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 상반기 사상 최대 로비자금 지출…IRA·칩스법 대응

[편집자주]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대한민국 경제에 가장 중요한 미국의 도시는 뉴욕이었다. 국가 부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러가 필요했고 기업들은 앞다퉈 뉴욕으로 달려갔다. 세계화 시대에 뉴욕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이자 경제 수도였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도 한국인들의 관심은 뉴욕에 집중됐다. 주식의 시대, ‘서학개미’들은 밤잠도 줄이며 뉴욕 증시를 들여다봤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는 한국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쟁탈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지만 한국인들은 식상한 레토릭 정도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전면적 공세, 미국 우선주의가 현실적 모습을 보이자 워싱턴은 하루아침에 한국 경제의 명줄을 쥔 도시가 됐다. 엔데믹(주기적 유행) 이후 세계화의 후퇴, 미국의 제조업 회복 전략,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맞물린 결과다.
삼성·SK·현대차, 워싱턴 전초기지 강화하고 거물급 인사 영입[왜 워싱턴인가①]
“워싱턴D.C.에서 문장 한 줄이 추가될 때마다 한국 기업의 수출 전략이 뒤집어진다”

미국 정치 심장부가 한국 경제의 숨통을 거머쥐자 세계 기업들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미국 내 다른 도시보다 워싱턴D.C.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강화되면서 공급망 재편에 속도가 붙자 미국 정부의 움직임이 글로벌 비즈니스의 핵심 변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의회와 각 부처에서 조항 하나, 문장 한 줄이 추가될 때마다 기업의 수출 전략을 바꿔야 할 뿐만 아니라 산업 경쟁력 자체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주요 기업들은 워싱턴D.C. 조직을 격상시키고 미국 헤드쿼터를 워싱턴으로 옮기고 거물급 인사를 영입하는 발빠른 대응에 나서고 있다. 사상 최대 로비 자금 지출
삼성·SK·현대차, 워싱턴 전초기지 강화하고 거물급 인사 영입[왜 워싱턴인가①]
대응의 강도를 보여주는 것은 로비 금액이다. 미국은 로비의 나라다. 미국 수정헌법 1조는 ‘의회는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 이익 단체는 자유롭게 로비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표현의 자유를 투명한 로비 활동을 통해 보장한다는 의미다. 전 세계 정부와 기업이 워싱턴 로비의 거리를 말하는 ‘ K-스트리트’에 매년 수조원의 돈을 쏟아붓는 이유다.

한국에서는 반도체가 걸려 있는 삼성이 예상대로 가장 많은 돈을 미국 로비에 썼다. 삼성(삼성반도체, 삼성전자 미국법인, 삼성SDI 포함)은 올해 상반기 사상 최대 금액을 지출했다. 상반기에 삼성이 지출한 로비 자금은 총 325만 달러로 지난해 상반기 259만 달러보다 25.5% 늘어난 역대 최대치다.

미국 정부와 연줄이 닿을 수 있는 관료 출신 인재도 영입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를 미국 법인 부사장(대외협력팀장)으로 영입했다. “그가 입법·규제 동향과 정책을 기업·비즈니스 전략에 결합할 것”이라는 게 당시 삼성의 설명이었다.
리퍼트 전 대사는 삼성 미국 법인에 합류하기 전 미국 보잉 부사장, 유튜브 아시아·태평양지역 정책 총괄 등을 역임했다. 2022년 5월 조 바이든 대통령의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 방문에 동행하기도 했다.
그래픽=박명규 팀장
그래픽=박명규 팀장
삼성에는 전직 통상 관료들도 즐비하다. 주미대사관 경제참사관으로 일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협상부터 발효까지 챙긴 김원경 부사장, 윤영조 전 주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 대표부 참사관, 권혁우 전 산업통상자원부 미주통상과장을 영입했다.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낸 유명희 씨도 사외이사로 선임하기도 했다.

삼성이 이처럼 미국 로비에 힘을 쓰고 있는 것은 반도체·과학법(CHIPS)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삼성SDI 배터리 사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170억 달러(약 20조원)를 투자해 미국에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공장을 짓고 있고 삼성SDI는 스텔란티스와 손잡고 2025년 가동을 목표로 배터리 공장을 세우고 있다.

LG그룹은 4대 그룹 중 가장 늦게 워싱턴D.C. 사무소를 설립하며 조 헤이긴 전 백악관 비서실 차장을 워싱턴사무소 공동 대표로 영입했다. 헤이긴 대표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부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까지 공화당 소속 대통령 4명의 재임 시절 총 15년간 백악관에서 근무한 ‘공화당 통’이다. LG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계열사들이 미국 현지에 공장을 짓고 현지 기업과 합작도 늘어나는 데 따른 것이다.

현대차그룹(현대차·기아·현대제철·슈퍼널 포함) 역시 올해 상반기 역대 최대인 171만 달러를 로비 자금으로 쓰며 미국 내 대관 역량 확대에 나서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에도 연간 기준 최대치인 336만 달러를 지출했다. 이 자금은 미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IRA 관련 활동 등에 쓰였다.
그래픽=박명규 팀장
그래픽=박명규 팀장
자동차뿐만 아니라 각 계열사별 워싱턴 사무소를 개설해 산업별 대응에도 힘쓰고 있다. 현대제철 워싱턴D.C. 사무소는 2022년 문을 열었다.

