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안 관계서 입장 차 재확인, 팬타닐 확산 제재에는 공조
한미일 동맹 강화로 틀어진 한중관계 개선 움직임 나와
이 밖에도 펜타닐 미국 내 확산 제재에 공조하고, 중동문제 해결에도 힘을 합치기로 두 정상이 뜻을 모았다. 내년 재선을 앞두고 중국의 군사 도발을 막아야 하는 바이든 대통령과 경제 회복이 절실한 시 주석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악화일로로 치닫던 양국 관계가 안정화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다만 미·중 패권경쟁의 핵심사안으로 꼽히는 대만 문제와 미국의 대중 수출통제 조치 등에선 여전히 입장 차이를 재확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시 주석을 ‘독재자’라고 언급해 중국과의 급격한 ‘데탕트’ 가능성에는 선을 그었고, 시 주석은 대만 독립을 반대한다는 구체적 행동을 보여달라고 미국을 압박했다. 진전 이룬 두 정상
중국은 작년 8월 낸시 펠로시 당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반발해 국방부 실무회담과 해상군사안보협의체 회의, 전구 사령관 간 통화 등을 차단했다. 사실상 양국 군사당국 간 대화와 협력 채널을 끊으면서 대만 문제 개입에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중국은 양국 간 불법 이민자 송환 협력, 형사사법 협력, 다국적 범죄 퇴치 협력 등과 함께 마약 퇴치 협력도 중단한다고 공표했다. 이후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에서 중국의 군사적 도발이 이어질 때마다 미·중 군사당국 간에도 긴장 관계가 계속됐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군사 대화 재개에 합의한 것은 미·중의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는 ‘가드레일’ 구축의 의미가 있다. 남중국해, 대만해협 주변 등에서 양국 군함과 군용기 사이의 신경전이 불시에 충돌로 비화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갈등 관리에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어서다. 여기에 더해 바이든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시 주석과 나는 위기가 발생하면 전화기를 들고 서로 직접 통화하자는 데 동의했다”고 말했다. 군사 핫라인 수준을 넘어 정상 간 핫라인을 만들겠다는 의미다. 또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담 모두 발언을 통해 “경쟁이 충돌로 비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으며, 시 주석도 “충돌과 대치는 양쪽 모두에게 감당하지 못할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두 정상 모두 양국이 오해와 오판에 의한 예기치 않은 충돌은 피해야 한다는 데 의견일치를 이뤘다. 양안(중국과 대만) 갈등에 대해서도 바이든 대통령이 “하나의 중국 정책을 바꾸지 않겠다”고 말했고, 시 주석도 “수년 내 대만에 대한 군사행동에 나설 계획은 없다”고 화답했다.
이외에도 양국은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의 미국 내 확산 제재, 인공지능(AI)에 대한 양국 전문가 대화 추진, 양국행 항공편 증편에 대한 합의를 이뤄냈다. 특히 중국에서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미국의 사회 문제로 급부상한 펜타닐과 관련해 중국은 펜타닐 원료를 제조하는 화학 회사를 직접 단속해 미국으로의 수출을 억제하기로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문제 해결에 대한 시 주석의 의지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핵심 의제는 여전히 안갯속
이처럼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정상은 미·중 패권 다툼의 핵심 사안인 양안 관계와 미국의 대(對)중국 수출통제 문제에선 입장 차를 재확인했다. 시 주석은 정상회담에서 대만에 무력 사용이 가능하다는 원칙은 유지하겠다고 언급했다. 필요할 경우 무력 사용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또 시 주석은 “미국은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구현해야 한다”며 “대만 무장을 중단하고 중국의 평화통일을 지지해야 한다”고 미국을 압박하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만의 내년 1월 총통 선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시 주석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대만은 여전히 양국 간 가장 큰 논쟁거리로 남아 있고, 내년 1월 대만 총통 선거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며 “바이든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중국의 돌발 행동에 대비하고 있다”고 했다.
