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회사권력 이용한 돈 벌이...회사 뿌리가 썩는다[박찬희의 경영 전략]
기업재무에서는 경영자가 회사권력을 이용해 사업기회를 빼돌리는 ‘사익편취(tunneling)’나 ‘과도한 보상(compensation)’, 회삿돈으로 과도하게 누리는 ‘특전(perquisite)’ 등으로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서 ‘G’는 이런 일들로 이해관계자의 이익이 침해되는 것을 막자는 뜻이 담겨 있다. 과거 회계장부를 조작해 만드는 비자금에나 주목하던 시절보다 많이 유식해진 셈인데, 경영의 현실은 훨씬 심란하다.

기업지배구조의 이론이나 이를 인용한 기사에는 탐욕스러운 대주주 경영자와 그 일족이 회사를 마음대로 자기 돈벌이에 이용하는 내용만 나오지만, 사실은 눈치 보며 서로 끼리끼리 손잡고 버티며 권력과 돈을 만드는 영악한 임직원들의 꼼수도 만만치 않다.

‘해먹기 경영’이 회사 사업 곳곳에 차곡차곡 달라 붙으면 하는 일마다 이상하게 변질되고 이런 일에 맞는 사람들만 남아서 회사의 뿌리가 썩는다. 전략경영의 틀에서 속 깊은 사연들과 해법을 생각해 보자.
신사업 개발에 올라탄 사내정치기계류 수출로 시작해서 무역으로 확대, 굴지의 대기업이 된 A사. 최근에는 ‘도전과 혁신’을 내걸고 신사업 진출이 한창이다. 해외 투자은행과 컨설팅에서 영입한 인재들을 내세워 정보기술(IT), 미디어, 반도체 소재 분야에 투자하고 인수합병(M&A)에도 나서고 있다.

투자자들은 불만이다. 분명히 무역회사에 투자했는데, 왜 미디어 사업에 투자자 허락도 없이 돈을 퍼붓느냐는 얘기다. 미디어 사업의 미래와 기존 사업군과의 시너지를 설명하고 적절한 시기에 분사해서 상장시키겠다는 전략을 설명해서 달래보지만 정말 심각한 사정은 따로 있다.

투자은행과 컨설팅에서 영입한 인재들은 자기들이 관심 있는, 솔직히 말하자면 회삿돈으로 폼 잡을 수 있는 미디어 사업을 민다. 인수합병이 되면 별 관심도 없던 A사를 떠나 미디어 회사로 옮긴다.

A사에서 평생을 보낸 노회한 중역들은 ‘식민지’로 삼을 만만한 회사를 눈여겨보다 올라탄다. 한때 수출영업의 달인이던 B 부사장은 수하로 부리던 C 상무를 미디어 인수팀에 보내 영향력을 확보하고, 꼼꼼한 관리와 엄격한 자금통제로 유명한 D 기획실장도 인수팀에 사람을 심는다. 인수합병 이후 이 미디어 회사의 기존 전문인력들은 A사에서 온 사람들과 그 뒤의 실세들 앞에 무력하다. 이들의 눈치에 맞추지 못하면 되는 일이 없다.

A사 회장님도 바보는 아니지만, 막상 새로 인수한 미디어 사업은 잘 모르고, 수십 년 같이 일한 B 부사장, D 실장에게 믿음이 더 간다. 이들이 심은 사람들이 ‘A사의 DNA를 전파하는 전도사’라는 이른바 PMI(인수 후 통합작업) 보고서도 그럴듯하다.

A사 회장님이 신세 지는 ‘힘센 분’도 미디어 회사 인수를 권유했는데, 이 인연으로 채용한 그의 아들은 투자은행 출신 인수단장과 친한 친구다. 어느새 이들의 이해구조가 촘촘하게 반영된 새로운 성이 생긴 셈이다.

