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this the real life? Is this just fantasy? (이건 정말 현실일까? 이것은 그저 환상일까?)”
영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퀸(Queen)의 명곡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apsody)’의 가사다. 2023년 한 해의 한국 콘텐츠 트렌드와 시장 상황은 이 가사 한 줄로 설명이 될 것 같다.
더 짧게는 ‘Real or Fantasy’. 현실과 환상, 그 경계를 넘나들며 K콘텐츠는 흐르고 확산됐다.
K콘텐츠는 올해 한류 열풍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젖혔다. 특정 한두 작품만이 아니라 다수의 작품이 해외에서 널리 인정받게 된 것이다. 꿈만 같은 일이 현실이 되면서, 사람들은 오히려 웬만한 성과엔 놀라지도 않게 됐다. 국내외에선 일반인 예능부터 다큐멘터리까지 현실에 밀착해 ‘날것’에 가까운 작품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들은 현실을 다뤘음에도 극적인 순간들을 연출해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평을 받았다. 이처럼 다양한 K콘텐츠가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시장엔 암운이 드리웠다. 특히 중심축의 하나인 영화 산업에서 초라한 성적표를 받으면서, 차라리 꿈이길 바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연 한국 콘텐츠 산업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2024년 새해에 보다 큰 발전을 이뤄내기 위해 올 한 해를 되돌아보고 점검해야 할 때다. 일상이 된 한류…꿈같은 현실에 되려 ‘무감각’
한류는 이제 전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사랑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넷플릭스 글로벌 순위 상위권에 한국 콘텐츠 다수가 올라가는 일은 흔한 일이 됐다. 지난 11월 6~12일 기준 넷플릭스 비영어권 TV쇼 부문 순위에도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4위에, ‘무인도의 디바’가 6위에, ‘힘쎈여자 강남순’이 7위에 올랐다. 이같이 K콘텐츠가 글로벌 차트를 화려하게 수놓는 현상은 올 한 해 동안 꾸준히 이어져 왔다.
개별 K콘텐츠를 즐기는 데서 나아가, 한국 문화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강해지고 있다. 지난 5월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엑스오 키티’는 미드(미국 드라마)임에도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을 배경으로 삼았다. 주인공 키티가 한국에 와서 한국 명소를 찾아다니고, 한국 음식을 먹는 식이었다.
지난 22일엔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오징어 게임’의 실사판 ‘오징어 게임: 더 챌린지’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영국 한 제작사가 만든 이 프로그램에선 실제 456명의 참가자가 리얼리티쇼 역사상 최대 상금인 456만 달러(약 60억원)를 놓고 생존 게임을 벌인다. 지원자는 무려 8만1000여 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최종 선발된 사람들은 ‘오징어 게임’에 나온 그대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구슬치기’ 등 지극히 한국적인 게임을 수행했다. 과거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진풍경이 벌어지고, 세계 곳곳에 방영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K팝 역시 이젠 명실상부한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게 됐다. 지난 19일 미국에서 열린 ‘2023 빌보드 뮤직어워드’엔 처음으로 K팝 4개 부문이 신설됐다. ‘톱 K팝 투어’, ‘톱 글로벌 K팝 아티스트’, ‘톱 K팝 앨범’, ‘톱 글로벌 K팝 송’ 부문으로 방탄소년단(BTS) 멤버 정국과 스트레이 키즈, 뉴진스, 블랙핑크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빌보드 뮤직어워드’는 ‘그래미 어워드’,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와 함께 미국 3대 음악 시상식으로 꼽힌다. 그만큼 권위를 자랑하는 시상식에서 K팝 부문을 따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이에 대해 K팝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아예 특정 부문을 신설해 K팝 아티스트가 일반 부문 수상을 못 하게 막은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그 의도가 ‘인정’인지 ‘견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건 그만큼 K팝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게 된 한류. 이런 현상 앞에서 국내 사람들은 무덤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해외에서의 성과가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일로 느껴지는 ‘무감각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작품과 아티스트가 해외에서 사랑받게 된다면, 이 행복한 무감각의 시대가 장기화될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 같은 리얼리티, 내 얘기 같은 드라마
올 한 해 큰 화제가 된 콘텐츠들을 꼽자면 단연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솔로’와 같은 일반인 예능부터 ‘피지컬: 100’과 같은 리얼리티쇼, ‘나는 신이다’와 같은 다큐멘터리가 골고루 인기를 얻었다. 모두 이전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장르다. 하지만 현실에 철저히 기반을 뒀다는 점, 그러면서도 현실을 뛰어넘어 마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처럼 짜릿한 긴장감과 몰입감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나는 솔로’의 일반인 출연자들은 방송인들과 달리 욕망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매회 극적인 갈등 상황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시청자들은 이를 통해 현실과 방송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됐다. 상금 3억원을 걸고 최고의 ‘몸’을 찾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피지컬: 100’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일반인 참가자들의 치열한 경쟁이 흥미를 자아낸 것은 물론 동지애까지 빛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국 BBC는 ‘다음 한국 문화 트렌드는 K-리얼리티쇼?’라는 제목으로 ‘피지컬: 100’ 열풍을 다루기도 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면, 드라마 부문에선 오히려 내 얘기처럼 현실감 있게 표현된 작품들이 많았다. 지난 1~3월 방영됐던 ‘더 글로리’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학교폭력’이라는 현실 속 심각한 문제를 다뤄 반향을 일으켰다. 나아가 전 세계에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고 확산시키는 ‘글로벌 스피커’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더 글로리’가 사회 문제를 정교하게 계획된 ‘복수’라는 수단으로 해소해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면, 지난 3일 공개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현실 속에서 마음을 다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힐링’ 콘텐츠로서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엔 상사에게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해 정신 질환을 앓게 된 직장인, 워킹맘으로서 바쁜 일상을 사느라 자신은 돌보지 못해 우울증 가성치매를 앓게 된 여성 등 다양한 캐릭터가 나왔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이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위로받았다. ‘차라리 꿈이었으면’…참담한 영화 시장
이 같은 K콘텐츠의 확산에도 국내 콘텐츠 업계엔 큰 불안감이 흐르고 있다. 가장 심각한 고민거리는 영화 산업이다. 국내 영화 산업은 ‘기생충’으로 전성기를 맞았지만, 팬데믹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올해 국내에서 개봉한 한국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넘는 작품은 ‘범죄도시3’ ‘밀수’ ‘콘크리트 유토피아’ ‘잠’ ‘30일’ 5편에 불과하다. “1000만은커녕 100만 넘기도 힘들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웬만한 대작이나 기대작조차 참담한 성적표를 받고 있다.
1차적인 원인으로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영화를 감상하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극장을 자주 찾지 않게 된 영향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현상을 모두 설명하긴 어렵다. 한국영화 대신 ‘스즈메의 문단속’과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본 관객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거액의 제작비가 잇달아 투입되고 있는 만큼 한국영화 전체의 스케일은 커졌지만, 정작 내용이 부실한 작품이 많아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콘텐츠 시장의 중심축의 하나인 영화 산업이 무너지면, K콘텐츠 열풍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나아가 국내 주요 콘텐츠 기업들과 창작자들의 생존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결국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다시 한번 제고해야 하지 않을까.
2024년 한류 열풍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한국 작품이기에 더욱 각광받는 지금의 ‘K프리미엄’ 현상을 이어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보다 다양하고 수준 높은 콘텐츠가 꾸준히 만들어져야 한다. 다가오는 새해엔 현실과 환상,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크나큰 감동을 선사하는 콘텐츠가 더욱 많이 나오길 바란다.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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