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에 대한 기억하면 초등학교 근처 시장에 있던 뜨개방이 생각난다. 그곳 사장님에게 직접 겉뜨기와 안뜨기를 배워 목도리를 떴다. 목도리를 뜨다가 엉키면 그대로 사장님에게 가져가 도움을 구하곤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뜨개질을 하는 사람도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뜨개방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연희동 ‘바늘이야기’는 이렇게 희미해진 뜨개방의 추억을 소환해 준 공간이다. 주택을 개조한 소담한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연희동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동네 주민들의 먹거리를 담당하는 ‘사러가 마트’ 인근이다. 아무래도 시장과 뜨개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싶다. 1층부터 5층까지 건물 전체를 사용하는 바늘이야기의 1층은 판매 숍, 2층은 카페, 3층은 아카데미, 4층은 스튜디오, 5층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3층부터는 관계자 외 출입이 불가하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한쪽 벽면은 색색의 재봉틀용 실이 가득하다. 2층 천장까지 닿은 높은 정사각형 칸막이 서랍장 칸칸이 실이 들어차 있다. 바늘이야기의 가장 유명한 포토 존이자 이 공간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곳이다. 그다음 눈에 띄는 것은 행어에 걸려 있는 카디건과 니트 등의 옷가지다. 의류뿐만 아니라 목도리·장갑·모자·바라클라바·수세미·키링·컵코스터 등 다양한 작품이 진열돼 있다. 모두 뜨개질로 만든 것이다. 진열된 작품은 견본으로, 완제품을 구매할 수는 없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1층에는 완제품 견본을 포함해 다양한 질감·색상의 실과 코바늘·돗바늘·단수표시링 등의 부자재가 진열돼 있다. 수많은 선택지에 혼란스러운 초보자는 각 견본에 붙어 있는 종이 태그를 확인하면 된다. 태그에는 작품 제작의 난이도와 작품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비용, 샘플 작품에 사용한 실이나 사이즈, 필요한 재료 등의 정보가 기재돼 있다. 태그를 읽어봐도 재료를 찾기 힘들다면 일단 필요한 실이 있는 코너에서 원하는 색만 바구니에 담은 후 카운터로 가면 된다. 직원들이 그 외의 재료들을 챙겨 주니 간단하다. 사부작사부작 손으로 만들어 내는 세계
요즘 사람들의 취미는 골프·테니스·투자·맛집 탐방 등이다.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즐겨 했다. 청소년 잡지 와와109(WAWA109)나 엠알케이(Mr.K)에 삽입된 편지지를 조립해 만들기도 했고 줄 사람도 없는데 수줍은 고백이 담긴 러브장을 만들기도 했다. 학교 CA(Club Activity) 시간에 리본 공예를 배워 머리핀 등을 만들고 손수건이나 쿠션에 십자수를 놓았으며 방학 과제로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스킬 자수로 당시 인기 캐릭터였던 마시마로·뿌까·헬로키티 등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손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위아래로 스마트폰 화면을 스크롤하는 게 전부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무작위로 뜨는 게시물을 멍하니 쳐다보다 몇 분이고 시간이 흐른다. 촘촘하게 짜인 뜨개 작품과 형형색색의 실로 가득한 이 공간에 있다 보니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이 머리를 스친다. 연분홍빛 카디건을 입고 밝게 웃는 조카, 꽃 모양 코스터에 머그컵을 올려두고 차 한잔을 마시는 엄마, 늘 손이 차던 친구가 장갑을 선물 받고 좋아하는 모습…. 내 손으로 직접 뜨개질한 작품을 그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없는 색이 없는 가지각색의 실뭉치들은 묻혀 있던 창의력을 자꾸만 끄집어낸다.
바늘이야기에서 재료를 구입하면 종이로 된 도안을 함께 동봉해 준다. 이 종이에 있는 QR코드를 통해 유튜브 영상으로 뜨개질을 배울 수 있다. 초급자라면 종이 태그에 붙어 있는 레벨 1~4가 적당하다. 이제는 뜨개방의 사장님 대신 유튜브 영상이 언제 어디서나 뜨개질을 가르쳐 준다. 직접 설명을 듣고 싶은 이들은 미리 신청해 3층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으면 된다. 커피와 간식을 판매하는 2층 카페에서 삼삼오오 모여 뜨개질을 할 수도 있다. 이처럼 바늘이야기에서는 뜨개질을 매개로 다양한 이들과 연결된다.
미국의 현대 예술가 톰 삭스는 최근 서울에서 개최된 한 행사에서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위해 머리맡에 스마트폰 대신 메모지를 두고 잔다고 말했다.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 세상을 ‘입력’하는 대신 밤새 꾼 꿈이나 무의식을 ‘출력’하기 위해서다. 우리에게도 출력의 시간이 필요하다. 도파민으로 뒤범벅된 콘텐츠 입력은 잠시 멈추고 한 코 한 코 뜨개질로 영감과 잠재력을 표출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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