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의 제품 포용성 팀 총괄을 맡고 있는 애니 장바티스트는 그의 책 ‘구글은 어떻게 디자인하는가(Building for Everyone)’ 서두에서 위와 같은 예시로 ‘인클루시브 디자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디자인에 관심이 있거나 디자인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용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포함된, 폭넓은, 포용적인’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 인클루시브(Inclusive) 그리고 디자인이 만나 이야기하려는 건 무엇일까.
특정 상황 혹은 환경 속에서 혼자만 배제된다고 느껴졌을 때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하다. 특히 매일매일 사용하는 일상 제품 혹은 서비스에서 이러한 감정을 경험했을 때 해당 제품이나 서비스에 실망하거나 소외감을 느낀다.
때로는 분노의 감정까지 느껴진다. 제품, 서비스 혹은 콘텐츠가 사용자에게 이런 감정을 경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디자이너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다양한 답이 존재할 테지만 가장 뻔하면서도 명확한 답은 ‘좋은 디자인’을 하는 것이다.
좋은 디자인은 유의미한 변화 일으키는 솔루션이자 도구
그렇다면 대체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위대한 디자이너들은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현대 디자인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용구인 “Less but better(더 적게 하지만 더 좋게)”를 말한 디터 람스는 좋은 디자인은 심플하다고 했다.
디자인사의 주요 사조로 꽃을 피웠던 아르데코 시기에는 심미적인 가치를 중요시해 럭셔리함과 고급스러움을 나타낼 수 있는 디자인을 좋은 디자인이라 칭했다. 하지만 디자인의 본질과 가치는 심미적인 것만으로 한정 지을 수 없다.
이에 디자인 평론가 존 헤스켓은 ‘디자인이란 본질적으로 우리의 필요에 걸맞고, 우리 생활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주변 환경을 만들고 꾸미려는 인간의 본성’으로 규정했다. 디자인의 ‘효용성과 의미의 결합’을 강조한 것이다.
이후 디자인 이론가 리처드 뷰캐넌은 ‘디자인은 어렵고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라고 역설했다. 이렇듯 다양한 답변을 종합하면 ‘좋은 디자인이란 삶 속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솔루션이자 도구’임을 알 수 있다. 20대에 3년간 80대 할머니로 분장한 패트리샤 무어
1980년 미국의 젊은 산업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가 있었다. 그녀는 냉장고 손잡이를 디자인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조부모 손에서 자란 그녀는 문득 ‘힘이 약한 노인들도 쉽게 열 수 있게끔 디자인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다.
이러한 의견을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라고 인정받던 동료 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에게 공유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상당히 냉담했다. 동료들의 냉소적인 반응에 그녀는 적지 않은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디자인이 가진 선한 영향력을 믿었던 그녀는 현대 디자인사의 흐름을 바꿔 놓을 아주 급진적인 실험을 진행한다.
20대인 그녀가 80대 노인으로 변장해 철제 보조기로 다리를 뻣뻣하게 만들고, 솜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도움을 받아 사실적인 주름으로 만들고, 뿌연 안경으로 일부러 시야를 뿌옇게 한 채 3년이란 시간을 살아간다.
지팡이, 보행기, 휠체어를 활용한 이동 경험을 통해 평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인지하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몸소 체감한다.
불과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를 한 시간이나 걸려 가야 했고, 식당 문을 열거나 식품점에서 물건을 꺼내는 아주 간단한 행위조차 쉽사리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디자이너로서의 생각과 철학을 대대적으로 바꾸게 된다.
본인의 경험을 통해 디자인을 문제 해결의 도구로서 바라본 그녀는 이후 유니버설 디자인 제품으로 유명한 옥소(Oxo)의 굿 그립을 탄생시킨다. 이로써 그는 옥소 창립자 샘파버와 함께 ‘사회적 의식이 있는 디자이너 40인’, 미국 뉴스가 뽑은 ‘새 천년을 정의하는 50인’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된다.
소아마비로 인해 평생을 휠체어를 타야만 했던 건축가 로널드 메이스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정의한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1970년 ‘장벽 없는 건축설계’의 일환에서 나온 용어다. 장벽을 제거하는 배리어프리 디자인에서 더 나아가 장애·성별·나이·신체적 차이 등에 제약을 받지 않고 누구나 쓸 수 있는 디자인을 말한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제품과 건축에 더 치중돼 거의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인 공용성을 강조한다. 반면, 다양성이 중시되는 디지털 기반의 현대 사회에서 탄생한 개념인 인클루시브 디자인은 커뮤니케이션과 서비스 영역까지 확장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한다. 인종·소수자·사회적 소외계층과 약자를 모두 포함해 사회 구성원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고려된 포용적인 디자인 개념이다.
배리어프리 디자인, 유니버설 디자인, 인클루시브 디자인 모두 디자인이 우리 삶 속 유의미한 도구로서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는 통로라는 점에서 지향하는 바가 유사하다. 그러나 인클루시브 디자인은 방법론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배리어프리 디자인과 유니버설 디자인이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인클루시브 디자인은 결과물에 앞서 과정 중심의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리하면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노인 등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주된 사용자로 포함해 이들이 제품·서비스·웹·비즈니스 프로세스 등 전반적 분야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인클루시브 디자인이다. 이러한 포용성에 대한 담론은 디자인 영역뿐만 아니라 기업들의 브랜딩과 마케팅, 홍보(PR)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든 사람에 대한 배려가 담긴 ‘문 손잡이’
디자인의 본질에는 배려라는 키워드가 함축돼 있다. 사실 일상 속에는 디자인적 배려가 다양하게 녹여져 있다. 키 차이를 고려한 높고 낮은 지하철 손잡이, 스마트폰의 보이스 오버 기능, 물이 끓으면 소리가 나는 주전자 등 수많은 예시가 있지만 인클루시브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건 ‘문 손잡이’다.
대부분이 동그란 손잡이를 사용하는 데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 혹은 불의의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사람, 또는 손이 미끄러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이 손잡이로 문을 열어야 한다면 상당한 불편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상황과 사람들의 특성이 고려되고 배려돼 디자인된 손잡이가 도어 핸들이다. 이 손잡이는 손의 악력이 약하거나 다섯 손가락이 아니더라도, 혹은 손이 미끄러운 경우나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팔꿈치로 문 열기를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디자인 속에 함축돼 있는 배려를 통해 인클루시브 디자인 관점에서 디자인된 사례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편리함을 도모하는 것을 넘어 사람의 목숨까지 살릴 수 있다.
“이제 기업은 나이·인종·민족·젠더·사회경제적 지위·위치·언어와 관계없이 모든 고객을 섬기는 것이 고객 서비스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애니 장바티스트는 말한다. 다양성과 포용성 전도사 조 저스탄트는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포용하지 않으면 의도치 않게 배제하는 결과를 불러온다”고 강조했다.
세상은 숨이 가쁠 정도로 더욱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소비자 혹은 사용자가 모두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 당장 지금부터라도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인클루시브한 디자인을 모든 단계에 담아야 한다. 결국 그것이 비즈니스의 새로운 성장 기회와 지속적인 성공을 이끌게 될 것이다.
. 권영미 인터브랜드 한국법인 수석 디자이너
※참조 : 소외 없는 디자인을 꿈꾸며(김성연)·결과 중심에서 과정 중심의 디자인으로 : 인클루시브 디자인(김병수)·26세의 나이에 80대 노인으로 변장한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가 말하다(김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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