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는 등장하자마자 게임체인저란 표현도 부족할 만큼 크게 판을 흔들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챗GPT를 소개하며 ‘Google is done(구글은 끝났다)’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올렸고, 매체들은 ‘아이폰·인터넷을 뛰어넘는 혁명’이란 타이틀도 붙였다. 검색은 물론 반도체·금융·게임·교육·의료 등 챗GPT의 파급 효과가 전방위로 확산될 것이란 전망이 쏟아져 나왔다.
전문가들은 “챗GPT로 인해 생태계가 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비스 1년을 맞이하는 지금, 챗GPT는 무엇을 변화시켰을까. 콜라비의 서비스 종료“GPT의 등장으로 콜라비의 차별화 요소가 줄어들어 투자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지난 10월 10일 차세대 유니콘 후보 중 하나였던 업무 협업 툴 스타트업인 콜라비가 사업을 종료했다. 이들은 서비스를 종료하게 한 자금난의 원인으로 챗GPT를 지목했다. 콜라비의 서비스인 업무 협업 툴 사업의 본질이 ‘분절된 시간을 이어주고 쓸데없는 곳에 쓰이는 시간을 줄여주는 것’에서 ‘AI가 대신 처리해주는 것’으로 바뀌면서 회사의 차별화 요소가 줄어들어 투자자를 구하지 못했다는 설명이었다.
GPT의 위력은 상당했다. 특히 스타트업들은 진퇴양난이다. A란 법률자문 서비스가 있지만, 챗GPT에서도 해결이 가능하다면 데이터가 더 많은 쪽으로 사용자들이 옮겨갈 것이 뻔한 상황. 챗GPT가 나온 초기만 해도 챗GPT가 없으면 뒤떨어진 서비스로 보이니 무수한 기업들이 챗GPT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 개발에 골몰했다. 챗GPT를 서비스에 붙이려면 개발사인 오픈AI에 사용료를 내야 한다. 응용프로그래밍인터페이스(API)를 쓰는 데 GPT-4는 1000 프롬프트 토큰당 0.03달러(약 39.3원)로 알려졌다. 사용자의 프롬프트 입력이 늘어날수록 부담은 커지는 구조다. 당장의 수익이 나지 않는 출혈 경쟁이다.
문제는 올 한 해 경제 상황이 고금리에 불황으로 자금이 묶인 상황이란 점이다. 라지랭귀지모델(LLM)을 모아 풍성한 데이터를 쌓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이 시간을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게 스타트업의 문제였다. 업계 한 관계자는 “LLM을 쓰려면 몇 달을 써야 효과가 나는데 투자가 안 되니 몇 달을 버틸 힘이 없고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셧다운 하는 상황”이라며 “상당히 많은 스타트업들, 그중에서도 B2C단에서 접근하는 스타트업에서 위기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챗GPT는 스타트업의 생과 사는 물론 대기업의 목표까지 쥐고 흔들었다. SK텔레콤은 지난 6월 AI 컴퍼니로의 전환을 가속하기 위해 기존 에이닷추진단을 ‘AI서비스사업부’로 확대 개편하고 ‘글로벌AI테크사업부’도 신설했다고 발표했다. 대기업의 경우 연말이나 연초에 조직개편을 발표한다. 연중에 조직개편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SK텔레콤뿐이 아니다. 삼성, LG, 네이버, 카카오 등 굵직한 기업들이 앞다퉈 최신 AI 언어모델을 공개했다. 이용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데이터가 쌓이는 구조이다 보니 주도권을 갖는 게 급선무였다. 선두주자는 오픈AI이지만, 후발주자로라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사의 AI를 갖지 않으면 다른 나라, 다른 회사의 두뇌를 써야 하는 격이다. 투자사 입장에서는 제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타사의 비법 소스(오픈AI의 챗GPT)를 가져와서 만든 요리에 투자하기가 쉽지 않다. AI 투자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의 말은 GPT 이후의 생태계 변화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대기업 역시 문제를 안고 있다. AI가 투자자본수익률(ROI)을 맞출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수익 창출을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생성형 AI로 수익 창출을 한 기업은 없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전언이다. 지금으로선 ‘돈 먹는 하마’다. 활성 이용자가 중요한 만큼 선택을 받지 못한 기업은 투자 대비 나올 게 없는 불안한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수익, 패권, 변화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아직도 모호한 상황”이라며 “기업 입장에서 AI는 긍정보다는 불안 요소”라고 말했다. 승자독식, 위기는 기회지금까지 승자는 단연 오픈AI다. 생성형 AI 붐을 일으킨 오픈AI의 매출은 1년 새 약 50배로 급증했다. 오픈AI 최고경영자(CEO)인 샘 올트먼은 최근 직원들에게 올해 연간 매출이 13억 달러(약 1조7485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고 미국 정보기술(IT) 전문 매체인 더인포메이션이 10월 12일 보도했다. 이는 지난해 매출 2800만 달러(약 376억원)의 46.5배에 달하는 규모다. 올해 월평균 매출만 1억 달러(약 1345억원)를 넘는다.
