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이야기 20

스크래치 즉석복권(이하 즉석복권)의 판매 성장률이 세계적으로 가파르다. 국내에서는 ‘스피또1000’이 꽤나 인기 있다. 그런데 이 복권 58회차 20만 장이 회수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21년 11월이었다. 데이터상의 오류 때문이었다고 기획재정부는 발표했다.

문제는 58회차 1등 5억원 당첨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2등 2000만원 5장의 당첨자들도 없었다. 발행된 총 4000만 장의 판매율은 99.34%. 그러니까 회수된 20만 장 속에 1등과 2등 5장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일반 복권과 달리 즉석복권은 인쇄 당시 각 등수의 금액과 매수가 정해진다. 지정된 수량이 모두 판매되었다면 무조건 최고 금액 당첨자가 나와야 한다. 미확인, 미수령, 복권 분실 등 극히 예외적 사례가 아니라면 말이다.

58회 즉석복권의 판매는 2022년 2월 이미 종료되었다. 하지만 당첨금 지급 기한 2년이 지난 2023년 2월 말까지도 당첨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57회에도 2등 1장이 나오지 않았지만 58회처럼 1등과 2등 5장 전부 누락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당연히 비리와 조작에 대한 추측이 무성할 수밖에.

불신과 배신감이 배가된 이유가 더 있다. 판매물량의 95%가 소진된 시점까지 1등이 나오지 않았다는 정보만 공개되었고 그 후 높은 당첨 가능성을 인식한 구매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매수에 나서게 됐다. 그런데 ‘불량복권’ 20만 장 회수 사실은 마지막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만약 그 20만 장 안에 1등을 포함한 거액 당첨 복권들이 있었다고 가정하면 2021년 11월 회수 시점 이후부터 2022년 2월까지의 구매자들은 ‘꽝’이나 소액당첨금만 걸린 복권을 구매한 꼴이 되고 만다. 동행복권 측이 1등 복권을 의도적으로 회수했다는 주장이 제기될 법도 하다.
이렇듯 논란이 거세지자 올해 6월 기획재정부는 20024년 8월을 기점으로 블록체인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블록체인 기술은 판매, 유통, 당첨정보 등 핵심 데이터를 암호화한다. 이 경우 복권위원회나 수탁사업자도 복권 일련번호 등의 데이터를 확인할 수 없어 주최 측의 조작 개입은 어려워진다. 그렇다 한들 각종 의혹으로 깊게 손상된 신뢰가 쉽게 회복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범죄로 들끓는 세계 각지의 즉석복권
즉석복권을 둘러싼 불신과 잡음은 중국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2004년 중국 시안 스포츠 즉석복권 사건은 주모자인 복권 제작업자가 복권 인쇄과정에 자신들만 알아볼 수 있는 특수 표식을 남기는 농간으로 유명세를 탔다. 공범 4명이 표식을 지닌 복권을 찾아 구매했고 이 수법으로 BMW 자동차와 12만 위안(한화 약 2100만원) 상금을 가로챘다.

유사한 사건이 올해 3월 미국에서 재발했다. 플로리다주 복권판매점 직원은 미세 바늘로 스크래치 커버 부분 일부만 제거해 당첨 복권들을 알아내는 수법을 썼다. 그녀는 복권을 판매하는 편의점을 옮겨 다니며 근무했는데 높은 상금의 복권들을 발견하는 즉시 자신이 직접 구매해 부당이익을 취한 것이다.

시스템 오류나 관리운영자 비리만큼 소비 유통과정의 부정행위도 빈번하다. 2017년 인도에서는 가짜 즉석복권 판매 사기단이 적발됐다. 피해자들에게 가짜복권을 판매했을 뿐만 아니라 당첨금 수령을 위한 선불 수수료까지 갈취한 이중 사기였다.

절도는 가장 흔한 범죄 유형이다. 캐나다 퀘벡주의 편의점 직원은 4개월간에 걸쳐 8만 달러(약 7700만원) 상당의 즉석복권을 훔쳐왔고 훔친 복권으로 당첨된 상금 모두를 편취했다. 미국 텍사스주의 한 여성은 사촌 소유의 100만 달러 당첨 복권을 훔쳤다가 구속됐다. 모두 올 해 일어난 사건들이다.

복권 위조 및 변형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2016년 영국의 조니 스미스라는 남성은 복권위원회 페이스북에 25만 파운드(약 4억800만원)에 당첨된 즉석복권 사진을 올렸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식별코드가 있는 왼편 귀퉁이가 불에 탔고 그 위에 또 잉크를 쏟아 복권이 손상되었지만 상금 자격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 아니냐는 당돌한 문의와 함께 말이다(아래 사진 참조).

사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술한 일종의 익살에 가까웠다. 이에 복권위원회는 페이스북 답변을 통해 조니 스미스가 더 큰 화재를 대비해 화재보험에 가입할 것과 조작된 숫자의 깔끔한 부착을 위한 고성능 접착제 구매를 권하며 유머로 응수했다. 즉석복권을 둘러싼 이들의 프랭크(prank)에는 나름 사연이 있었다.

