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독일 함부르크 항구의 컨테이너 터미널의 중국 화물선. 사진=로이터·연합뉴스
독일 함부르크 항구의 컨테이너 터미널의 중국 화물선.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세계 4위 경제국이자 제조업 강국인 독일이 장기 침체의 늪에 빠져 비틀거리고 있다. 최근 블룸버그와 이코노미스트 등 주요 외신은 독일 경제가 주력 산업의 부진으로 올해 역성장할 것이란 암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러시아에서 값싼 에너지를 수입해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에 수출하며 성장하던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진단이다. 독일 경제의 부활을 이끌었던 친중·친러 노선과 제조업 중심 경제 구조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독일이 또다시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울리고 있다.

독일 경제는 1990년 통일 이후 고질적인 고실업·저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유럽의 병자’로 불렸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실업률이 크게 하락하고 수출을 중심으로 경제 성장이 가속화되면서 2010년대 중반에는 ‘이코노믹 슈퍼스타(economic superstar)’로 거듭났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상황이 달라졌다. 독일 경제는 고령화·투자 부족 등 자체 성장 동력이 약화한 가운데 미국·중국 갈등,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대외 의존도가 높은 경제 성장 모델이 한계에 봉착했다.

독일 경제부는 10월 올해 경제 전망을 발표할 때 지난 4월 말 예상했던 연간 0.4% 증가에서 0.3% 역성장으로 하향 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전 세계 주요 경제국 중 독일이 유일하게 올해 0.3% 역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독일 경제가 ‘나 홀로 역성장’ 위기에 빠진 데는 크게 세 가지가 패착으로 꼽힌다. 높은 중국 의존도와 자동차 산업 부진, 높은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픽=송영 기자
그래픽=송영 기자
중국 수출 의존하다 발등 찍혀

독일은 중국에 최종 수요와 원자재 조달을 모두 의존했다. 2006년 이후 7년 연속 독일의 최대 교역국은 중국이었다. 이후에도 무역 규모는 꾸준히 늘었다. 2022년 기준 대중국 무역 의존도가 7.7%에 달했다.

중국 경제의 활성화 여부가 독일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추정됐다. 독일 무역투자청(GTAI)에 따르면 2022년 독일과 중국의 무역 규모는 3000억 유로에 달했다. 이는 전년보다 22.6%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독일의 대중국 수입 규모가 전년보다 36.5% 급증하는 동안 대중국 수출 규모는 3.7% 늘어나는 데 그쳤다. 중국이 대외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공급망 자급자족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독일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높아지고 있는 반면 중국 경제에서 독일의 비율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중국의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에 따라 독일이 수혜국이 될 것이란 예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제로 코로나 정책 종료 이후에도 중국 경제의 회복세가 더디게 진행되면서 ‘차이나 쇼크’가 현실화되고 있다. 특히 독일의 미래 먹거리 산업에 필요한 원자재 대부분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어 대중국 의존도 낮추기가 시급한 해결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친중·친러’ 정책을 폈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의 16년 장기 집권을 끝내고 2021년 독일 정부의 새 수장에 오른 올라프 숄츠 총리는 대중국 의존도 낮추기에 힘을 쏟고 있다.

독일 정부는 지난 7월 사상 처음으로 국가 안보 전략을 도입하면서 중국을 ‘파트너이자 경쟁자, 체제 라이벌’로 규정하고 디커플링(공급망 등 분리)이 아닌 디리스킹(위험 제거)을 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제적 측면에선 중국과의 유대를 유지하되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는 크게 낮춘다는 것이다.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2022년 11월 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회담 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2022년 11월 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회담 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내연기관 집착하다 뒤처진 전기차 전환

수출 주도형 독일 경제는 과거 유럽 경제를 침체에서 회복시키는 든든한 엔진이 됐지만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병목 현상과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 등의 영향으로 제조업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

독일 경제 성장을 떠받들던 제조업 경쟁력이 중국 등에 밀려 빠르게 뒤처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독일은 기존 주력인 자동차·전자 기계 분야에만 치중하다가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 산업에서 경쟁력이 약화됐다. 디지털 경쟁력은 세계 19위, 인공지능(AI) 관련 투자는 7위에 그치는 등 디지털 전환 기반도 자동차·전자 기계 등 전통적 제조업에 비해 취약하다.

독일을 대표하는 자동차 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독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7월 자동차 산업 생산은 6월보다 3.5% 감소하면서 독일 전체 산업 생산이 1.5% 감소했다. 독일 경제에서 자동차 산업이 약 5%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전체 산업 생산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자동차 산업은 코로나19 팬데믹과 이에 따른 공급망 혼란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독일자동차산업협회(GAIA)에 따르면 독일 자동차 제조 업체들은 올해 상반기 220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했다. 이는 전년 동기보다는 크게 증가한 것이지만 팬데믹 이전인 2019년 동기보다는 여전히 10% 정도 감소한 수준이다.

