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폭격이 이뤄진 가자지구. 사진=AFP·연합뉴스
이스라엘의 폭격이 이뤄진 가자지구. 사진=AFP·연합뉴스
“중동 지역은 지난 20년간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한 나날들을 보내왔습니다.”
지난 9월 27일 미국의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이 한 말이다.

그러나 열흘 후인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급습했다. 분노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중동전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에도 전쟁은 최악의 시나리오로 전개되고 있다. 10월 30일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전쟁 3단계’를 선언했다. 본격적인 가자지구 내 지상전에 돌입한 것이다. 하마스를 지원하는 이란은 이스라엘이 ‘레드라인을 넘었다’며 본격적인 대응을 경고했다.

중재자 또는 해결사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은 이스라엘 편을 들어버림으로써 중재자의 입지를 잃었다. 이 공백 속에 각국은 전쟁 전개에 따른 이해득실 계산에 나선 분위기다. 중국은 중재자를 자처하며 중동에서 영향력을 키우려 하고 있고, 러시아는 미국의 관심이 우크라이나에서 이스라엘로 옮겨간 것을 반기는 분위기다. 영국은 무슬림이 많은 정치현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일각에서는 전쟁 장기화로 유가가 급등하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등 주요 산유국들의 힘이 더욱 강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의 정치사상가인 존 그레이는 110년 전통의 영국 주간지인 뉴스테이트먼트 기고를 통해 “불안정성과 위험을 안고 있는 ‘완전한 다극 체제’의 등장”이라고 표현했다.
꼬이는 미국의 행보10월 17일 가자지구 내 알아흘리 병원이 폭발했다. 이 폭발로 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들 중에는 어린아이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책임 공방이 오갔다. 하마스와 아랍 국가들은 병원 폭발의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했다. 이스라엘은 다음 날 “병원 폭발은 가자지구 무장단체의 오폭”이라고 반박했다.

공교롭게도 폭발이 일어난 것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 직전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텔아비브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을 할 예정이었다. 이스라엘 방문 후에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도 만날 예정이었다.

바이든의 구상은 첫 스텝부터 꼬여버렸다. 요르단은 병원 폭발을 이유로 예정돼 있었던 4자 정상회담을 취소했다. 아이만 사파디 요르단 외무장관은 “당사국들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전쟁과 학살을 끝내는 데 동의할 수 있는 시점에 회담이 재개될 것이다”며 “지금은 전쟁을 멈추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소용없다”고 말했다.

요르단을 포함한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이 팔레스타인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하마스를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 사이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역할은 별로 없어 보인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이 1990년대 걸프전 이후 최대의 외교적 도전에 맞닥뜨리고 있다”며 “당시에는 미국의 힘이 떠오르고 있었을 때지만 지금은 미국의 힘이 가라앉고 있을 때다”라고 평가했다.
10월19일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0월19일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가 카터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30년 중동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왔던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시작으로 1991년 마드리드 평화회담, 1990년대 오슬로 협정, 1995년 요르단 평화협정 등을 모두 미국이 주도했다.

하지만 2001년 9·11 테러 이후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2003년 이라크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이 시작한 이 전쟁은 중동을 더 큰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리비아는 2011년 ‘아랍의 봄’ 혁명 이후 무정부 상태로 접어들었고, 시리아 내전은 13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 혼란한 틈을 타 2014년 이슬람국가(IS)가 시리아와 이라크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며 자칭 이슬람 국가(ISIS)를 건설하기도 했다. ‘중동의 평화와 안정’이 멀어질수록 지역 내 미국의 영향력 또한 줄어들어 갔다.

미국은 결국 중동에서 발을 빼는 전략을 택했다. 이라크에 이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함으로써 ‘군사적 개입의 시대’를 끝냈다. 대신 중동 지역 내 ‘평화 구축’을 전략으로 택했다. ‘위험한 개입’이 불필요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핵심 고리는 오랫동안 적대 관계를 유지해왔던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외교관계 정상화’였다. 2020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주도하에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UAE)가 ‘아브라함 협정’을 맺었고, 이후 이스라엘은 바레인, 모로코 등과도 국교를 정상화할 수 있었다. 바이든 대통령 또한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를 중개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으로 미국의 중동 평화 정책은 ‘물거품’이 됐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경한 우익 정부’로 평가받고 있는 네타냐후 총리의 강경한 입장도 미국에는 부담이다. 10월 18일 이스라엘을 찾은 바이든 대통령은 가자지구 내 희생자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확전을 막지는 못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하마스가 전멸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존 그레이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이스라엘에는 ‘침략자’의 이미지가 점점 더 강하게 덧씌워질 것이다”고 말했다. 이미 전쟁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에, 그리고 미국에 이 전쟁은 ‘이겨도 진 싸움’이 될 확률이 높다. ‘중동’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동상이몽
중국은 중동 지역 내에서 힘이 빠진 미국의 빈틈을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편만 드느라 팔레스타인을 경시한다’는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아랍 국가들의 환심을 얻으려 노력 중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 다음 날인 10월 19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 참석차 방중한 무스타파 마드불리 이집트 총리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시 주석은 “빠른 휴전이 급선무”라며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을 기본으로 하는 ‘두 국가 해법’을 다시 강조했다.

