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이야기 18

유엔대북제재위원회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북한이 편취한 가상자산이 2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실험에 따른 금융 및 무역 제재가 지속되면서 북한 정권은 재정 고갈과 민생파탄에 허덕여 왔다. 이에 밖으로는 가상자산 편취, 안으로는 각종 복권 발행으로 주민들의 여유자금 흡수에 분주하다는 전문가들의 해석이 잇따른다.

과연 북한의 복권 활성화가 재정 충당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세금이 없는 북한에서 복권 수익이 발생한다면 당의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수입원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1인당 구매력(PPP) 기준 세계180위 국가의 인민들이 의식주조차 부실한 판국에 어디서 복권 구매 자금을 추렴할 것인가.

여기서 북한 전문가들이 간과한 한가지 질문이 있다. 도대체 무슨 종류의 복권들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이나 한국 등 자본주의 국가에 일반화된 숫자 추첨형 복권이나 스크래치형 즉석복권을 염두에 뒀다면 큰 오산이다.

지난 6년간 북한에서 활성화된 복권 대부분이 운동 경기와 연동된 이른바 ‘체육추첨’이었다. 다수 추첨이 현금 대신 현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로또 복권과 사뭇 다른 성격을 띤다. 오히려 경품추첨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체육 종목 중 유독 농구, 축구, 경마만 복권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김정은의 취미나 관심사와 완벽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적 측면과 무관하게 김정은의 대중 지도력 강화, 민심 달래기와 관심 분산, 그리고 스포츠 외교력 증진을 노린 정치적 설계가 아니냐는 해석이 더 설득력을 지닌다.
백마를 타고 백두산 설원을 달리는 김정은. (소스: 더 드라이브)
백마를 타고 백두산 설원을 달리는 김정은. (소스: 더 드라이브)
1등 상금 1만원
꽤나 요란한 선전을 동반했던 ‘경마추첨’을 살펴보자. 경마추첨은 2017년 가을 미림 승마 구락부에서 열린 ‘승마 애호가 경기’에서 시범적으로 도입됐다. 2018년 4월 봄철 정기행사에서도 세 차례의 경주마 추첨이 진행됐다.

마권은 10필의 경주마에 대한 승부를 예측해 등수를 기입하는 방식이다. 1~3위 경주마에만 집중해 단승, 연승, 복연승 등 총 여섯 가지 승식을 제공하는 한국마사회 그것에 비하면 북한의 단일 승식 방식은 무척 단순한 구도다.

1위부터 10위까지 모두 기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또 여러 필의 순위를 맞혀야 하기 때문에 승률이 녹록지 않다. 4~5필 이상 순위를 정확히 맞히면 3등, 6~7필이면 2등, 8필 이상일 경우 1등이다.

1등 확률을 따져보니 36만2880분의 1이다. 그런 1등에게 돌아가는 상금은 북한 돈 1만원, 한화로 따지면 약 1만5000원이다. 그 뒤로 2등 3000원(한화 약 4500원), 3등은 2000원(한화 약 3000원). 한국의 1만5000원이면 주말 영화표 한 장 값이지만 북한 돈 1만원은 그리 적은 금액이 아닐지도 모른다.

북한 주민 1인당 평균소득(GNI)이 대략 남한의 30분의 1 (연간 평균 소득 143만원)이니 그쪽 1만원이 지닌 가치는 얼추 남한의 30만원쯤일까. 탐나는 액수지만 봄가을 통틀어 1년에 고작 6회 진행되는 행사에 30만분의 1 미만의 확률까지, 애당초 1등은 기획된 허구였음이 분명하다.

실제로도 1등 당첨자는 나온 적이 없다. 게다가 선전 영상에 등장하는 3, 4등 당첨자들에게 지급된 것은 과일바구니와 전기자전거 같은 현물이었다. 수익을 목적으로 한 복권의 진정성은 시쳇말로 ‘1’도 찾아볼 수 없다. 기획자나 참여자 모두에게서 말이다.

마권 판매량이 경마추첨의 ‘진심 결여’를 더 잘 드러낸다. 2017년 제2차 경주 마권(아래 사진 참조) 발행번호를 보면 2606이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앞자리 수 2는 2회차를 뜻하고 뒤 세 자리 606이 당일 판매된 마권 총량을 뜻한다. 당일 세 차례 경주의 총 판매량도 세 자리를 넘지 않았다.

경마추첨은 실제 판매와 수익이 아니라 홍보와 심리 효과를 노린 장식품 같은 존재다. 그런 측면에서 “북한의 복권사업이 김정은 정권의 재정 확충 방안이다”라는 일부 전문가와 언론의 코믹한 주장은 가급적 멀리하는 게 좋겠다.
북한의 마권 경마추첨표 (오늘의 조선 ‘가을철 승마애호가 경기’ 동영상 캡처)
북한의 마권 경마추첨표 (오늘의 조선 ‘가을철 승마애호가 경기’ 동영상 캡처)
2차 경마 경기 결과 (오늘의 조선 ‘가을철 승마애호가 경기’ 동영상 캡처)
2차 경마 경기 결과 (오늘의 조선 ‘가을철 승마애호가 경기’ 동영상 캡처)
백마 마케팅의 전통
초기부터 김정은은 ‘남성적’이고 호방한 페르소나 구축에 각별했다. 문학과 영화, 음악과 요리 등 서정의 상징이었던 선대 김정일과 대조되는 젊고 활력 있는 지도자 이미지. 그래서 승마와 스키 같은 고급 레저를 즐기고 축구 같은 강렬한 스포츠에 열광하는 트랜디한 모습을 연출해 왔다.