독일은 폭스바겐·BMW·메르세데스-벤츠 등 3대 자동차 제조사가 있는 전통의 자동차 강국이지만 전기차가 내연기관차 시장점유율을 예상보다 빠르게 잠식함에 따라 존재감을 잃어 가고 있다.

시장 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2022년 글로벌 전기차 시장점유율은 미국 테슬라(16.4%), 중국 BYD(11.5%), 중국 상하이차(11.2%)가 1~3위를 차지했다. 폭스바겐과 아우디·벤츠·BMW 등 독일 업체들은 2015년 디젤게이트(배출 가스량 조작 파문) 이후 대대적인 전기차 전환을 추진했지만 핵심인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 등이 여전히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소프트웨어 인력 인프라도 미국과 중국에 비해 약하다는 평가다. ‘대륙의 테슬라’로 불리는 중국 토종 전기차업체 BYD는 전기차 3대 핵심 기술인 배터리·구동 모터·전자 제어 장치(ECU)를 동시에 보유한 유일한 업체로, 수직 계열화로 안정적인 부품 공급 체계를 갖췄다.

중국 시장에서 지난 15년간 내연기관차로 판매 1위를 해온 폭스바겐은 최근 전기차가 대세가 되면서 BYD에 1위 자리를 내줬다. 미래 자동차 시장이 전기차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독일 기업이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중국 전기차 시장에서 경쟁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면 향후 도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IAA 모빌리티 2023에 참가한 중국 BYD 부스 전경. 사진=BYD 제공
IAA 모빌리티 2023에 참가한 중국 BYD 부스 전경. 사진=BYD 제공
독일 뮌헨에서 9월 초 열린 유럽 최대 모터쇼인 ‘IAA 모빌리티 2023’에서도 중국 전기차업체들이 최대 화제였다. 중국 전기차·배터리업체들은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으로 북미 진출이 여의치 않자 유럽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번 IAA 모빌리티에는 유럽을 전략 시장으로 삼고 있는 중국업체들이 대거 몰려 직전 행사보다 두 배가 넘는 기업이 참여했다.

BYD는 새로운 신기술과 6개의 전기차 모델을 선보였다. 마이클 슈 BYD 유럽 대표는 “137년 전 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된 독일 모터쇼 IAA에서 처음 선보이게 돼 영광”이라면서 “비야디는 차를 만든 지 20년밖에 안 되지만, 이미 지난해 신에너지 차량(NEV) 186만대를 판매해 세계 1위가 됐다”고 강조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IAA 모빌리티 2023’에서 수십 년 동안 자동차 산업을 지배해온 독일의 전통 제조사들의 전동화 전환 속도가 테슬라와 중국 전기차업체에 뒤처졌다는 점이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도 이번 IAA 모빌리티 개막식에서 최근 독일의 전기차로 전환 속도가 느려졌다고 지적하며 자동차 제조사들에게 “더 싼 전기차를 팔아달라”고 촉구했다. 그는 IAA 모빌리티에 대거 몰려온 중국차에 독일 차가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선 단호히 일축하면서 “경쟁은 우리를 고무해야지 움츠러들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러시아발 에너지 위기에 경제도 휘청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새삼스레 독일과 유럽이 러시아 에너지 공급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고 이로 인해 독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독일은 그간 천연가스 수입의 55%, 석유 수입의 3분의 1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해 왔다. 전쟁 이후 러시아가 제재에 대한 보복성 조치로 2022년 8월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관인 노르드스트림 가동을 중단하자 심각한 에너지 대란을 겪었다.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절감한 독일은 에너지 인프라 다각화에 힘을 쏟고 있다. 미국 등에서 액화천연가스(LNG)를 공급받기 위해 독일 북해 인근 빌헬름스하펜에 첫 LNG 터미널을 완공했고 추가 건설도 추진 중이다.

독일에서 천연가스는 제조업·난방 등 다양한 분야에 쓰인다. 천연가스 공급이 부족해지면 산업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에너지 부족 사태로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면서 전기료·난방비뿐만 아니라 기업의 생산 비용을 증가시켜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킬 수 있다. 인플레이션이 심화하면 소비 심리가 위축돼 경기 침체를 가져오기 때문에 에너지 가격 상승은 독일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친다.

휘청이는 독일 경제 상황은 독일과 산업 구조가 비슷한 한국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한국은행은 ‘최근 독일 경제 부진 배경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한국도 제조업 비율과 중국 의존도가 높고 인구 고령화에 따른 노동 시장 변화가 크다는 점에서 최근 독일 경제 상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양호한 고숙련 노동자 기반을 활용해 첨단 산업의 생산성을 제고하고 산업 다변화와 친환경 전환을 성장 잠재력 확충의 기회로 삼고 외국인 노동자 유입 등의 정책 방안을 마련해 고령화에 따른 노동 공급 부족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