눈에 띄는 것은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차세대 이동 수단으로 점찍고 있는 UAM(Urban Air Mobility) 사무소를 워싱턴에 냈다는 점이다. UAM은 하늘을 나는 자동차로, 정 회장이 2020년 모터쇼에서 직접 설명하는 등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미국 UAM법인 ‘슈퍼널’은 올해 8월 워싱턴D.C. 정책사무소를 개설했다. 이 사무소에만 현재 60명이 근무하고 있다.
그래픽=박명규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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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는 최근 미국 내 컨트롤 타워를 애틀랜타에서 워싱턴D.C.로 이전했다. 도한의 포스코아메리카 법인장은 “미국 정부의 산업 통상 정책이 단순히 미국 사업뿐만 아니라 포스코 전체의 글로벌 공급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워싱턴으로 이전했다”고 설명했다. 포스코는 2016년 뉴저지에 있던 법인을 애틀랜타로 옮기고 워싱턴에는 2018년 통상 사무소를 열어 두 곳에서 미주 사무소를 운영했다.

지난해까지 미주 법인 사업의 중심은 애틀랜타였다. 주요 고객인 현대차 공장이 조지아 주에 있고 다른 배터리 기업들도 조지아 주에 배터리셀 공장을 짓고 있어 애틀랜타가 전략적 요충지였다. 워싱턴 통상 사무소는 2018년 철강 쿼터제(미국의 무역 확장법 232조 규제)와 철강 제품에 대한 반덤핑 규제 대응이 주요 업무였다.

하지만 포스코의 사업 영역이 확대되면서 워싱턴 사무소의 존재감도 커졌다. 도 법인장은 “통상 대응 역할을 강화해 철강뿐만 아니라 전 그룹사 전체 사업에 대한 규제에 대응하고 특정 지역을 넘어 북미 전체를 아우를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IRA 시행 이후 포스코그룹의 새 주력 사업인 2차전지 소재 전략도 새로 짜야 했다. 워싱턴 사무소가 컨트롤 타워로 격상된 이유다.

LG그룹은 워싱턴D.C. 사무소를 강화했지만 로비에 쓴 금액은 줄었다. SK이노베이션과 배터리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작년과 재작년 많은 돈을 지출한 영향이다. 로비 금액은 2021년 184만3000만 달러, 2022년 121만 달러였다.

SK그룹도 워싱턴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SK그룹은 워싱턴 업무를 총괄할 현지 책임자 인선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에서 중량감 있는 인사를 찾고 있다는 얘기가 있었고 현재 인선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 인력 채용을 확대하고 실무진을 늘린 데 이어 SK하이닉스·SK이노베이션 등 SK 계열사 전반의 워싱턴 업무를 총괄할 ‘미국통’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SK그룹은 올해 상반기 227만 달러를 로비에 지출하며 지난해 상반기(223만 달러)보다 미국 대관 투자 금액이 소폭 증가했다.

IRA의 수혜자로 불리는 한화그룹은 김동관 부회장이 워싱턴을 수시로 찾아 미 정·관계 인사들과 만남을 이어 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그룹의 로비 자금 역시 지난 5년간 꾸준히 증가했다. 태양광과 방산 사업이 주력 축인 한화그룹은 미 국방부(펜타곤) 인근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기업 전초 기지 된 정치 1번가
삼성·SK·현대차, 워싱턴 전초기지 강화하고 거물급 인사 영입[왜 워싱턴인가①]
한국의 대기업이 일제히 워싱턴 정보 라인을 강화하는 이유는 지난해 IRA와 칩스법이 통과되며 미국의 공급망 재편에 속도가 붙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과 한국 정부는 지난해 8월 미 의회에서 IRA가 통과될 때까지 관련 정보 수집이 제대로 안 됐고 대응책 마련이 늦어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 기업은 연방 정부보다 주정부 내 하원의원을 통해 이익을 관철했다. 한국 기업이 투자하고 생산 설비를 구축하면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 결과였다. 실제 한국 기업은 지난해 미국에서 신규 일자리를 가장 많이 창출한 국가다. 미국 비영리 단체 리쇼어링이니셔티브에 따르면 한국은 2022년 미국에서 35만 건에 달하는 일자리를 창출했다.

미국 텍사스·조지아·버지니아 주 등 한국 기업이 공장을 세우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 지역 하원의원들은 한국 기업을 대변해 미국 정부에 목소리를 내줬다.

하지만 미국 내 자국 우선주의가 강화되고 공격적인 입법이 이어지면서 하원의원뿐만 아니라 상무부·재무부 등 각 부처에 대한 연결 고리를 만들고 의회와의 접촉을 늘리는 등 직접적인 로비가 중요해졌다. 주요 기업이 앞다퉈 워싱턴D.C. 조직 역량을 강화하는 배경이다.

유혜영 프린스턴대 정치학과 교수는 “그동안 한국 기업은 워싱턴D.C. 사무소를 통한 인하우스 로비보다 대형 로비 펌과 계약 후 로비를 맡기는 형태의 ‘콘트랙트 로비’에 주력했다”며 “하지만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된 후 구체적인 행정 명령은 상무부나 재무부 등 각 부처를 통해 정해지는 만큼 워싱턴D.C.에서의 인하우스 로비 중요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왜 워싱턴인가 : K스트리트 달려가는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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