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의 시대가 오고 있다?
“정말 어렵습니다.”
얼마 전 만난 레미콘 회사 최고경영자(CEO)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가 대부분 중단되면서 레미콘 수요도 사라진 탓이라고 했다. “얼마나 어렵냐”고 물었더니 “체감으로는 1997년 외환위기에 버금간다”고 했다.

기업인 특유의 엄살이려니 했지만 사례가 적지 않다. 서울 논현동 지하철 3호선 신사역 앞 부지에는 지하 9층, 지상 14층의 오피스텔이 들어설 예정으로 철거작업이 한창이었다. 지금은 중단된 상태다. 시행사는 2021년 토지 매입과 철거를 위해 금융회사 11곳에서 브리지론 1580억원을 빌렸다. 문제는 작년에 생겼다. 본격적인 공사를 위해선 PF대출을 받아야 했는데 금융회사들이 난색을 표했다. 공사는 중단됐고, 시행사는 브리지론조차 상환하지 못한 채 매달 10억원가량의 이자만 내고 있다고 한다.

서울 청담동 프리마호텔 부지를 49층 고급 주상복합으로 개발하는 ‘르피에드 청담’ PF도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 26곳의 금융사로부터 4640억원의 브리지론을 빌렸으나 만기 연장에 진통을 겪다가 최근에야 1년 연장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신규 공사만 흔들리는 게 아니다. 멀쩡한 건물이나 부지도 싼값에 나오고 있다. 얼마 전 서울 강남역 인근 강남대로변 부지는 평(3.3㎡)당 1억원에 팔렸다고 한다. 시가(2억원가량)의 절반 가격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금융회사들이 담보로 잡았던 땅인데, 소유주가 대출을 갚지 못하자 싼값에 처분했다고 한다.

한 대형 저축은행 대표는 “연체율이 높아지고 있어 신규 대출은커녕 기존 대출 연장도 겁나는 상황”이라며 “다시 현금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했다.

‘현금의 시대’. 많이 들어본 말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에 그랬다. 기업은 물론 부동산과 주식이 헐값에 쏟아졌다. 현금을 가진 자는 골라잡기만 하면 됐다. 최대 승리자는 외국계 벌처펀드였다. 뉴브리지캐피탈은 제일은행, 칼라일은 한미은행,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각각 인수한 뒤 되팔아 엄청난 수익을 올린 게 대표적이다.

기업만이 아니었다. 2000년과 2001년 외국 자본이 사들인 오피스빌딩은 각각 1조원어치를 넘었다. 대부분 장부가의 절반도 쳐주지 않고 사들였다. 일부 국내 기업과 내국인도 톡톡한 재미를 봤다. 기업이나 부동산, 주식을 헐값에 사들여 몇 년 뒤 수십 배의 수익을 남기고 되팔았다는 신화가 곳곳에서 피어났다.

물론 현재 상황을 외환위기와 비교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어렵기는 하지만 대기업들의 경영은 안정돼 있다. 금융회사들의 건전성 관리도 양호한 편이다. 문제가 되는 건 일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가계다. 중소기업의 49.7%의 이자보상배율이 1을 밑돈다.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이익으로 이자조차 갚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자영업자의 폐업은 현재 진행형으로 파산신청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영끌’ 해서 집을 샀으나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매도한 2030세대도 최근 1년 새 12만 명에 달했다.

금리가 내리지 않으면 시중 유동성은 갈수록 마르게 돼 있다. 이를 견디지 못하는 기업과 부동산이 차례로 시장에 나오게 된다. 내년 경제가 올해보다 더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는 기업이 많아지고 기관과 증권사 등이 부실채권(NPL) 시장에 뛰어들 채비를 하는 것을 감안하면 ‘현금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현금의 시대가 오는 걸 막는 게 우리 경제의 당면 과제라는 얘기도 된다.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