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사, 3단계 피해자에 위자료 500만원 지급하라” 판결

[법알못 판례 읽기]
환경보건시민단체 관계자가 2022년 3월 30일 서울 여의도 레킷(구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기업 옥시RB 규탄 및 책임촉구 캠페인 및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환경보건시민단체 관계자가 2022년 3월 30일 서울 여의도 레킷(구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기업 옥시RB 규탄 및 책임촉구 캠페인 및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에게 제조판매사가 민사상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처음 나왔다.

대법원은 제조사인 옥시레킷벤키저(옥시)의 가습기살균제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A 씨가 폐질환을 앓게 됐다고 판단했다. 옥시의 민사상 배상책임이 법정에서 처음 확정되면서 앞으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가 쏟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옥시 제품 결합으로 폐 손상”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11월 9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A 씨가 옥시레킷벤키저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상고심에서 원심대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옥시의 배상책임이 인정돼 위자료 500만원 지급이 확정됐다. 대법원은 “옥시가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에 설계 및 표시상 결함이 있고, 원고는 그 결함으로 인해 폐가 손상되는 손해를 입었다”고 판단했다.

A 씨는 2007년 11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옥시의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다. 그는 2013년 5월 간질성 폐질환 등의 진단을 받았다.

질병관리청 전신인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살균제 때문에 폐질환이 생겼을 가능성이 낮다”며 2014년 3월 A 씨에게 ‘가능성 낮음’(3단계) 판정을 내렸다. 3등급은 가습기살균제 노출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다른 원인을 고려할 때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질환 가능성이 작다는 의미다. A 씨는 2015년 2월 피고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A 씨는 1심에선 패소했지만 항소해 판결을 뒤집었다. 2심은 A 씨의 청구내용 중 일부를 받아들여 옥시에 위자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A 씨 진료소견서와 옥시 관계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실, 질병관리본부의 실험 결과 등을 고려하면 옥시의 가습기살균제에 하자가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며 “A 씨가 정상적인 용법으로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음에도 신체에 손상을 입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도 이 같은 판단을 그대로 유지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A 씨가 ‘가능성 낮음’ 판정을 받은 조사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폐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을 판정한 것일 뿐”이라며 “손해배상 소송에서 가습기살균제와 그로 인한 질환의 인과관계 유무 판단은 사용자의 구체적인 증명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19년 8월 27일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나열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2019년 8월 27일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 청문회에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나열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소송 줄 잇나


법조계에선 이번 판결 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줄줄이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뛰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2011년 영유아, 임산부 등 수십 명이었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조사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대폭 불어났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 가습기살균제 피해지원 종합포털에 따르면 2023년 10월 말 기준 피해자 수는 7877명에 달한다.

옥시가 형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데 이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확정 판례까지 생기면서 피해자들이 옥시와의 승소 가능성을 점치는 의견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대법원은 2018년 1월 신현우 전 옥시 대표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이 재판에서는 옥시의 가습기살균제에 쓰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성분이 피해자들의 사망 원인이라고 인정됐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환경보건시민센터, 환경보건전국네트워크 등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서울 여의도 옥시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옥시는 모든 피해자에게 배·보상하고 중증 폐질환, 폐암과 같은 만성질환에 대한 추가 대책을 제시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옥시 영국 본사의 관련자들은 조속히 한국 검찰‧경찰의 수사를 받고 한국의 피해자들과 한국 국민에게 사죄하라”고도 했다.

옥시와 다른 성분의 가습기살균제를 쓴 기업들의 경영진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3부는 2021년 1월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 11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은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했다.

당시 재판부는 진상 규명을 위해 진행한 동물실험과 역학조사 등에서 CMIT·MIT 성분이 담긴 가습기살균제가 폐질환과 천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판단 근거로 삼았다.

재판부는 “실험을 실행한 교수와 전문가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CMIT·MIT 사용과 사망 또는 상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취지로 진술하지 못했다”며 “일부 전문가는 ‘사람에게 이미 폐질환 등이 발생했다’는 전제를 하고 CMIT·MIT 성분의 영향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동물실험을 했음에도 뒷받침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돋보기]

가습기살균제 사태 12년 흘렀지만…피해구제 아직도 미확정


가습기살균제 사태가 터진 지 12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피해구제 방안은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관련 기업들이 분담하는 금액을 두고 좀처럼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지난 9월 26일 옥시레킷벤키저·애경산업·SK케미칼 등 기업 측 관계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단체 대표 등과 함께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관련 공청회를 열어 피해구제를 위한 최종 조정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해 조정위원회가 내놓은 최종 조정안에 옥시와 애경이 동의하지 않으면서 구제방안을 확정하지 못했다. 조정위는 지난 3월 이 사태와 관련 있는 9개 기업에 적게는 7795억원, 많게는 9240억원을 부담할 것을 주문했다.

옥시와 애경은 가습기살균제 원료물질을 제조한 SK케미칼이 더 많은 금액을 부담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번 최종 조정안대로 이행하면 피해구제가 완전히 끝난다는 ‘종국성’을 보장해달라고도 요구했다.

박동석 옥시 대표는 “근원적인 책임이 있는 원료물질 사업자에 총액의 20%만큼의 분담금만 부과했다”고 지적했다. 채동석 애경 대표도 “조정안 수용은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요건을 명확하게 반영한 조정안을 요청했다”고 했다.

가습기살균제 사태는 2011년 가습기살균제를 자주 사용한 영유아, 임산부, 기저질환자가 폐섬유증을 앓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불거졌다.

가습기살균제 주성분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등이 ‘정부 유해성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흡입독성 평가를 거치지 않은 채 20년 가까이 판매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성분은 피부에 닿을 때는 문제 되지 않지만, 흡입할 때는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음이 밝혀졌다.

2014년 처음으로 공식 피해 판정이 나오면서 피해구제 움직임이 시작됐다. 2017년에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올해 10월 말 기준으로 집계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수는 총 7877명이며 이 중 1835명이 사망했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