미·중 패권 경쟁의 가장 첨예한 주제인 미국의 대중국 경제제재 조치에 대해서도 두 정상은 서로 다른 입장을 내놨다. 시 주석은 “미국이 수출통제, 투자 심사, 일방적 제재 등 지속적으로 중국을 겨냥한 조치를 하고 있다”며 “일방적 제재를 해제해 중국 기업에 공정하고 비차별적인 환경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국가 안보를 위해 중국을 상대로 한 첨단기술 수출통제 조치는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에 맞서는 데 사용될 기술을 중국에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또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의 불공정 무역정책, 비시장적 경제 관행, 미국 기업에 대한 징벌적 조치에 우려를 나타냈다. 양국 간 경쟁의 장이 공정하지 않고, 중국이 기업의 지식재산권을 침해해 투자자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것이 바이든 대통령의 주장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놓고도 바이든 대통령과 시 주석의 접근법이 달랐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반도가 완전한 비핵화를 이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한국·일본 등 인도·태평양 동맹국에 대한 미국의 방어 의지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시 주석은 북핵 문제에 대해 “모든 이해 당사국이 북한의 합리적인 우려를 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합리적인 우려’란 북한이 도발에 나서는 이유가 미국 등 외부 세력에 있다는 의미다. 바이든 대통령은 정상회담 기자회견장을 떠나면서 여전히 시 주석을 ‘독재자’라고 부를 것이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1980년대 이래로 독재자였다”고 돌발 발언을 했다. 이에 긴장 완화에 양국이 협력하되 ‘완전한 해빙은 없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한·중 관계의 행방은
미·중 관계가 안정화의 기틀을 찾은 것과 달리 한·중 관계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미국 APEC 정상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주석 간 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으면서다. 시 주석은 APEC 정상회의 기간 중 대중국 수출·투자 통제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 그리고 후쿠시마 제1원전 핵오염수 방출 문제로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시 주석은 이 밖에도 브루나이·피지·페루·멕시코 정상과도 회담에 나섰다. 하지만 중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이자 주요 교역국인 한국의 윤 대통령과는 단 3분간 만나 지극히 형식적인 대화만 나눴다. 이를 두고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미·일 공조 강화에 외교적 총력을 다하면서 중국과의 사이가 틀어진 영향이 크다는 평가다. 중국은 한·미·일 공조 강화가 북핵 대응이라는 목적 외에 중국 견제라는 목적도 크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이 한·미·일 동맹에 ‘올인’하면서 틀어진 한·중 관계는 올 들어 개선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지난 4월 시 주석의 LG디스플레이 중국 광저우 공장 방문이 대표적이다. 시 주석의 외국계 기업 방문이 매우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도 사상 처음으로 한국 기업을 방문한 것을 두고 한국과의 경제협력 강화를 위해 먼저 손을 내민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 뒤 윤 대통령이 미국 순방을 앞두고 한 외신 인터뷰에서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대만 문제를 꺼내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일로에 빠졌다.
이후 한국 정부도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한 소통 채널 강화 움직임을 보였다. 정부는 지난 7월 인도네시아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과 왕이 외교부장의 회담, 9월 윤 대통령과 리창 총리 회담에 이어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한덕수 국무총리와 시 주석 간 면담 등을 계기로 꾸준히 중국 측에 관계 개선 의지를 내비쳤다. 11월 26일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도 준비 중이다. 회의가 성사되면 박 장관과 왕이 외교부장,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이 부산에서 모여 북한 문제를 비롯해 북·러 간 군사협력 등 지역 정세와 이스라엘·하마스 무력 충돌,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정세까지 폭넓게 의견을 교환하고 협력 방안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 2019년 12월 중국 청두에서 마지막으로 개최된 뒤 4년간 열리지 않은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를 위한 논의도 이뤄질 전망이다. 정부는 올해 안에 3국 간 정상회의를 갖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일정 조율 등 실무적인 이유로 다소 늦춰지는 모양새다. 한 중국 전문가는 “중국의 외교 우선순위에서 한국이 후순위로 밀려있는 상황”이라며 “한국의 외교전략적 자율성을 높이고 국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도 한·중 관계 회복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베이징=이지훈 한국경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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