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인도적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 와중에도 일부 한국 언론은 이스라엘 국민의 애국심에 관심이 더 많다. 90세 넘은 노인부터 해외 유수 대학원 여학생까지 자국 수호에 나선 영웅들의 이야기가 만발이다.
이스라엘에도 병역 거부와 전쟁 반대자가 있다. 조국의 부름이라면 만사 제쳐 두고 달려가는 애국자가 있는가 하면, 자국의 이해보다 정의를 우선시하는 양심주의자들도 있다. 병역 거부를 고수해 온 정통 하레디파와 유대교 지도자 랍비(Rabbis)들이 그 일부다. 랍비들은 정착민의 강제 추방과 납치, 고문, 살해에 대해 항의해 왔고 시민들에게 저항운동에 동참할 것을 종용해 왔다.
더 적극적 행동에 나선 것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1970년 4월 28일 일군의 이스라엘 고등학생들은 웨스트 뱅크 점령에 대한 항의 서한과 입대 거부 의향서를 총리에게 발송한 이른바 ‘12학년 운동 (Shiministim)’을 시작했다. 그 후 12학년 운동은 지속적으로 유지 확산되어 왔다.
현역병 사례로는 1982년 3000명의 ‘경계는 존재한다(Yesh Gvul)’ 운동이 있다. 레바논과 기타 점령지 내 군복무를 거부한 이 선언은 2002부터 재점화되어 전투 군인, 조종사, 특수부대원까지 동참했고 2014년 사상 초유의 정보요원 항명 사태로 이어졌다.
장교 10인 포함 43인의 정보요원들이 웨스트 뱅크 거주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모든 작전을 거부한 것이다. 이들의 보이콧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정보군 사령관에 보내는 공개서한 형식으로 이스라엘 신문 예디오스 아로노스(Yedioth Ahronoth)에 게재됐다. 징병의 달인,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국가가 소액의 리스크를 걸고 하는 복권과 같다.” 승전이라는 막대한 ‘당첨금’에 눈이 먼 그에게 징집은 자금 모집이었고, 수백만 청년의 목숨은 ‘소액의 리스크’에 불과했다. 근대 최고의 병역 저항이 나폴레옹의 군대 그랑드 아르메(Grande Armée)에서 발생한 것이 놀랍지도 않다.
그가 실행한 징집 추첨은 1798년 9월에 제정된 병역법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합병 영토의 시민들 중 출생 등록부상 19세가 되는 남성을 1차 대상으로 했다. 매년 6만 명의 무상 징집된 청년들의 목숨으로 나폴레옹은 유럽정복 도박판을 키웠다. 전쟁의 범위와 빈도가 늘면서 1810년부터는 징집인원을 12만 명으로 증원했다.
1812년 러시아 침공 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자 징병 대상을 대폭 완화해 무려 30만명을 추가로 끌어들였다. 프랑스에 합병된 이탈리아, 독일 및 여타 위성 국가의 젊은이들은 기혼이라도 징집 대상에 포함됐다. 면제 대상인 신장미달자(150cm)와 신체 부적합 판정자들도 재검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1800년대 초기 약 1/3에 달하던 면제 비율이 10여 년 사이 1/7로 줄었다.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정을 무너뜨리고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세운 프랑스 혁명은 여타 유럽 왕조들을 압박했다. 혁명의 기운이 자국에 미치기 전 영국,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의 왕조가 연합해 프랑스 공략에 나선다.
1792~1802년 10년간 거대 연합군과 전투를 치른 프랑스는 막대한 병력이 필요했다. 자원 입대와 용병으로 유지돼 온 이전 군대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에 프랑스 혁명으로 탄생한 제1공화국은 19세 이상의 모든 남성을 강제 징병하는 보편 징집제(Levée en masse)를 선포한다.
원론적으로 보편 징집제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 이념의 결과물이다. 왕정과 귀족정 대신 만민평등권에 기초한 근대 국가를 세운 프랑스는 권리만큼이나 의무의 평형성도 중시했다. 부자와 빈자, 귀족과 서민, 예술가와 농부 할 것 없이 동등한 자격과 의무를 분배 받는 질서.
이 신질서에 동의하는 모든 자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고, 그 시민들은 외세와 반혁명 세력으로부터 진보의 가치를 수호할 사명을 지녔다. 군대는 시민 모두에 의한, 또 모두를 위한 공적 자산이었으니 그것의 유지 강화 역시 모두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편 징집제는 수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비자발적 군인 수가 대거 늘면서 물자부족, 군기문란, 잔혹한 처벌도 덩달아 급증했다.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전쟁 공포에 시달린 초년병들의 이탈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반군이 된 이탈리아 탈영병
이탈리아는 나폴레옹 군징집이 가장 가혹하게 실행되었고, 그런 만큼 거센 저항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임과 동시에 이탈리아의 왕이었다. 1804년 이후 밀라노, 트렌토, 베니스, 롬바르디 등 북부와 중부의 투스카니와 로마를 거쳐 남부 나폴리까지 통치했다.
