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전략]
협상 가치 창출의 ‘기생충’[이태석의 경영 전략]
수익성 높은 고혈압 치료제를 제조 판매해 큰 돈을 벌고 있는 A 제약회사가 있다. 회사는 개당 4.05달러짜리 알약을 매년 1억 개씩 판매한다. 제조 비용은 한 알에 0.05달러. 대략 매년 벌어들이는 수익은 4억 달러다.

그런데 얼마 후 B 제약회사에서 동일한 효능의 약을 출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A사는 비상이 걸렸다. 독점해 왔던 시장에 경쟁자가 등장해서다. 경영진은 판매 가격을 일단 낮출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린다.

B사의 출시 예정 제품 가격이 2.55달러였기 때문이다. 여러 측면에서 고려해 보니 3.05달러가 적절하다는 추정이 나왔다. 이제 고혈압 치료제 시장은 두 개 회사가 양분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A사의 시장점유율은 60%, B사는 40% 정도 될 것으로 예상됐다. 이 경우 A사는 매년 6000만 개를 판매해 연간 1억8000만 달러의 수익을, B사는 4000만 개를 판매해 1억 달러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계산을 간단하게 하기 위해 제조 비용은 0.05달러로 가정했다. 결국 시장의 파이는 B사의 진입으로 전체 수익은 2억8000만 달러(A사 1억8000만 달러+B사 1억 달러)로 바뀌게 된다. A사가 독점을 누리던 당시 수익금 4억 달러보다 무려 1억2000만 달러나 적다.

A사의 경영진이 생각해 보니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나눌 수 있는 파이가 줄어도 너무 줄었다. 고민 끝에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A사의 협상 대표는 B사 대표를 찾아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즉 B사가 시장에 진입하지 않는 대가로 매년 1억2500만 달러를 지불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B사로선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1억 달러 벌자고 괜히 힘만 쓰는 것보다 더 큰돈 아닌가. A사도 마찬가지다. 기존 수익 4억 달러에서 1억2500만 달러를 B사에 주더라도 경쟁 시 예상되는 수익 1억8000만 달러보다 더 많은 2억7500만 달러를 챙길 수 있다.

어떤가. 완벽하지 않은가. 양 사가 협상을 통해 서로 이익을 키우는 데 성공했고 1억2000만 달러의 협상 가치를 창출(?)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자. 그 창출된 가치는 어디에서 왔을까. 불행하게도 그것은 병든 환자들에게서 나오는 가치다. B사가 고혈압 치료제 시장에 뛰어든다면 환자들은 3.05달러 또는 2.55달러만 지불하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 없이 기존 가격 4.05달러를 내야 한다. 1억2000만 달러는 결국 순수하게 창출된 가치라고 볼 수 없다. 소비자에게서 생산자 쪽으로 이전된 가치에 불과하다.
기생 가치 창출이란이런 가치 창출을 맥스 베이저만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그의 저서 ‘협상천재’에서 ‘기생 가치 창출(Parasitic Value Creation)’이라고 불렀다.

협상자들이 얻어 낸 이익이 다른 사람들의 희생으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기생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A사와 B사와의 합의는 분명히 공정하지 않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은 경쟁을 제한한다는 이유로 불법으로 간주한다.

위에서 언급한 얘기는 미국의 ‘셰링 플라우(Schering-Plough)’와 ‘업셔 스미스(Upsher-Smith)’의 특허 타협 건을 바탕으로 만든 가상의 시나리오다.

2005년 셰링 플라우의 고혈압 약을 위협하는 제네릭 약품을 업셔 스미스가 출시할 계획이었다. 셰링 플라우는 자사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상대를 고소함으로써 시장 진출을 막으려고 했다. 두 제약회사는 협상 끝에 법정까지 가지 않고 합의에 도달했다.

셰링 플라우는 업셔 스미스의 시장 진출을 연기하는 대가로 다른 약품 다섯 가지에 대해 6000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이를 공정한 보상 거래가 아니라고 봤다. 제네릭 약품 출시를 막기 위한 협잡 행위라고 주장했다. 반면 제약회사 변호사 측의 주장은 달랐다. 다섯 가지 약품에 대한 쟁점들을 동시에 협상함으로써 가치 창출을 도왔고 이것은 사회에도 이로운 일이라고 말이다.

어느 측의 주장이 맞을까. 법적 논리를 떠나 협상의 관점에서 보자. 과연 이것이 협상의 진정한 가치 창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양 사는 소비자들과, 더 넓게는 사회 전반에 미칠 해로운 영향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을 위해 가치를 창출한 것은 아닐까.
모든 가치 창출이 기생 가치는 아니야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우리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 ‘기생 가치 창출’이라고 해서 가치를 창출하는 모든 합의들을 폄훼해선 안 된다. 기업이 적정 시장 가격을 책정하기 위한 행위 자체를 백안시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제약업계가 환자들을 위해 무조건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충분한 수익을 얻지 못한다면 생명을 구하고 수술의 필요성을 줄이며 고통을 덜어 주는 수많은 약들이 개발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당사자에게 이익을 창출하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소비자에게 미치는 피해를 간과한다면 그 가치 창출은 불완전한 가치 창출이 될 것이다. 나아가 비윤리적인 협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협상의 가치 창출을 잠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소비자나 여타 이해관계인들의 희생을 담보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한다. 협상 테이블에 없는 사람들, 이를테면 소비자나 다음 세대에게 미칠 영향을 무심코 간과하지는 말아야 한다.

한 발자국만 더 나가 보자. 위에서 언급한 제약회사의 협상과 매우 유사한 사례가 있다. 그것은 정치 헌금이다.

비영리 단체나 특수 이익 집단들은 정치가들의 선거 운동에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한다. 물론 정치 헌금이 본질적으로 불법은 아니다. 금액 제한을 지키고 출처를 투명하게 공개하면 된다. 정치인들은 그 대가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 접근해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정치인들은 풍족한 선거 운동 자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익을 보고 특수 이익 집단들은 로비 활동에 쏟아붓는 투자를 통해 괜찮은 보상을 받는다.

가치 창출의 관점에서만 보면 이 협상은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을 안겨준다. 단, 이를 바라만 보는 일반 국민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치인과 특수 이익 집단이 창출하는 가치는 진정한 가치가 아니라 기생 가치라고 말한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이를 막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정치가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국가 공무원들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국민들을 희생시키면서 특정 이익 단체에 이익을 안겨주는 왜곡된 정책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바라보는 현명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다.

협상에서 창출한 가치가 당사자를 떠나 우리 사회에도 이로운지 여부는 어떻게 판단할까.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협상을 하면서 이 부분까지 챙기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눈앞에 이익이 놓여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 가지 판단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가치와 비용이다.

당사자들에게 돌아가는 ‘가치’가 협상 테이블에 없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비용’보다 많은지 따져보는 것이다. 물론 창출된 가치의 일부는 기생 가치 창출을 통해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순이익이 된다면 진정한 의미의 가치 창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태석 IGM세계경영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