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만으로도 벅차건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도 전면전으로 내닫고 있다. 이에 이스라엘은 전 세계로 흩어져 있는 36만 예비군을 긴급 소집했다. 자국 예비군 호송을 위해 수십 개국으로 특별 항공편까지 띄웠다. 두려움, 반감, 희생정신, 보은 등 비상소집에 응하는 시민들의 키워드는 다양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한다.
세계 곳곳에서 총성이 거세지는 와중에 지난주 한국의 언론은 병역특례 이슈로 달궈졌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과 병역특혜의 정당성에 관한 조명이었다. 종목별 메달획득 난이도 편차, 단체게임 무임승차 논란, 국제대회가 아닌 예체능 공헌자와의 형평성까지 두루 점검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논란 같지만 실상 매번 깊이와 폭을 넓혀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고무적이다.
필자도 역사상 가장 큰 충격과 논란거리를 남긴 징병 사건들을 다룰까 한다. 로또 시리즈 주제에 맞춰 전쟁 중 발생한 추첨식 강제 징병 사례 세 가지를 추려봤다. 뉴욕 징병 폭동 사건,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추첨식 징병제, 베트남전쟁과 징병복권이 그것이다. 다소 긴 이야기들인 만큼 두 편으로 나눠 소개하겠다. 뉴욕 징집거부 폭동
1863년 7월 뉴욕의 징병거부 폭동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광기와 폭력으로 기록된다. 발단은 링컨 대통령의 새 징집 법안이었다. 장기화된 남북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려던 링컨은 30만 추가병력 동원을 구상했고 20~35세 사이의 남성 시민과 35~45세 사이의 미혼 남성 시민을 추첨에 의한 징집 대상으로 선포했다.
복무기간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시킨 이 법안에서 주목할 문구는 바로 ‘남성 시민’이다. 여성이 징집대상에서 배제된 것은 당시의 기준상 당연지사였다. 그런데 이 법안은 절대 다수의 흑인들 또한 징병대상에서 제외했다. 노예 신분이었던 그들은 시민이 아닌 ‘재산’에 불과했으므로 애시당초 징집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남성 시민’은 미국 시민권을 지닌 20세 이상 백인 남성을 뜻했다. 북부에 속한 뉴욕시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의 남북전쟁은 흑인 노예들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백인 남성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부조리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대의에 공감하더라도 강제 징병에는 우려와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노동계급의 저항이 거셌다. 당시 뉴욕 노동자의 다수는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들이었다. 1845년부터 1852년 사이 아일랜드에 발생한 대기근으로 인해 10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또 수백만의 인구는 해외로 이주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뉴욕 맨해튼의 항만 노역자로 정착한 것이었다.
악몽 같은 기근을 피해 대서양을 건너온 이들에게 노예해방 전쟁을 위해 목숨을 걸라는 국가의 주문은 수용되지 않았다. 대신 집단행동에 나선 이들은 5일간의 유혈 폭동을 주도한다. 당시 뉴욕시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19명이 폭동으로 사망했다지만 목격자와 가족 증언을 토대로 한 후대 사가들의 추정은 최대 1200명까지 치솟는다. 관공서 습격에서 흑인사냥으로
1863년 7월 11일 뉴욕시는 징병대상자 명단을 공개했고 이어서 남북전쟁 최대 격전지 게티즈버그 전투에 투여될 명단이 발표됐다. 당사자들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는 호명이었을 것이다.
7월 13일 월요일 아침, 5만명에 달하는 폭도들은 제일 먼저 징병사무소를 습격했다. 그리고 입영 대상자 명단부터 불태웠다. 이어 통신 마비를 목적으로 우체국을, 행정력 마비를 목표로 여타 관공서를 습격했다.
그러던 폭동이 이튿날부터 급선회해 흑인을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극악한 폭력이 성인 흑인 남성에게 집중되었다. 무차별적 린치와 구타가 자행됐고 나무에 매달아 교살하는 끔찍한 광경들이 벌어졌다.
흑인을 고용한 사업주들을 색출해 주택을 습격하고 업소도 파괴했다. 이에 더해 흑인 남성과 결혼한 백인 여성들, 또 노예제 폐지를 지지한 일부 백인들도 공격의 대상에 포함됐다. 심지어 맨해튼 중심부 42번가에 위치한 흑인 고아원까지 몰려가 아동들을 구타하고 사물과 집기를 불태웠다.
폭도들은 마치 도시 전체에서 흑인 존재 자체를 말살시키겠다는 극단의 혐오로 무장한 듯했다. 그사이 징병추첨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호레이쇼 시모어 주지사는 두문불출했고 뉴욕시장 조지 옵디케는 치안유지를 위해 연방군 파견을 요청하긴 했으나 시민들의 계엄령 선포 요구를 묵살하며 만행을 방조했다.
