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삼성의 준법 경영을 감시하기 위해 출범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이하 준법위)가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내면서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재계에선 준법위 활동에 대해 삼성 준법 경영의 산파 역할을 해냈다는 평가와 ‘요식 기구’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2기 준법위를 이끄는 이찬희 위원장은 최근 발간된 2022 준법위 연간 보고서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이제 모든 의사 결정을 할 때 준법감시위원회 검토를 거쳤는지 물어보는 게 당연한 습관이 됐다”고 그간 활동을 자평했다.

하지만 4세 승계 포기·무노조 경영 폐기 등 출범부터 파격적인 변화를 끌어내 주목받았던 1기 준법위와 달리 2기 준법위에선 핵심 과제였던 지배 구조 개선 관련 구체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많다.

이사회 밖 또 다른 감시 기구…모호한 동거

준법위는 출범부터 삼성이 자체적으로 만든 감시 기구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각 계열사 이사회가 있는데 굳이 준법위가 필요하느냐는 지적도 있었다.

2022년엔 이 위원장이 “글로벌 기업인 삼성의 최고경영진이 재판 때문에 제대로 경영을 할 수 없다면 결국 국민이 피해를 보는 것”이라며 이 회장의 사면을 요청하는 발언으로 ‘감시자 역할을 망각하고 변호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경영권 승계 의혹 관련 재판에서 이재용 회장의 양형 감량용 도구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이 위원장은 2022년 6월 2기 출범 후 처음으로 가진 삼성전자·삼성SDI·삼성전기 등 7개 관계사 최고경영진과의 간담회에서 “삼성은 이미 많은 분야에서 글로벌 최고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이제는 기술력뿐만 아니라 준법 경영에서도 국내외 기업의 롤모델이 돼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준법과 인권에 대한 최고경영진의 확고한 의지가 중요하다. 준법위가 건전한 긴장 관계 속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 시점에서 2기가 추구한 건전한 긴장 관계가 제대로 형성됐는지를 살펴보면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9월 8일 열린 회계 부정, 부당 합병 관련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9월 8일 열린 회계 부정, 부당 합병 관련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17년 전 ‘삼지모’처럼 흐지부지되나


삼성이 처한 특수한 환경에서 출범한 준법위는 상법상 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법적 권한과 책임이 없는 독특한 조직이다. 삼성 계열사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사내이사에도 해당되지 않고 이사회·주주 총회를 거쳐 선임되는 사외이사와 기타 비상무이사도 아니다.

준법위는 이 회장의 ‘국정 농단 사건’ 파기 환송심 재판부가 삼성 내부 준법 감시 제도 마련 등을 주문한 것을 계기로 2020년 3월 출범했다. 외형상 삼성의 지시를 받지 않는 독립 조직으로,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SDI·삼성전기·삼성SDS·삼성생명·삼성화재 등 7개 주요 계열사가 협약사로 참여하며 준법위의 감시를 받고 있다.

이 회장은 준법위 출범 때부터 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에 이르기까지 활동의 독립성 보장을 약속했다. 삼성의 주요 계열사와 협약을 맺고 준법 감시 업무를 준법위 측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위원회 운영 자금 역시 7개 계열사에서 부담한다. 결국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도 삼성에서 보수를 받는 ‘삼성맨’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역 없는 비판이 가능한 구조가 아니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된다.

더 큰 문제는 준법위는 회사 외부에 있는 조직으로서 경영상 민감한 내부 정보에 접근 권한이 없어 준법 감시 기능이 실질적으로 작동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준법위가 2006년 삼성 엑스파일 사건 당시 삼성이 대국민 사과와 함께 경영 쇄신안으로 발족했다가 유명무실하게 끝난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삼지모)’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당시 사건으로 ‘삼성공화국’ 논란이 불거지면서 반(反) 삼성 기류에 대처하기 위해 그룹 사장단 간담회인 수요회에서 2주 연속 이 문제를 토론한 끝에 삼지모가 탄생했다. 토론은 이건희 전 회장이 “삼성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사장단이 허심탄회하게 논의해 보라”고 제안한 데 따른 것이다. 삼성이 ‘반(反)삼성 정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련한 특단의 대책이 옴부즈맨 성격의 외곽 비판 그룹인 삼지모였다.

삼성은 자성의 차원에서 국민의 쓴소리를 듣겠다며 시민단체·노동계·언론계·문화예술계·학계 등 각 분야 저명인사 8명을 모아 삼지모를 구성했다.

하지만 삼지모의 회의 내용은 비공개가 원칙이었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 속에서 ‘삼성을 지켜주는 모임’ 아니냐는 시선도 받았다. 삼지모는 출범 후 2년간 활동을 이어 갔지만 실효성 있는 성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고 멤버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면서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전경련 재가입 결정은 각 사 알아서”…한계 드러내

올해 재계 주요 화두 중 하나였던 삼성그룹 관계사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재가입 관련 사안에서 준법위라는 기구의 모호성이 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2기 준법위는 8월 18일 임시 회의에서 전경련이 새로 출범할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에 삼성 관계사의 가입 권고 여부에 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준법위는 “전경련이 정경 유착 우려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는 데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아놓고도 “만일 관계사가 한경협 가입을 결정하더라도 정경 유착 행위가 있으면 즉시 탈퇴할 것 등 필요한 권고를 했다”고 발표했다. 준법위는 스스로 전경련 가입 찬성과 반대를 결정하는 기구가 아니고 준법 의무 위반 리스크가 높으면 의견을 제시할 권한만 있다고 설명한다.

정경 유착 발생 시 탈퇴하라는 조건부 가입을 권고한 것인데 이를 두고 삼성 내부에서조차 삼성이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삼성이 자체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판단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인데 결정을 명확히 내려 주지 않아 곤란하다는 것이다.

실효성에 대한 비판도 여전하다. 이 회장이 그간 준법위를 통해 준법 경영 의지를 피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2021년 1월 18일 국정 농단 파기 환송심에서 이 회장의 법정 구속을 막지 못해 준법위의 존속 명분이 희석됐다는 시각이 많다.

다만 준법위를 해체한다면 출범부터 의심받아 온 이 회장의 양형을 낮추기 위한 면피용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삼성과 준법위는 위원회의 조직과 활동을 계속 보장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재계 관계자는 “그간 준법위가 노동·승계 문제 등 굵직한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며 준법 문화 정착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긍정적”이라면서 “다만 핵심 과제로 꼽히는 지배 구조 개선 문제에 대해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 못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존재감을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