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이 오르자 가계 구매력은 약해졌다. 지난 8월 전월 대비 소매 판매 증가율은 0.6%를 기록했다. 표면적으로는 시장 예상치(0.2%)를 웃돌았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르다. 소매 판매 증가의 대부분을 기름값이 잡아먹었다. 주유소를 제외한 소매 판매는 0.2% 늘어나는 데 그쳤다. 소비자들은 운동·취미·악기·서점이나 가구·인테리어 등과 같이 재량 지출 항목에서 지갑을 닫았다.
가계 구매력이 약화되면 기업 매출이 떨어지는 연쇄 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기름값 상승은 기업에도 비용 부담을 늘려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실제 지난 8월 생산자 물가는 전월 대비 0.9% 오르며 16개월 만에 가장 큰 상승률을 기록했다. 특히 국제 유가에 직접적 영향을 받는 석탄·석유 제품이 11.3% 올랐다.
기름값이 오르자 항공권 가격도 고공 행진했다. 항공권 가격은 기본 운임·공항세·유류 할증료 등으로 구성되는데 유가와 연동되는 유류 할증료가 지난 8월부터 큰 폭으로 뛰고 있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10월 국제선 유류 할증료는 9월보다 3단계 오른 14단계가 적용된다. 이는 올해 들어 책정된 유류 할증료 단계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앞서 유류 할증료는 올 3월 13단계를 찍은 후 4월 10단계, 5월 8단계, 6월 7단계, 7월 7단계, 8월 8단계로 안정화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9월 들어 전월 대비 3단계 뛰더니 10월에도 다시 한 번 3단계가 뛰면서 14단계로 급상승했다.
대한항공의 일본 후쿠오카 노선의 유류 할증료는 9월 2만800원에서 10월 3만800원으로 48% 뛰었다. 태국 방콕 노선과 미국 뉴욕 노선도 같은 기간 각각 42%, 38% 상승했다. 100달러 바라보는 국제 유가…재정 확보 나선 사우디 당분간 가계와 기업의 기름값 부담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월가에서는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찍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상품·파생 상품 리서치 책임자인 프란시스코 블랜치는 보고서에서 “석유수출국기구(OPEC) 플러스(+)가 연말까지 공급 감축을 유지한다면 내년 이전에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최대 셰일업체 중 한 곳인 콘티넨탈리소시스의 더그 롤러 최고경영자는 미국 정부가 더 많은 양의 셰일오일 시추에 나서지 않으면 국제유가가 배럴당 최고 15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7월 배럴당 70달러대에서 움직이던 국제 유가는 주요 산유국의 원유 감산 조치로 인해 8월부터 치솟기 시작했다. 지난 8월 OPEC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자발적 감산 조치를 연장했고 러시아 역시 원유 수출을 제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최근에도 두 나라는 연말까지 원유 감산을 이어 갈 것이라고 밝혔다.
두 나라는 OPEC와 비(非)OPEC 주요 산유국들의 협의체인 OPEC+를 이끄는 리더다. 세계 원유 시장의 수급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한다.
두 나라가 감산을 결정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비전 2030프로젝트’를 통해 석유 의존도가 높은 경제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막상 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유가를 올려야 했다. 비전 2030의 주요 프로젝트인 네옴시티를 건설하고 신재생에너지를 위한 인프라 투자를 하기 위해 최소 5000억 달러(약 665조원) 이상 투입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세수의 68%를 원유 수입에 의존한다. 비전 2030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해 인프라 투자를 늘리려면 재정 충당을 위해 감산으로 유가를 올려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추산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재정 균형 유가(재정 수지를 균형으로 만드는 유가)는 배럴당 80.9달러다. 하지만 추가 재정 수입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요구하는 유가 수준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유가를 높여 자금을 조달할 필요성이 커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를 두고 이번 유가 폭등이 “두 나라의 승리”라고 진단했다.
갑작스러운 유가 폭등은 금융 시장과 통화 정책 전반을 뒤흔드는 나비 효과가 될 가능성이 높다. 브렌트유가 배럴당 100달러에 근접하면 물가 상승을 자극할 수 있다. 치솟는 유가가 물가와의 전쟁에 나선 미국 중앙은행(Fed)의 목표를 가로막는 장애물인 셈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높은 유가는 더 높은 인플레이션과 더 높은 금리를 초래할 것”이라며 “이 때문에 Fed는 추가 기준금리 인상의 여지를 열어둘 것”이라고 전했다. 미·사우디, 한·미 동맹 버금가는 군사 동맹 맺을까외교적 이벤트가 유가를 결정할 가능성도 있다. 2024년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조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이 계속 낮아지는 중이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와 냉각 관계에 있던 미국이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는 움직임도 포착됐다.
뉴욕타임스는 9월 19일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한·미 또는 미·일 간 군사 동맹에 버금가는 상호 방위 조약을 맺는 방안을 협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한·미 동맹 수준의 방위 조약을 체결하면 상호 간 군사적 지원을 하게 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그동안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대가로 미국에 방위 조약 체결과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우라늄 농축 허용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2018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크지 암살 사건 이후 바이든 행정부가 암살 배후로 빈 살만 왕세자를 지목하며 양국의 협력은 멈췄다. 2020년 바이든의 대선 캠페인에선 사우디아라비아를 ‘왕따(pariah)’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결정한 뒤엔 사우디아라비아뿐만 아니라 전체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약화했다.
그러자 중국과 러시아가 그 틈을 파고들어 중동과의 동맹을 강화했다. 중국은 올 초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외교 관계 복원에 은밀히 개입하면서 중동 내 영향력을 확장했다. 러시아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원유 감산 보조를 맞추면서 유가 상승을 함께 주도했다.
미국으로서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가 냉각되면서 ‘중국 견제’와 ‘물가 안정’이라는 두 가지 목표 모두 차질을 빚고 있다. 이에 미국은 중동 지역 현안에 적극 관여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 관리들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미국과 더 가깝게 만들면 그들을 중국에서 더 멀리 끌어내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의 노력을 둔화시킬 수 있다”며 “중동과 이스라엘 간 긴장을 해소하는 상징적 외교이자 동시에 미국에도 지정학적 중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스라엘과의 외교 정상화를 하는 대신 자국이 민간 핵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은 이에 대해선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의회를 설득하는 문제도 남아 있다. 뉴욕타임스는 “민주당을 포함한 일부 상원의원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빈 살만 왕세자를 미국의 이익이나 인권 문제에 관심이 없는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견제를 위한 석유 증산도 요구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오히려 감산에 나서며 바이든 행정부를 자극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주도하는 OPEC+의 결정에 전 세계 물가와 금리가 달린 만큼 미국 정부의 결정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