시위 사흘째인 7월 15일, 폭동은 브루클린과 스태튼아일랜드로 확산되었고 다음 날 게티즈버그 전투에 참전했던 뉴욕 연대 소속 4000여 명의 병력이 도착해 폭동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이미 수백만 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고 방화로 집을 잃은 약 3000명의 흑인 주민이 노숙자로 전락했으며 거리에는 흑인 시체들이 음산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1860년 인구조사에서 뉴욕의 흑인 인구는 1만2414명이었으나 폭동 후 1865년에는 9945명으로 감소해 182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폭동으로 와해된 흑인 고아원의 재건축은 인근 주민과 부동산 소유주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고, 결국 인구가 희박한 맨해튼 북부 외곽으로 밀려 할렘에 정착하게 된다.
발발 6개월 후 1864년 3월, 최초의 흑인 연합군 자원 부대가 뉴욕시에서 출범했다. 이들은 허드슨강에서 배를 타고 전장으로 떠나기 전 유독 기나긴 시가행진을 벌였다. 노예해방을 내건 남북전쟁에 흑인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참전한다는 의의도 있었지만 지속되는 불공정 논쟁과 성난 백인들의 혐오에 대한 자구책 성격이 더 짙었다. 왜 뉴욕이었고, 왜 오늘의 한국인가?
디트로이트와 보스턴을 비롯한 다른 도시에서도 징병거부 폭동이 일어났지만 뉴욕만큼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왜 하필 뉴욕이었을까? 대서양 저편 유럽과의 무역 거점이었던 뉴욕은 각종 물류와 유통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이 절실했다.
당시 운송회사나 인력회사를 운영하는 상인들은 아일랜드인들이 장악한 노동시장에 불만이 많았다. 항만과 해운 관련 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더 싼 노동력으로 물류가 원활해지면 일반 유통업과 소매상들의 혜택도 커지므로 뉴욕 상인들은 대체로 저렴한 흑인 노예의 대량공급을 기대했다.
그래서 내심 남부의 승리를 응원하거나 남북전쟁 중단을 외치는 세력이 의외로 강세를 띠었다. 부유 상인층의 후원을 받는 언론들도 링컨을 비난했고 새 징병법에 맹공을 퍼부어댔다. 이러한 뉴욕시의 정서가 아일랜드 출신 항만 노동자 및 여타 백인 저소득층의 징병거부 이해와 맞아떨어지면서 폭동의 파괴력을 배가했다.
징병추첨에 대한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에는 계급적 좌절감도 일조했다. 사적 거래로 병역 대리인을 고용하거나 정부에 300달러(현재가치 약 1만1000달러, 한화 1500만원)를 헌납하면 병역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링컨의 새 징병법은 부자들에게 관대했고 돈으로 징병 출구를 구매하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 근로자 평균 연봉을 훨씬 웃도는 이 금액은 특권층에게만 열려진 문이었다. 후에 21대 대통령이 된 체스터 앨런 아서와 22대 대통령 글로버 클리블랜드는 대리인을 전장에 내보냈고 철강업의 대부 앤드루 카네기, 금융재벌 J.P. 모건,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버지 프랭클린 루스벨트 역시 돈으로 병역면제를 구매했다.
당시 뉴욕에 거주하는 이민자 출신 백인 남성 노동자들은 미국사회의 약자였다. 남북전쟁이 흑인 노예들 때문에 일어났다는 선동에 쉽게 휘말렸고, 그 전쟁에 강제 동원되는 부당함을 겪어야 했으며, 흑인 노예가 해방돼 노동시장에 몰려든다면 자신들의 취약한 고용을 위협할 것이라는 공포에도 시달리고 있었다.
공포는 분노를 유인하고, 분노는 더 연약한 대상을 찾아 분출된다. 우리 사회에도 자신의 불운이 외국인 노동자나 여성들 때문이란 허구에 솔깃하고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정의구현이라는 서사에 미혹되는 청 남성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 더 약자인 외국인이나 여성을 향한 무작위 폭언이나 폭행으로 자신들의 불안을 해소한다.
청년 남성들의 불안과 불만을 증폭하는 거대 요인 중 하나가 인생이라는 길 위에 생긴 대형 싱크홀, 병역이다. 그래서 병역의 정의로운 설계가 중요하다. 보편 생명권의 핵심 사안임과 동시에 공정이라는 시대정신과 교차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대상으로 무엇을 기준 삼아 어떤 방식으로 선별할 것인지는 당대의 철학적 깊이와 해당 사회의 성숙도를 반영한다. 남녀의 신체적 차이에 대한 봉건적 민간신앙을 하루속히 폐위하고 법률-경제적 평등의 급진적 인프라가 될 양성징병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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