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인구 늘린 호주의 해법 키워드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우호 이민정책과 터무니없는 임대료 상승에 저항하는 사회적 기업가의 만남”
파랑이 일렁이는 바다, 끼룩끼룩 갈매기의 울음소리, 물자를 가득 실은 컨테이너가 밀려드는 미항의 도시….
한국에서 비행기로 13시간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호주의 멜버른은 한국의 부산을 쏙 빼닮았다. 두 도시는 서울, 시드니에 이은 제2의 도시이자 아름다운 항구 도시다. 한국과 호주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IT산업 거점으로 육성하며 각각 세계 최고의 게임 전시회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공통점이 많은 두 도시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도시를 이루는 근본 자원인 ‘인구’ 문제다.경제와 산업의 근간, 이민정책1992년을 정점으로 인구가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부산은 대도시 중에서는 최초로 인구 자연 감소에 접어들었다. ‘노인과 바다’로 불릴 정도로 청년층을 중심으로 순유출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부산 16개 기초자치단체(군·구) 중 7곳(43%)이 ‘소멸위험’ 판정을 받았다.
멜버른은 호주의 넘버원이다. 제2의 도시이나 인구 기준으로는 시드니를 앞선다. 올해 4월 호주 현지 언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멜버른은 90년 만에 인구수로 제1의 도시 시드니를 역전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유학생과 도시 거주자들이 떠나면서 인구가 급감했던 멜버른의 변화다. 제2의 도시 멜버른은 어떻게 인구 1위의 영예를 안았을까. “호주 이민정책은 굉장히 우호적이죠. 이민자의 경제 기여도가 높다는 것을 정부 차원에서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멜버른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2km 떨어진 노스 멜버른에서 만난 건축가 크리스나 청(58)은 홍콩 출신의 이민자 3세다. 청의 조부모는 1950년대 노스 멜버른에 정착했다. 공장과 대형 물류센터가 주종을 이루었기 때문에 주로 남성 근로자, 저임금의 노동자계층과 이민자들이 모여 산 곳이었다. 자연스레 그의 커뮤니티도 이민자들로 형성됐다. “중국계, 한국계, 이탈리아계, 그리스계 이민자들이 꽤 많이 살았어요. 유학생들과 전문 인력들이 유입됐고, 이들이 빅토리아주를 넘어 호주의 경제성장에 한몫을 했죠.”
청에 따르면 멜버른이 위치한 빅토리아주의 이민정책은 꽤나 파격적이다. ‘이민’과 ‘영주권’은 이미 호주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단어다. 주정부별로 정책이 각기 다른데 빅토리아주의 경우 최대 5년 동안 빅토리아주에서 거주하고 일할 수 있는 기술 이민자를 위한 주정부 지정 임시 비자가 있다. 기술 이민 비자, 즉 ‘491 비자’로 더 유명한 저밀도지역 주정부 후원 비자다. 비자 기간 동안에 3년간 인구 저밀도 지역에서 거주하고, 3년간 일을 하면서, 매년 5만3900호주달러 이상의 수입을 신고하면 호주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비자 선택지 중 하나다. 20년째 멜버른에서 거주 중인 통역사 레이첼 리는 “의사, 간호사처럼 지방 소도시에 꼭 필요한 직업군이 491 비자를 통해 채워지고 있다”며 “호주 경제와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비자 카테고리”라고 설명했다. 원래는 빅토리아주의 인구 저밀도 지역만 신청이 가능했으나, 올해 3월 멜버른 도시거주자에게도 해당 비자 옵션이 한시적으로 개방됐다. 주정부가 지정한 할당량보다 신청 건수가 적어서 저밀도지역에서 멜버른 도심까지 491 비자 옵션을 확대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보건 및 교육 등 특정직업의 경우 최소 비자 요건만 충족하면 영업일 기준 5일 이내 비자 승인이 되는 패스트트랙도 가능하도록 했다. 주의 경제적 성장과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이민자들을 끌어들이는 주정부의 파격적 선택이다.
멜버른 소재 이민 중개인 주하 바자(Jujhar Bajwa)는 현지 인터뷰에서 “빅토리아주에서 491을 신청하려면 빅토리아 지역 외부에 거주하는 지원자들도 결국 지정된 지역에서 거주하고 일하기 위해 빅토리아주로 이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동안 해당 지역에서 거주하고 취업해야 하기 때문에 주의 인구 증가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비자가 아무리 제역할을 하더라도 도시 내 인구 증가를 막는 가장 큰 벽은 부동산 가격이다. 청이 거주하는 노스 멜버른도 한때는 저임금을 받는 이민자들의 땅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경제적 자유를 얻고 일대에 카페와 부티크숍 등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 주택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멜버른 지역 중간값보다 최소 30%가량 높은 가격대다.
베트남·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많이 몰려사는 지역인 푸츠크레이도 도심에서 꽤 떨어져 있지만 최근 젊은이들이 들어서면서 집값이 뛰고 있다.
