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가업승계 전략]
“골든타임 지났다” 가업 승계 ‘발등의 불’[한국형 가업승계 전략①]
한국이 초고령 사회 진입을 앞두면서 산업화 시기였던 1970~80년대 창업세대의 고령화 또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오래된 기업일수록 경영자의 고령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해 30년 이상 된 중소기업을 조사한 결과 대표 가운데 60대 이상이 80.9%, 70세 이상은 30.5%였다. 이런 이유로 가업승계를 논의하고 실행에 옮기는 ‘골든타임’이 이미 지났다는 우려가 나온다.

세대교체기에 접어든 중견기업의 최대 고민은 가업승계다. 성공적으로 승계를 마친 기업은 수익성 개선 및 고용창출 등의 경영성과가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안정적 승계로 기업 수명을 늘린 장수기업은 사회경제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장수기업은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자 고용 창출, 지역사회 기여 등 사회적 순기능을 수행한다. 설립 10년이 되지 않은 신생 기업보다 30년 이상 버텨온 기업의 매출액과 일자리 창출 능력이 10배 이상 높았다. 조세부담·까다로운 특례요건…가업승계 ‘첩첩산중’대다수 기업은 기업의 영속성을 위해 가업승계 방식을 따른다. 현재 10년 이상 된 중소기업 600곳 가운데 78.4%가 가족을 통해 기업경영을 유지하고 있다. 기업이 오랫동안 쌓아온 지식과 기술, 경영 노하우를 후대로 전수할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선대에서 일궈온 가업을 유지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도 가업승계를 선택하는 요인이다.

조세부담과 후계자 부재로 가업승계가 어렵다면 차선책은 매각이다. 매각은 넓은 의미에서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출구 전략으로 여겨진다.

현재 가업승계를 막는 가장 큰 걸림돌로 높은 조세부담이 꼽힌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최고 세율(27.1%)보다 약 1.8배 높은 수준이다. 세금 부담으로 승계 대신 매각을 택해도 양도소득세와 매각대금에 대한 상속·증여세 문제가 남는다. 주식을 팔면 매각 차익에 대한 최대 27.5%까지 양도소득세를 내고, 매각 대금을 상속 또는 증여하면 최대 50%까지 세금을 내야 한다.

정부는 세 부담을 덜기 위해 2008년부터 가업상속공제제도와 증여세 과세특례제도를 도입했다. 가업상속공제는 일정 요건을 충족한 가업상속에 상속공제를 적용해 가업승계에 따른 상속세 부담을 줄여주는 제도다. 과세특례제도 또한 자녀에게 가업을 계획적으로 사전 증여할 수 있게 지원한다. 하지만 두 제도의 연평균(2016~2021년) 활용 건수가 각각 93건, 180건에 불과하다. 제도의 수혜자인 기업이 활용하기 어렵게 설계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가 1·2세대 승계 중소기업인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사전·사후 요건을 모두 충족할 수 있다고 응답한 기업은 4곳 가운데 1곳(27.5%)에 그쳤다. 나머지 72.5%는 제도를 이용하지 못하거나 이용하더라도 사후관리를 위반해 세금을 추징당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세법 개정안에 따르면 사전·사후 요건이 완화됐지만 실효성이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가업승계 세 가지 성공 전략은여러 기업의 가업승계를 자문해 온 삼일PwC EPB(Entrepreneurial and Private Business) 플랫폼은 승계 관련 논의들이 세금 문제로 귀결되고 있지만, 성공적인 승계를 위해서는 ‘비즈니스’가 중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재윤 EPB 플랫폼 리더는 “경영철학과 이념을 후대로 계승하고, 혁신을 통한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업승계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한국형 가업승계의 성공 전략을 첫째, 장기적이고 단계적인 승계 프로세스(process)의 수립, 둘째, 체계적인 패밀리(family) 운영, 셋째, 세대교체에 따른 경영 혁신(innovation) 등 세 가지 키워드에서 찾으라고 조언했다.