수잔 힌트라는 여성이 3300만 파운드(약 538억원) 당첨금의 위조복권으로 상금을 요구한 황당 사기가 그것이다. 세탁기에 넣어 당첨숫자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억지를 내세웠는데 조야한 수법에 비해 너무 큰 당첨금인지라 영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조니 스미스와 복권위원회 간의 페이스북 공방은 힌트 사건에 대한 밈(Meme)이었던 것이다.
즉석복권, 범죄와 중독의 블랙홀[최정봉의 대박몽]
조니 스미스가 제시한 가짜 당첨 즉석복권. (페이스북)
높은 범죄율, 강한 중독성
즉석복권은 일반 복권에 비해 각종 범죄와 편법에 쉽게 노출된다. 2018년 미국재정교육재단 (NEFE) 서베이에 따르면 구매자의 23%가 복권 관련된 범죄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반면 일반 복권 구매자의 경우 피해사실은 12%에 그쳤다. 즉석복권 관련 범죄율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상대적으로 높은 구매 빈도와 강한 중독성을 지목할 수 있다. 통상 주 1회 정기추첨을 실시하는 일반 복권과 달리 즉석복권은 언제든지 구매할 수 있으며, 즉각적인 확인이 가능하므로 구매 주기가 매우 짧다. 일반 복권에 비해 상금 규모는 작지만 당첨 확률이 더 높은 것, 그리고 상이한 모양과 패턴을 지닌 종별 다양성 역시 높은 중독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

중독 구매가 늘수록 당연히 소비지출이 커져 개인 재정에 압박요인이 된다. 한국의 경우 가격이 500원, 1000원, 2000원이지만 미국과 일부 유럽에서는 20달러, 30달러, 심지어 50달러짜리 즉석복권도 흔하다. 부담스러운 구매비용에도 불구하고 수입과 금융거래가 제한적인 취약계층의 경우 즉석복권에 의존하는 성향이 뚜렷하다.

중국 허베이성 한단에서 일어난 사건은 즉석복권 중독이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범법 사례다. 2007년 중국농업은행 금고관리 매니저 2명은 5095만 위안(약 92억원)의 은행돈을 빼냈다. 일당은 놀랍게도 즉석복권 구매(당사자들은 투자라고 불렀다)를 위해 모험을 감행했고 복권 당첨금이 생기면 절도한 돈 모두 은행에 되돌려 놓을 계획이었다 한다.

계획대로 될 리 없었다. 하루에 무려 18억원어치 복권을 구매한 날도 있었지만 회수한 당첨금은 1700만원에 불과했다. 일당 중 렌 샤오펑은 수개월 도주기간 중에도 오직 복권 생각뿐이었다고 진술했다. 중국 최대 규모 절도 사건의 주역이 된 이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았다.
즉석복권, 범죄와 중독의 블랙홀[최정봉의 대박몽]
여성과 청년 구매자가 부쩍 늘어난 중국 즉석복권. (AFP)
즉석복권 중독 청년들
NEFE는 즉석복권 구매자들이 일반 복권 구매자들에 비해 저소득층과 저학력이라고 밝혔다. 가처분 소득이 많지 않고 저축이나 금융소득도 제한적인 계층이 주 소비층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최근 조사에서도 복권 구매자의 12%는 은퇴자, 즉석복권 구매자의 60%는 한 달 5000~6000위안(90만~102만원) 수입, 그 나머지는 이주 노동자임이 드러났다. 이들 취약층과 함께 저소득 청년들의 복권 과소비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산시성 출신 여성 샤오푸(24세)는 중독이 한창 심할 때는 하루에 1만7000위안(300만원) 상당의 복권을 구매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결국 즉석복권에 빠져든 지 불과 3개월 만에 25만 위안(4500만원)의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후난성 거주 라이브 스트리머 첸잉(28세)은 지난 6개월간 즉석복권에 10만 위안(약 1800만원)을 지출했다. 소셜미디어 플랫폼 두음(Douyin)의 팔로워들을 위해서다. 중국 청년들 사이에 복권 열풍이 불자 즉석복권 관련 인플루언서가 된 것이다.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던 그녀의 팔로워 수는 6개월 만에 4만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첸의 팔로워 프로필을 보면 전체의 3분의 1은 23세 미만이고 그중 상당수가 대학생임을 알 수 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아르바이트나 인턴십보다 복권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믿음이 강하다고 한다.

중국 재정부 자료에 따르면 2023년 1월부터 9월까지 중국 본토인의 복권 소비 금액만 4285억 위안(77조원)에 달했다. 이는 전년 대비 55% 증가한 수치다. 즉석복권 판매만 놓고 보면 2023년 첫 9개월 동안 80.7% 폭증한 868억 위안(15조6000억)이다.

80% 폭증, 그 동력은 중국 청년들의 물욕과 좌절, 한탕주의와 우울,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관과 공포였다. 갑자기 한국 청년들은 안녕한지 궁금해진다.
즉석복권, 범죄와 중독의 블랙홀[최정봉의 대박몽]
중국 즉석복권 결과를 확인하는 첸잉. (AFP)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