멜버른 시내를 강타한 젠트리피케이션에 젊은 청년들과 유학생, 이민자들은 또다시 외곽 지역으로, 비교적 저렴한 타지로 밀려나야만 했다. 현재 부산과 같은 한국의 도시들이 겪는 인구 감소의 대표적 유형이다. 민간 주도의 사회주택 공급 “멜버른의 주택 시스템은 망가져 있었어요. 불평등하고 지속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건축가들은 양질의 주택을 합리적인 가격에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이팅게일하우스’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멜버른 시내에서 자동차로 35분 거리에 위치한 브론즈윅의 한 건물 앞에는 10여 명의 사람들이 열띤 강의를 듣는 모습을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마다 마주할 수 있다. 10대부터 70대까지, 유학생에 원주민까지 나이도 계층도 다양한 이들은 이 건물, 나이팅게일하우스에 입주를 희망하는 이들이다. 나이팅게일하우스는 2013년 사회적 기업에서 건축자금을 출자하고, 일부 건축가들이 펀딩한 자금으로 세운 공동주택이다.
정부 지원금은 일절 없다. 건축가와 건축가의 뜻에 동참한 일부 투자자들은 당시 경기침체로 지역이 쇠락하는 한편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 청년과 1~2인 가구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겠다는 목표로 공동주거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투자자가 아닌 소유주 중심의 주거 조성계획으로 시작된 독일의 공동주거(바우그루펜, 주방이나 욕실을 공유하는 개념) 운동에서 영감을 받아 건축가들의 수익에 상한선을 두는 등 사회적 기업 방식을 참고했다.
나이팅게일하우스의 담당 매니저인 스티브는 “수익을 위한 건축이 아니었다”며 “소수의 건축가들은 지역사회에 미적으로 잘 디자인된 공간이면서도 주민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양질의 공간을 합리적 가격에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말했다. 멜버른 전역에서 일어나는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한 사회적 기업가인 셈이다.
이들은 임대료는 주변 집합주거의 70~80% 수준으로 내렸지만, 인프라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스티브는 “건축가들이 프로젝트를 확정하고 처음 한 일은 기차 노선 가까이에 있는 부지를 매입한 것”이라며 “주택의 바로 옆에 지하철과 트램이 연결되어 있어 도심까지 교통편의가 우수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대신 건축가들은 비용절감을 위해 태양광 설치(전기), 빗물 저장 탱크(화장실) 등 지속가능한 친환경 건축물을 조성하고, 1층과 옥상공간에는 세탁실 등의 공용 공간을 조성했다. 또 노출콘크리트 건축 디자인으로 비용을 절감했다. 이렇게 아낀 비용은 주변 집합주거의 집값보다 임대료를 낮추는 데 일조했다. 건축가들이 수익에 상한선을 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양질의 주택에 수요는 급증하기 시작했다. 매주 수요일 주택 투어가 열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려 3만원짜리 티켓을 구매해야 하지만, 매주 신청률이 높다. 스티브는 “주택의 희망 거주자나 예비 거주자, 건축 디자이너, 젠트리피케이션 해결책을 찾는 각국의 미디어에서 나이팅게일하우스를 찾았다”며 “견본주택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건축철학과는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에 투어를 통해 주택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나이팅게일하우스는 사회적 취약계층을 위한 주거 혜택으로 이들에게 20% 우선 추첨을 받는다. 저소득층, 55세 이상 미혼 여성, 호주 원주민, 성소수자 등이 포함된다. 경쟁률은 공개하지 않지만, 꽤나 센 편이다. 매주 적게는 6명에서 많게는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투어를 신청하고 나이팅게일하우스 입주에 관심을 쏟는다. 대기자도 있다. 나이팅게일하우스의 주민 티파니는 뉴사우스웨일스의 한 농장에서 살다가 이곳 멜버른으로 이주했다. 미혼모인 그녀는 지난 3년 동안 숙소를 구하지 못했고, 초반에는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다가 몇 년간은 노숙자로 길거리를 떠돌았다. 노숙 여성을 돕는 단체에서 그에게 나이팅게일하우스를 소개했고, 추첨을 통해 1년 전 이곳에 입주하게 됐다.
티파니는 “이렇게 안전한 곳에서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나이팅게일하우스가 아니었다면 멜버른에 이런 종류의 주택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사회 평가도 좋다. 지자체의 보조금 없이 민간 소규모 투자에 의해 공공주거지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시사점을 준다는 것이다. 나이팅케일하우스의 홍보매니저인 케이트는 “지역사회 주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며 “나이팅게일하우스를 시작으로 지속가능성을 강조하는 개발업자들이 최근에 굉장히 많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실제 나이팅게일 프로젝트는 나이팅게일하우스를 시작으로 주변 지역에 나이팅게일 빌리지, 나이팅게일 밸러랫(Nightingale Ballarat) 등 다양한 프로젝트로 확장되고 있다. 나이팅게일에서만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만 17개, 이미 15개의 나이팅게일 프로젝트는 호주 전역에서 실현되고 있다. 나이팅게일하우스는 최근 호주에서 본격화되고 있는 사회주택의 선도모델인 셈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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