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인 줄 알았는데”…경마, 2030 문화가 되다[체험기]
“경마를 보러 가자고?”
왜? 의아했다. 야구도 안 보는 친구들이 경마를 보러 가자고 하다니. 체육 산업을 취재해 본 적도 없고 경마 중계를 본 적도 없는 사람으로서 경마는 낯설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주인공이 마지막 베팅을 하기 위해 경마장을 찾았지만 결국 마권을 부여잡고 탄식하는 장면이 그동안 알고 있던 경마의 전부였다.

코리아컵, 코리아스프린트(단거리)가 열린 9월 10일 과천에 있는 렛츠런파크 서울로 향했다. 예상과 달랐다. 열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주차장은 만차였고 6층까지 이어진 관람대는 가득 차 빈 좌석을 찾기 어려웠다. 어린아이와 함께 온 가족, 데이트를 하러 온 연인, 친구와 놀러온 2030세대가 경마장의 주연이었다. '2040존' 따로 만들어 한 해 9만명 입장
9월 10일 코리아컵과 코리아스프린트가 열린 서울 경마공원에 관중들이 가득 찼다./김영은 기자
9월 10일 코리아컵과 코리아스프린트가 열린 서울 경마공원에 관중들이 가득 찼다./김영은 기자
이날 열린 코리아컵, 코리아스프린트는 한국이 주관하는 국제 대회다. 출전국은 한국·일본·홍콩이었다. 켄터키더비(미국), 두바이월드컵(UAE), 사우디컵(사우디아라비아)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경주에 출전한 전적이 있는 말들이 이날 경주에 출전했다. 마치 현역 NBA 선수들이 드림팀을 이뤄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과 비슷했다. 경주마뿐만 아니라 일본·호주·홍콩에서 1~2위를 다투는 기수들이 원정 출전했다. 이날 하루 3만 명이 넘는 관중이 모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렛츠런파크 서울에 들어가기 전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출전하는 말들의 상태·실력·기록 등을 모르기 때문에 정보지를 사야 했다. 정보지의 가격은 2000원부터 1만원까지 다양했다. 출전하는 말마다 그간의 기록과 스피드, 조교들의 평가뿐만 아니라 말이 아픈 곳은 없는지, 그동안 밥은 잘 먹었는지 등 말의 컨디션을 체크할 수 있는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다. 어떤 정보지는 말의 사주를 풀이해 분석한 그날의 운세까지 담겨 있었다.

정보지 하나를 들고 향한 곳은 2040세대만 입장할 수 있는 ‘놀라운지’였다. 한국마사회가 경마 문화 개선을 위해 만든 공간이다. 20대나 30대, 어린아이와 함께 온 40대를 수용하기 위한 놀라운지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신분증 검사를 하고 손목띠를 둘러야 했다. 50대는 다른 관람석으로 가야 했다.

안에 들어서자 경마 교육을 받는 곳과 수유실 등 다양한 휴게 공간이 있었다. 경주로와 맞닿아 있는 야외 관람석으로 나가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계단식 관중석마다 테이블이 놓여 있어 음식을 먹고 편히 쉬며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잔디밭에는 아이들이 뛰놀았고 각국에서 온 응원단이 각 나라의 깃발을 흔들며 환호했다.
경마 시작 전 예시장에서 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김영은 기자
경마 시작 전 예시장에서 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김영은 기자
오후 4시, 이 날의 하이라이트인 코리아컵 말들이 예시장에 나왔다. 예시장은 경기에 출전하는 말들의 컨디션을 미리 체크할 수 있는 곳이다. 1번 말부터 15번 말까지 모든 말이 나와 예시장을 천천히 돈다. 이날의 우승후보였던 일본 말 ‘크라운프라이드(14번)’와 ‘글로리아먼디(15번)’는 한눈에 봐도 탁월했다. 체격과 윤기, 근육의 크기가 다른 말들과 차원이 달랐다. 두 말 모두 ‘글로벌 챔피언’ 혈통을 물려받은 ‘금수저 혈통마’였다. 부산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한국 말 ‘투혼의 반석(12번)’ 역시 이날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베팅은 최대 10만원까지
경마공원에 입장하면 모바일로 마권을 구매할 수 있다./김영은 기자
경마공원에 입장하면 모바일로 마권을 구매할 수 있다./김영은 기자
고민 끝에 일본 말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애플리케이션(앱)을 켜고 돈을 이체한 뒤 마권을 샀다. 앱이 위성항법장치(GPS)와 연동돼 렛츠런파크 서울에 입장해야만 마권을 구매할 수 있었다. 14번과 15번 ‘복승’에 1만9000원을 베팅했다. 복승은 베팅한 말 두 필이 순서와 상관 없이 1·2위로 들어온다는 뜻이다. 승률은 45분의 1이었다. 큰돈을 걸 필요도, 걸 수도 없다. 경마 한 게임에 한 명이 걸 수 있는 최대 금액은 10만원이다. 100원 단위부터 베팅이 가능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1만9000원은 ‘큰손’이었다. 마권 하나에 700원, 3000원을 베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친구들도 3000원을 베팅했다.