징집이 실행되는 기간 중에는 주민들에 대한 감시가 삼엄했다. 타지로의 여행도 엄격히 제한해 상인과 이주 농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누적된 불만은 아다 지역 병무 행정관 폭행 사태를 시작으로 아고나와 바소 포 지역의 징집관 살해 사건으로 기화되었다.
징병기피보다 심각한 문제는 탈영이었다. 아우구스토 카파렐리 국방대신은 탈영병을 “적군보다 무서운 적”으로 규정했고 “군의 인력 손실을 넘어 의복, 무기, 의료품, 각종 장비를 훔쳐 파는 최악의 범법자들”이라고 규탄했다. 실로 상당수의 탈영병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도적질이나 약탈에 가담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거대한 체포 군단이 조직됐다. 최근 방영된 넷플릭스 시리즈 ‘D.P.’는 3~4인의 단출한 구성을 보여줬지만, 나폴레옹은 사단 규모의 체포단을 운영했다. 채찍과 함께 당근도 썼다. 신고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해 민심을 통제했고 정기적 탈영 사면으로 병력 보충을 도모했다.
하지만 일부 탈영자들은 무장 반군이 되어 나폴레옹군을 괴롭혔다. 이들은 전쟁으로 궁핍해진 민간인 대신 물자가 넉넉한 군과 관공서를 습격 대상으로 삼았다. 군 복귀나 타지 정착이 불가했던 병사들이 형성한 ‘생계형’ 반군이었던 것이다.
프로스페로 바쉬에리와 지아코모 람베르티니 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정치적 세력도 커져갔다. 나폴레옹의 통치를 넘어 전쟁 자체를 거부한 이들은 르노(Reno) 강 유역의 징집 사무소와 관공서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반군 세력에 힘입어 1809년 교황 영지였던 무소네, 메타우로, 트렌토에서 징병거부 반란이 일어났다. 수개월간 지속된 게릴라성 반란은 나폴레옹의 레마르와 장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됐다. 반란 근거지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됐고 수백 명의 반란군이 학살됐다. 탈영과 징집거부가 남긴 사회현상들
역사학자 알렉산더 그랩은 1807~1810년 사이 기록된 이탈리아 출신 탈영병이 2만2227명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1813년 1월 프랑스 정부가 실시한 탈영 사면자만 해도 5만명이 넘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병역기피자와 탈영자의 수는 훨씬 큰 규모였음이 짐작된다. 대규모 군이탈자들은 몇 가지 흥미로운 사회 현상을 낳았다.
첫째, 인플루엔자처럼 유행한 군 괴담을 들 수 있다. 프랑스 사관들의 차별과 학대, 열악한 병영 환경, 최악의 급식과 가혹한 군형무소 등 공포 서사들은 나폴레옹 군이 직면한 가장 큰 내부적 위협이 됐다. 잔류 병사들의 사기 저하는 물론 추가 탈영과 징집 기피의 촉매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은 강제징집에 대한 탈영자들의 보복이었다.
둘째, 교회와의 협력구조다. 기피자나 탈영병들 상당수는 산속으로 숨어들었는데 이들이 의탁한 곳은 수도원이었다. 덕분에 나폴레옹 통치기간 중 이탈리아 수도원이 급팽창했다. 종교적 진정성과 무관한 귀의가 다수였지만 교회의 반응은 너그러웠다. 나폴레옹의 반교회 정책에 불만이 컸던 이탈리아 가톨릭 세력은 징집거부와 탈영의 은밀히 후원자였던 것이다.
셋째, 타지로 이주 혹은 도주한 청년들은 벽지 농촌 부흥에 기여했다. 도주 청년들은 마을의 연상 미망인들과 혼인하는 사례가 흔했다. 금전거래에 기초한 서류상 계약도 많았다고 역사학자 알란 포레스트는 주장한다. 아이가 생기면 징집 후순위로 밀리는 이점이 있어서 입양도 늘었다. 결국 도주자들이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의 우발적 구제책이 된 것이다.
도주 자금도 결혼 지참금도 없는 가난한 청년들은 자해로 병역을 피했다. 가장 대중적 방법은 총기 사용에 제약을 가하는 오른손 검지 절단이었다. 그다음은 송곳니 발치였는데 당시 쓰여진 라이플 장전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시력 손상도 유행했다. 병역회피용 신체 자해는 때로는 비겁의 오명으로, 때로는 저항의 상흔으로도 읽히지만 빈자가 겪어야 했던 상실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폴레옹에 의해 징집된 청년은 프랑스와 합병지역 외국인 포함 약 250만 명. 이들 중 최소 100만 명이 귀환하지 못했고, 그중 절반은 탈영으로 처형, 투옥 혹은 실종됐다 한다. 그의 20년 전쟁은 사상 최대의 병역기피자와 탈영병을 남겼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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