이 ‘두 국가 해법’은 바이든도 언급하고 있는 해결책 중 하나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전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자의 국가를 설립한다는 방안이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이 앞세우고 있는 ‘두 국가 해법’에는 차이가 있다.

미국이 중동전략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안전이다. 이를 ‘중동 지역의 평화 구축’이라는 이름으로 실행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은 뒤따라오는 것이다. 전쟁 이후 바이든 대통령이 ‘두 국가 해법’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이전만 해도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던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10월 18일 중국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사진=연합뉴스
10월 18일 중국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사진=연합뉴스
중국이 언급하는 ‘두 국가 해법’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중동 평화 해결 구축의 전제 조건으로 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 이후 중국은 현재 ‘이란산 석유’의 가장 큰 고객이다. 이 같은 경제적 역학 관계를 바탕으로 중국은 지난 3월 이란과 사우디의 화해를 이끌어 내며 ‘중동 해결사’로서의 이미지를 심었다. 이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평화 회담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중동의 해결사’로서의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구상이다.

지난 10월 23일 중국 왕이 외교부장이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외무장관과 각각 전화 통화를 했다. 이 통화에서 그는 “중국은 민간인을 해치고 국제법을 위반하는 모든 행위를 강력히 규탄하며, 즉각적인 휴전을 통해 가자 주민들의 기본적인 생존 조건을 보장하길 호소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두 국가 방안을 이행해 팔레스타인 인민의 생존권과 건국권을 실행하는 것”이라며 “국제사회와 협력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고 독립 건국을 실현하는 데 힘을 보탤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워싱턴포스트는(WP)는 “이번 중동 위기는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중동 지역 내 ‘평화 중재자’로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며 “중국은 팔레스타인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지지하는 발언을 통해 이스라엘의 침략자 이미지를 부각하면서 ‘아랍 세계와 파트너십 강화’를 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란의 ‘반미 연대’ 구축
이번 전쟁과 러시아의 관계도 관심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뉴스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러시아에 유리한 정황이며, 미국 내에서는 우크라이나 지원 반대 여론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이번 이스라엘 전쟁을 두고 ‘하마스가 푸틴에게 준 선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공교롭게도 전쟁이 시작된 10월 7일은 푸틴 대통령의 생일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전쟁이 길어지며 국제사회서 고립이 심화되는 등 어려움 또한 가중되는 중이다. 이 와중에 터진 이스라엘 전쟁은 우크라이나에 집중되던 서방의 시선과 지원을 중동 지역으로 분산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의 의미가 크다”며 두 전쟁 모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하고 있지만, 미국 내에서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 내 다른 국가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번 전쟁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을 넘어 중동전쟁으로 확전될 경우 러시아에 대한 서구 국가들의 제재 또한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국가들로부터 석유와 가스 수출이 제한된 이후, 중동 지역이 그 대체 공급지 역할을 해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는 “중동의 여러 국가들이 이번 분쟁에 휩싸이며 에너지 위기가 심각해진다면 러시아에 대한 서구 국가들의 제재 또한 무력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그 이상을 바라는 모습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네타냐후 총리를 만났던 10월 18일 푸틴 대통령은 시진핑 국가주석을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에서 만났다. 지난 3월 모스크바 회담 이후 7개월 만의 정상회담이다.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정상회담 개막식 직후 3시간가량 별도의 회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WSJ는 이번 전쟁은 푸틴 대통령에게 국제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WSJ는 “러시아와 중국 등 미국의 주요 지정학적 경쟁국이 이번 사태를 이용해 힘의 균형을 흔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반미 연대’ 구축에 또 하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국가가 있다. ‘시아파의 맹주’ 이란이다. 최근 WSJ 등에서 하마스의 테러가 있기 전 이란과 회의를 했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기도 하지만, 아직 이란이 이번 이스라엘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란을 이번 전쟁의 주요 배후로 지목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전쟁이 더욱 커지길 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전쟁으로 미국이 추진하던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관계 정상화가 중단된 것 또한 이란으로서는 반길 만한 일이다. 이란은 이스라엘이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할 경우 자신이 고립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중동의 정세가 꼬여갈수록 하마스 등 무장단체를 지원하는 ‘시아파 맹주’로서 이란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 또한 이란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이란은 현재 러시아에는 공격용 드론을, 중국에는 석유를 공급하고 있다. 이미 러시아와 중국은 “이번 전쟁의 책임은 이스라엘에 있다”는 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오랫동안 하마스를 지지해 온 이란의 편에 선 것이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이란과 러시아, 중국의 동맹은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존 그레이는 “지금 세계는 1914년 이전과 같은 제국주의 경쟁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며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유럽의 패권을 이어갈 미국이라는 후계자가 있었던 반면, 이번에는 그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 차이다”고 꼬집었다.


런던=이정흔 객원기자 luna.jh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