경기 5분 전, 전광판에 뜬 코리아컵 베팅 금액은 21억원을 넘어섰다. 응원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경기를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1800m 레이스가 시작됐다. 경주 초반, 한국의 선공이 매서웠다. 12번 투혼의 반석과 4번 글로벌히트가 선두를 달렸고 일본 말 14번 크라운프라이드가 경합을 벌였다. 어떤 말이 선두인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들은 쏜살같이 달렸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결승선을 300m 남기고 승부가 갈렸다. 초반부터 선두를 놓치지 않았던 14번 크라운프라이드가 10마신(마신은 말의 코끝에서 엉덩이까지 길이. 1마신은 약 2.4m)이라는 엄청난 거리 차로 여유롭게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다. 2위는 15번 글로리아먼디가, 3위는 한국 말 위너스맨이 차지했다.

생애 첫 경마 베팅은 성공적이었다. 1만9000원을 걸었는데 1만4000원을 벌었다. 73%의 수익률이었다. 얼마를 벌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베팅보다는 승부의 즐거움이, 수익률의 기쁨보다는 함께한 환호의 열기가 더 컸다.

경마가 도박이 아닌 레저라는 것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통계로도 나온다. 한국마사회에 따르면 이날 하루 입장 인원은 3만1127명으로 전주 대비 24.2% 증가했다. 인원 대비 매출액은 오히려 줄었다. 코리아컵이 열린 9월 10일 매출액은 148억5000만원으로 전주 일요일(146억8000만원) 대비 1.2% 증가하는 데 그쳤다. 적은 금액으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도박인 줄 알았는데”…경마, 2030 문화가 되다[체험기]
한국에서 경마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는 2040세대만 입장할 수 있는 ‘놀라운지’가 한몫했다. 한국마사회는 2017년 놀라운지 야외 관람대를 조성하고 젊은 세대와 아동을 동반하는 가족 고객 존을 따로 운영했다. 2020년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운영하지 않았고 지난해 노후 시설을 철거하며 2040 운영존을 따로 운영했다. 아기자기한 푸드트럭이 와서 간식거리를 팔았고 경마 초보 교실과 다양한 체험 교실을 운영하며 경마가 도박이 아니라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즐기는 문화라는 것을 알리려는 노력이었다.
왕실 참석하는 영국·공휴일 지정한 호주 종교적인 이유로 경마가 금지된 일부 이슬람 국가를 제외하면 경마는 세계적으로 큰 시장을 가지고 있는 레저 산업이다. 아시아에서 경마가 가장 발달한 홍콩은 지난해 경마 매출액이 23조원(1404억 홍콩 달러)을 넘어섰다. ‘멜버른 컵’이 열리는 호주의 빅토리아 주는 대회가 열리는 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영국에서는 매년 900회 이상의 경마 대회가 열린다. 이 중에서도 ‘엡섬더비’ 경마 대회에는 영국 왕실이 참석해 국민과 함께 환호한다.

한국 역시 경마 5대강국으로 거듭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한국마사회는 코리아컵 등 한국 경마 실황을 해외에 수출하는 등 글로벌 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상반기 한국마사회가 경마 실황 수출로 올린 매출액은 역대 최대인 489억원이었다. 12월부터는 새로운 시장도 열린다. 지난 3월 국회 문턱을 넘은 ‘온라인 경마 베팅’ 서비스가 12월부터 시범 운영된다. 금액 한도는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