그간 업계에서는 오픈AI의 챗GPT 이후 1년간 매출이 10억 달러(약 1조345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올트먼이 밝힌 규모는 이보다 30%가 증가한 규모다. 오픈AI의 매출 대부분은 챗GPT에서 나온다. 오픈AI는 지난해 11월 챗GPT를 처음 출시한 후 올 2월 유료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고, 지난 8월에는 기업용 챗GPT 엔터프라이즈를 선보이며 수익화에 나섰다.
오픈AI의 시장 가치는 800억∼9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전망된다. 올초 마이크로소프트(MS)로부터 100억 달러를 투자받으면서 평가받은 기업가치(290억 달러)보다 최대 3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오픈AI 기업가치는 2021년 140억 달러에서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오픈AI가 향후 투자에서 800억 달러 이상 기업가치를 인정받을 경우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스페이스X와 틱톡을 소유한 바이트댄스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비상장 스타트업이 될 전망이다.
오픈AI의 뒤를 이어 유수의 글로벌 AI 업체들에도 뭉칫돈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오픈AI의 잠재적 경쟁자로 꼽히는 앤스로픽은 아마존으로부터 40억 달러 투자를 약속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기업들도 대규모 투자를 유치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AI 스타트업인 바이촨은 알리바바·텐센트 등으로부터 투자금 3억 달러(약 4000억원)를 유치한 것으로 전해졌다. 단, AI 부문에 대한 투자도 코로나19 대응으로 유동성이 풍부했던 2021년 동기 대비로는 줄어든 상태이며, 일부 스타트업에 집중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기 속에 기회를 포착한 기업도 있다. 미국 스타트업인 코어위브(CoreWeave)는 생성형 AI 시장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대표적 사례다. 이 회사는 GPU 클라우드 전문 기업으로, 2017년 암호화폐 채굴 회사에서 사업 방향을 전환했다. 챗GPT로 GPU 수요가 폭발한 지난해 말부터 코어위브의 몸값이 뛰었고, 특히 지난 7월 엔비디아와 파트너십을 맺으며 신데렐라로 급부상했다. 강점은 엔비디아의 GPU를 비롯해 고성능의 GPU 리소스를 경쟁사 대비 최대 80% 저렴한 비용으로 최대 35배 빠르게 제공한다는 점이다. 거대 사모펀드의 대출로 2.3B 달러의 자금을 조달했으며, 대출의 담보물로 회사가 소유한 엔비디아의 GPU ‘H100’을 내걸 정도다.
AI 전문가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주요 포인트는 GPU, 모델링, 데이터에 있다고 강조한다. 엔비디아나 코어위브는 GPU에 강점을 둔 회사다. 자체 칩을 개발한 업체들이 생존하는 구조이다 보니,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등도 자체 AI칩 개발에 뛰어들었다.
올 한 해 주요 기업들이 생성형 AI를 쏟아내는 동안 독자노선을 걷는 기업도 있다. 애플이다. 애플은 지난 6월 연례 세계 개발자 회의(WWDC)에서 혼합현실 헤드셋인 ‘비전 프로’를 공개했다. 모두가 생성형 AI를 꺼내드는 시기에 디바이스를 공개한 것이다. 애플의 2시간가량의 기조연설에서 AI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 일부 외신에서는 “애플은 비전 프로를 통해 하드웨어 기술을 소개했지만 생성형 AI 혁명은 외면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똑똑한 녹자노선이란 평가도 나왔다. 운영체제(OS), 기기, 반도체 등 토털 솔루션을 보유한 애플이 생성형 AI를 못 만든 게 아니라, 자사가 소유한 애플 기기와 함께 사용할 애플 안의 AI를 만드려는 게 아니냐는 추정이다. 업계에서는 비전 프로를 시작으로 생성형 AI가 더해진 애플만의 풀셋이 내년쯤 공개될 것이란 소문이 무성하다.
하드웨어가 없다면, 소프트웨어에 힘을 실을 때다. 생성형 AI 시장에서는 데이터가 힘이다. 데이터를 보유하거나 시장이 원하는 데이터를 정제해서 가져다줄 수 있는 업체들이 살아남는다. 한국의 플리토, 크라우드웍스, 셀렉트스타, 테스트웍스 등이 최근 각광받는 이유는 데이터를 수집 및 가공해 공급하는 회사란 데 있다. 업계 관계자는 “챗GPT 1년 차인 지금은 위기와 기회가 혼재된 상태”라며 “GPU, 모델링, 데이터 등의 여부에 따라 부익부 빈익빈이 가속화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