대외적으로 호전적 군사 강경책과 동시에 세계사 흐름을 따라가는 진취성을 과시하고, 대내적으로는 자국 인민들에게 자유주의적 무드와 일상의 여유를 제공한 양가적 카리스마가 그의 벤치마케팅이다.

남북경협 무산 이후 혹독한 내외정세 속에서 북한 특유의 배짱과 소프트파워를 과시할 필요가 커졌다. 갖은 압박에 시달린 인민들 역시 궁핍한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풍요로운 삶의 느낌, 어쩌면 문화적 허영과 그럴듯한 판타지에서 위안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즈음 등장한 것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 설원을 질주하는 김정은의 모습이었다. 혹한 속에 상의를 벗고 백마에 올라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연상케도 하고 험준한 알프스를 넘는 백마 위 나폴레옹을 모방한 듯도 하다.

이 초현실적인 이미지 선전은 이른바 ‘백두혈통’의 조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마 타고 항일 무장투쟁했다는 김일성의 설화를 시작으로 ‘장군님 백마 타고 달리신다’는 노래가 제작된 김정일 시절까지 면면히 이어진 가문의 전통이다.

실망스럽게도 ‘주체 조선’의 백마 대다수는 러시아산이다. 김정은이 집권한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총 58만 달러의 비용을 투여해 138마리를 들여왔다. 로이터통신은 2022년 11월 초 러시아와 북한 간 철도가 재개했을 때 북으로 간 첫 열차에도 인민을 위한 식량 대신 30마리의 말이 호송되었다고 전한다.

러시아산 백마 대부분이 오를로프 트로터(Orlov Trotter) 품종이다. 놀라운 속도와 강인한 체력으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이 품종은 18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의 알렉세이 오를로프 백작에 의해 개발됐다. 김정은이 올라탄 백마도 북한 경주마 대다수도 오를로프다.

두당 평균가격 870만~1350만원인 이 경주마들은 미림 승마 구락부에서 특별 관리를 받는다. 물론 승마 구락부를 기획한 장본인도 김정은이다. 어릴 적부터 승마를 즐겨온 그는 승마와 경마를 단순 스포츠와 레저 이상의 정치 메타포로 승화시켰다.

그 메타포의 시각적 구현이 백두산 정상 순백의 설원을 백마와 함께 달리는 ‘백두혈통’의 모습이었다. 매서운 바람을 거슬러 차가운 대지를 달리는 오를로프의 이미지가 대내외 시련에 굴하지 않고 거센 기세로 항전하는 ‘백두혈통’과 북한 인민에 대한 정치적 유비이자 찬사로 전유된 것이다.
2017년 10월 경마장에서 질주하는 오를로프 말들. (조선의 오늘)
2017년 10월 경마장에서 질주하는 오를로프 말들. (조선의 오늘)
누구를 위해 말은 달리나
하나 명백한 것은 북한의 승마 구락부는 인민 대중이 아닌 상층 간부와 일부 부유층 그리고 외국인 접객을 위한 위락시설이란 점이다. 마장술을 위한 실내 경기장을 비롯해 12개의 트랙과 복합시설을 갖춘 이곳은 특이하게도 북한의 공군, 로켓사령부, 해군 및 육군 사단이 운영하는 기지 안에 위치해 있다.

당연히 민간인의 접근이 용이한 대중오락 시설과는 거리가 멀다. 접근이 용이한들 승마 같은 고급 레저를 북한 인민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2017년 가을 마술과 장애물 경기에 참가한 출전자들을 살펴보자.

‘보통강’이란 오를로프 암말(7살)로 출전한 평양외국어대학의 박현순(23세)과 박효순(22세) 자매를 제외한 전원이 10대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창광고급중학교 김휘성(16세), 동대원고급중학교 리지향(16세), 동대원고급중학교 리진희(16세), 동안고급중학교 리강성(17세) 등이 명단에 보인다.

김정은은 윗세대가 누리지 못한 품격과 여유를 북한 새싹들에게 안겨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수혜는 ‘부모찬스’를 지닌 극소수의 행운아들만의 것이다. 이 행운아들 모두 승마협회 회원이고 러시아산 오를로프를 탄다.

승마 구락부가 제작한 홍보 영상을 보면 “승마 바람과 더불어 보다 풍만해지는 우리 생활의 정서”라는 부제가 눈에 띈다. 영상 후반부에는 “보면 볼수록 우리 인민의 불굴의 기상과 행복하고 락관에 넘친 모습 그대로”라는 선동성 자막도 선명하다.

하지만 승마장에도 경마장에도 인민들은 없다. 전시, 선전, 과시가 목적이고 다중의 체험, 향유, 참가는 명분일 뿐이다. 경마추첨도 “북한은 승마와 경마를 즐기는 여유 있는 나라”라는 정치 메시지에 동원된 흥행 이벤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