이제 미디어 회사의 장비 구입과 시스템 구축은 이들 식민 개척자들의 거래와 타협으로 진행되고, 이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사람들이 더해지면 체제는 더욱 공고해진다. 해당 사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잘 아는 사람들을 부리는, 야구선수가 동호인 불러모아 축구 감독 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회삿돈으로 권세를 키우고 여기 반대한 정의로운(혹은 눈치 없는) 사람이 물먹는 사례가 나오면 사람들은 따라하기 시작한다. 그럴듯한 명분은 경영학 책에 널려 있고, 하다못해 ‘핵심역량 확대’라도 붙이면 된다. 인수합병으로 멍든 손해보다 수십 배 더 큰 암덩어리들이 곳곳에 자라는 셈이다.
환관에 포획된 벌거숭이 임금님황제 경영이란 말이 있다. 회사에서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는 대주주 경영자를 지칭하는데, 영화와 드라마에 나오는 황제 같은 생활에 몇몇 스캔들까지 더해져서 익숙한 보통명사가 됐다. 그런데 외척과 환관에 휘둘리다 권신에게 굴복한 허수아비 황제가 있듯이 경영의 현실에도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K그룹은 자동차부품과 건설을 중심으로 4개의 계열사를 가진 중견그룹이다. 곱게 커서 경영권을 물려받은 G 회장은 거친 사업현장이 부담스럽다. MBA 공부와 컨설팅에서 배운 익숙한 전략계획과 관리통제 기법이 훨씬 편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품사업은 자동차 생태계의 온갖 사연들과 얽혀 있고 건설은 인허가·조달계약·금융·노무에 이르기까지 험한 일로 가득하다.

들어도 이해가 안 되고 사방에 머리 숙이고 협상하는 심란한 일들은 중역들에게 맡기고 정리된 보고서와 ‘어전회의’로 파악하니 비로소 마음이 편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구체적인 사업의 현실은 최신 개념과 기법들로 포장된 보고서에 가려지고, 질문까지 짜맞춘 어전회의는 G 회장의 불안을 달래는 심기경호 행사가 된다.

행간에 담긴 속사정과 눈치껏 오래 버티는 것이 목표인 회사 공무원들의 담합은 보이지 않는다.

감독당국이나 사정기관과 관련된 심란한 일들도 G 회장에겐 낯설고 불편하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법대로, 원칙대로 하자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하면 된다”고 나서는 용감한 중역이 더 믿음직하다.

나중에 보면 잠시 편하자고 무리한 일을 벌였거나 아예 거짓으로 무마해서 문제가 더 커지는 경우도 있고, 이런 편법을 승인한 사실만으로도 용감한 중역과 수하들에게 약점을 잡힌다. 급히 쓸 돈이 필요해서 이권사업이라도 챙겼다간 아예 목줄 잡힌 인질 신세가 된다.

꾸미고 짜맞추는 눈가림 궁정정치(宮廷政治)가 자리를 잡으면 애써 목숨 걸고 맞설 생각 없는 회사원들은 대세에 순응한다.

혹시 모를 직언에 대비해서 면담과 일정관리는 더욱 엄격해지고 G 회장의 친구, 지인들에게도 포섭공작이 진행된다. 세상의 솔직한 얘기를 전할 만한 위험인물들은 음해를 해서라도 차단하는데, 물정 모르는 회장 모친이나 부인의 불안감과 허영심을 자극하는 전술도 등장한다.

“잡인들 멀리하고 세계적 인물들과 교류하라”는 우아한 조언이 그 예인데, 황제를 품 안에서 업어 키우던 환관들이 쓰던 방법이다.

개발사업에 포함된 알짜 이권, 야릇한 고급정보는 G 회장의 주변을 포획하는 데 쓰이는 쏠쏠한 수단인데, 이런 서비스가 세심한 배려인지 엉큼한 궁정정치인지 분간하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G 회장은 험한 일에 눈감고 마음 편히 살려다 웃음거리가 되고도 자기만 모르는 벌거숭이 임금님이 된 것이다.

회사가 남의 돈으로 폼 잡고 권세를 키우는 먹잇감이 되고 경영자가 잠시 방심한 사이에 궁정정치에 포획되는 일은 매우 흔하다. 괴롭더라도 현실을 직접 마주하고 눈앞의 말과 글을 한번 더 생각해 보는 투지가 없으면 반드시 당한다.

오래전 모 기업인은 “만만치 않은 직원들이 주는 까칠한 긴장이 부담스러워지면 은퇴하겠다”고 했는데, 그분도 말년에는 주변이 만만한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해먹기 경영이나 궁정정치는 옆에서 조금만 거들어도 한밑천이 생기는 무서운 판이다. 모 대기업 회장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자기만 보필하는 줄 알았던 여비서가 궁정정치의 부속품으로 변해버린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 일이 있다.

훌륭한 사업이라는 제안에는 왜 직접 안 하고 회삿돈을 쓰는지 짚어봐야 한다. 구체적 현실이 없는 보고서와 회의는 없애면 그만이다. 당장 편하자고 만만한 사람들의 뻔한 얘기에 만족하고 그럴듯한 경영학 이론이나 외워 쓰려면 10년 전 강의노트 팔아먹는 엉터리 교수나 하시라.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