첫째, 승계 프로세스는 ‘최소 15년’ 잡아라. 승계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하나의 프로세스로, 철저한 준비와 실행이 필요하다. 외국 연구에서는 최소 15년에서 최대 20년까지를 이상적인 승계 기간으로 삼는다.

반면, 국내 기업인은 승계 과정을 지나치게 짧게 본다. 기업인 10명 중 4명이 성공적인 승계 준비기간을 2~5년이라고 답했다. 한 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인이 가업승계 예상시점으로 꼽은 평균 연령은 74.6세였는데, 15년의 준비 기간을 감안하면 최소 55세부터 가업승계를 준비하는 게 바람직하다.

안상희 대신경제연구소 지속가능센터 부대표는 체계적인 승계 프로세스를 위해 후계자의 연령대와 해당 업종의 비즈니스 순환주기를 고려한 ‘승계 로드맵’을 그려보라고 조언했다. 특히 주식을 단계별로 증여할 때 이 로드맵을 통해 승계 시점과 해당 기업 업종의 하락 시점이 만나는 곳을 고려해 증여 타이밍을 설정할 수 있다.

둘째, 가헌(家憲)과 가족이사회(family board)를 도입하라. 기업의 경영철학을 체계적으로 확립해 구성원과 주기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남영호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가족이 사업에 관여하는 이유와 경영철학을 담은 가헌 정립을 주문했다.

가족이사회도 필요하다. 가족이사회에는 지분을 갖고 있으나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가족구성원까지 포함시켜 승계 과정에서 빚어질 수 있는 갈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남 교수는 “가족을 빼놓고 가업승계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며 “가족끼리 자주 만나 철학을 공유하고 기업의 전반적인 비전을 공유하는 자리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가업승계에 있어서 가족관계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사례가 명품 브랜드 구찌와 에르메스다. 구찌는 창업주가 맏딸을 상속에서 제외시키며 가족 분쟁이 시작됐고, 이후 3세가 경영에 참여하면서 세대 간 분쟁으로 커졌다. 가족 내 소송과 청부 살해 등으로 얼룩진 구찌 가문은 결국 경영에서 손을 떼고 현재 케링그룹이 구찌를 운영하고 있다.

반면, 에르메스의 창업주는 가업을 물려줄 아들이 없자 기업 정신을 물려주기 위해 새로운 승계구도를 만들었다. 또 여러 세대를 거치며 후계자가 늘자 소유권을 가족 내에서 통제하도록 지배구조를 개편했다. 이를 위해 지분을 팔려면 가족 내에서만 팔도록 합의서를 작성했다. 가족 안에서 경영철학과 원칙을 만들고 공유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셋째, 후계자에게 ‘혁신’을 물려줘라. 사람처럼 기업에도 생존기-성장기-성숙기-쇠퇴기로 이뤄진 생애주기가 있다. 제품을 시장에 내놓고 고정적인 매출이 발생하는 ‘생존기’를 지나면, 상품이 다양해지고 사업 분야가 확장되는 ‘성장기’, 기업의 성장세가 최고조에 이르는 ‘성숙기’를 거쳐 ‘쇠퇴기’에 이르는 4단계를 지나게 된다.
김선화 한국가족기업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성숙기나 쇠퇴기에 이르러 세대교체가 이뤄진다.

세대교체 이후에도 기업이 생존하려면 창업주는 기업 내부에 혁신의 씨앗을 심고 꽃피워야 한다. 이를 위해 기업은 잘나가는 성장기에 그다음을 준비해 재도약의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결국 얼마나 체계적으로 후계자를 육성하고 기업가 정신을 심어주느냐에 따라 기업이 쇠퇴기로 접어들지, 재도약할지가 결정된다.

김 소장은 “가업승계의 두 가지 핵심은 경영철학을 잇는 것과 새로운 혁신 DNA를 물려주는 것”이라며 “창업 이념을 지키면서 혁신을 추구한 기업들이 장수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염희진 삼일PwC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