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이야기 13

지금은 사라진 구소련(구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한때 미국을 앞서는 과학 기술과 생산력을 자랑하던 15개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합체다. 냉전 시대 사회주의 맹주 소련은 예술·스포츠·문학·영화 부문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뽐냈다.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 알렉산드르 도브첸코, 지가 베르토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 영화사의 굵은 획을 그은 감독들이 모두 소련 출신이다.

하지만 소련 70년 역사(1922~1991년)를 통틀어 가장 높은 흥행 기록을 세운 영화는 예술 영화도 프로파간다물도 아니었다. 1982년 상영된 ‘스포츠로토-82’라는 코미디 영화가 그 주인공인데 로또 당첨을 둘러싼 깜찍한 소동을 소재로 삼았다. 사회주의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의외의 소재였지만 당시 소련 2억7000만 인구 중 5분의 1에 해당하는 5500만 관람 기록을 세웠다.

한국의 ‘육사오(2022년)’와 ‘럭키 몬스터(2020년)’에서부터 태국의 ‘일등복권 구출작전(2022년)’, 영국의 ‘웨이킹 네드(1998년)’, 미국의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1995년)’ 등 지금까지 로또 당첨을 다룬 영화는 많았다. 하지만 이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영화보다 먼저 그리고 최대 흥행 기록까지 보유한 영화가 40년 전 사회주의 종주국에서 등장했다는 사실이 꽤나 신선하게 다가온다.
소련 역사상 최대 흥행영화 ‘스포츠로토-82’ /자료=스푸트니크
소련 역사상 최대 흥행영화 ‘스포츠로토-82’ /자료=스푸트니크
스포츠로토의 탄생
영화 ‘스포츠로토-82’가 대인기를 누린 데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다. 소련은 1960년대만 해도 핵무기, 위성 발사, 우주 탐사 등 미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한 초강국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지나친 군비 소모와 기술 혁신 정체로 생산력 침체를 겪게 된다. 사회주의 대국의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국민들은 요동했고 날로 악화되는 경제 속에서 작은 위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했다.

타스는 1970년 시작된 스포츠로토가 1980년대 초반 들어서면서 전 인구의 4분의 3이 구매해 즐기는 ‘국민 오락’으로 자리 잡았다고 전했다. 길거리에는 복권 판매대가 즐비했고 갖가지 쇼와 무대 행사가 벌어지면서 일상의 유흥으로 진화해 나갔다는 것이다. 일확천금의 꿈은 아니어도 고착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복권을 매개로 표출됐다.

첫 추첨은 1970년 10월 국영 TV를 통해 전국에 방송됐다. 세계 최초의 스포츠 복권을 설계한 스포츠위원회 부위원장 빅토르 이보닌은 복권이 “자본주의 머니 게임이 아닌 사회주의 이념과 일치하는 복지와 평등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에 걸맞게 수익의 50~80%를 국민 체육 진흥을 위해 사용할 것도 거듭 강조했다.

첫 주는 모스크바시에만 국한됐는데 150만 장의 기록에 고무된 정부가 서둘러 아제르바이젠의 수도 바쿠,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와 흑해의 항구 오데사로 판매를 확대하며 열기를 확산시켰다. 체력 향상과 공공 복지라는 명분과 무관하게 사회주의 인민들도 대박의 꿈에 열광했다.

언론의 관심도 뜨거웠다. 당첨자들의 흥미진진한 사연이 인기를 누리며 고정 코너로 자리 잡았다. 첫 당첨자는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35세 여성 루드밀라 모로조바였다. 엔지니어인 그녀는 퇴근길 지하철역 입구에서 주머니 속 전 재산 60코펙스(약 600원)를 털어 두 장의 티켓을 샀다. 한 장은 자신을 위해 다른 한 장은 열한 살 딸을 위해….

딸을 위한 300원의 투자는 거대한 보상으로 되돌아 왔다. 1등 5000루블의 대박이 터진 것이다. 당시 임금 노동자의 월평균 급여가 90~115루블이었으니 약 4년 치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딸을 위해 피아노를 구입할 수 있는 큰 행운이었지만 정작 열한 살 딸의 입에서는 자전거라는 소박한 요청이 나왔다고 한다.푸틴의 어머니와 전기공
1972년 당첨자 중에는 블라드미르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의 어머니도 있었다. 푸틴 대통령의 어머니가 이웃 식당에서 잔돈 대신 복권 티켓을 건네받았는데 그 행운의 티켓이 소비에트산 자포로젯(Zaporozhets) 자동차를 안겨줬다. 자포로젯은 1960년도부터 1994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 도심형 소형차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이렇게 회고한다. “어머니 아버지와 테이블에 앉아 이 차를 어떻게 할 것인지 가족 회의를 했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이 차는 우리 아들이 운전하게 합시다’라고 강하게 주장했어요. 샤워 시설도 갖추지 못한 공동 주거 아파트에 살았던 부모님이 아들을 위해 내린 대단한 결심이었죠.”

