 깨닫는 그런 시간들이 상처를 제대로 치유해 줍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과 전문가에게 의지하는 것은 지혜롭고 의미있는 일입니다. 사람마다 시기와 종류가 다르지만 누구나 겪게 되는 이 어려움들을 토로하고 나누고 그럼에도 삶이 지속되도록 돕는 과정에서 비로소 취약성까지 나누는 진정한 관계들이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이 상실과 또 다른 연결의 과정에 한 발짝 내디딘 아현 님께 단단한 응원과 지지를 보냅니다.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