스포츠로토는 45개 숫자 중 6개를 맞히는 방식이었는데 1976년에는 36개 숫자 중 5개를 맞히는 ‘토요일 스포츠로토’가 새로 등장했다. 더 높은 확률 게임의 등장으로 열기는 배가됐고 열흘에 한 번이었던 추첨이 두 번으로 늘면서 판매량도 급증했다.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의 경비 5억3000만 루블의 약 30% 정도가 복권 수익으로 충당될 정도였다.

1등 상금은 초기 5000루블이었지만 1978년 1만 루블로 상승했다. 하지만 동일 숫자의 복수 구매가 가능했기 때문에 실제 상금은 1만 루블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 사상 최대 상금 당첨자는 타지키스탄 수도 두샨베의 세르게이 미카일로프였다.

38세 전기공인 그는 70년 첫 추첨부터 15년간 오직 1, 5, 10, 21, 25 숫자만 고집했다고 한다. 15년 복권 구매 이력 최고 당첨금이 고작 10루블었던 그에게 1985년 자신의 월급 40년 분에 해당하는 6만 루블의 폭죽이 터졌다.
스포츠로토 추첨방송 / 사진=타스 통신
스포츠로토 추첨방송 / 사진=타스 통신
복권에 대한 사회주의적 감성
그렇다고 소련의 복권이 여타 자본주의 국가들의 복권과 유사한 형태만 띤 것은 아니었다. 궤적을 살펴보면 목적과 내용, 확률과 상품에서 나름 특이한 요소들이 여럿 발견된다. 일단 첫출발부터 구호를 목적으로 한 비상업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1922년 갓 출범한 소비에트연방은 민간의 복권 발행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소련 역사상 첫 국영 복권이 1926년 발행되는데 러시아 볼가 지역의 대가뭄에 대한 구호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복권은 폼골이라는 구호 조직이 관장했고 1922년 시작된 우표 판매 수익이 저조해지자 1926년부터 한시적으로 진행했다.

다음으로 등장한 복권은 소련 내 유대인 정착 기금을 목적으로 했다. 18세기 초 러시아 제국 등장부터 1920년대까지 소련은 세계 최대 유대인 거주 지역이었다. 대략 200만 명에 달하는 유대민족(디아스포라)을 위해 정착지와 농경지를 마련해 줬다. 오제트(OZET)라고 불리는 이 정책 실행을 위해 복권 사업을 도입한 것이다.

사실 OZET 복권은 선전용 성격이 강했다. 약소 민족을 보호하는 사회주의의 윤리성을 국내외에 알려 신생 소비에트연방의 위상을 제고할 목적이었다. 복권 발행이 5년간(1928~1933년) 매해 1회로 제한된 것만 봐도 수익보다 국제 사회의 재정 지원을 노렸음이 짐작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스탈린 빅토리 복권이 등장했다.
1946년 나치에 대한 승전을 기념하면서 전후 복구 자금 마련을 앞세웠다. 10년간 유지된 복권은 1956년 스탈린의 죽음과 동시에 폐지됐다. 공산당 새 지도부가 스탈린의 유산과 일정한 거리를 뒀기 때문이다.

국채 성격을 띤 스탈린 복권은 인명이 사용된 전무후무한 복권으로 기록된다. 1등 당첨 확률 10만 분의 1, 최고 상금 10만 루블로 꽤 후한 조건을 제시했다. 우체국과 노점은 물론 방문 판매를 활용했고 상금뿐만 아니라 자동차·주택·가구 등 현물도 제공했다. 이 전통은 향후 스포츠로토로 계승된다.
1941년 발행된 스탈린 빅토리 복권 / 사진=보리스 옐친 대통령 도서관
1941년 발행된 스탈린 빅토리 복권 / 사진=보리스 옐친 대통령 도서관
이 밖에 독특한 사회주의 감성이 묻어나는 복권 사업이 여럿 있다. 예컨대 1964년 세계 최초로 발행된 예술 대중화를 위한 복권이 그 하나다. 장당 50코펙스(Kopecks는 러시아 화폐 단위로 100분의 1루블)의 티켓 400만 장이 발행됐고 현금 대신 50~1000루블 상당의 예술품 2만 점을 제공했다.

당대 소련 예술가들이 기부한 2000점의 그림·조각상·도자기·편직물 등 일상 친화적인 작품들도 전시와 함께 상품에 포함됐다. 이 특별한 복권에 관심을 보인 뉴욕타임스는 “상류층의 고급 취미와 사치품이던 예술 작품을 대중적 향유 대상으로 전환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미학을 선전하는 특이한 행사”였다고 보도했다.

스포츠로토는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이듬해 러시아에서 재등장했고 1993년 우크라이나에서도 부활했다. 2000년대 들어 소련의 일부였던 벨라루스·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으로도 확산됐다.

자본주의 복권의 추세에 맞춰 현물 상품은 없애고 현금만 지급한다. 타 복권들과 경쟁이 심해지면서 숫자 추첨식 이외에 즉석 복권도 추가했다. 스포츠로토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국가가 아닌 민간 사업자에 의해 운영되는, 구소련 사회주의 체취가 사라진 평범한 복권으로 남아 있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